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83화 (83/320)

83.

아니나 다를까, 정이한의 얼굴에 띄워져 있던 미소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슬쩍 내 쪽으로 눈동자를 굴린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치자 빠르게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눈매에 힘을 잔뜩 주고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 모습이 꼭 경계 태세에 들어간 초식동물 같았다.

그사이 만면에 웃음을 띤 세화 형은 성큼성큼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지척까지 다가온 세화 형을 모른 척하기가 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연습생 권세화입니다. 싱어송라이터고요, 솔로 데뷔 준비 중입니다!”

세화 형은 포근한 이웃집 형처럼 친근하고 경쾌한 어조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유찬 형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인사를 받자, 기다렸다는 듯 이서호도 발랄하게 인사를 건넸다. 강현 형은 조용했는데, 내 뒤에 있어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왠지 고개만 까딱했을 것 같은데.

멤버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세화 형이 내게 말했다.

“그나저나, 하온이는 톡 잘 안 봐?”

“……엇. 연락하셨어요?”

휴대폰을 확인하려고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왼쪽 주머니는 텅 비어있었다. 아무래도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것 같은데, 하필이면 정이한에게 오른손을 내어준 상태라 곤란했다. 빼내면 서운해할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지금 안 봐도 돼. 곡을 조금 편곡했는데, 테스트 녹음하기 전에 어떤 감성으로 부를지 가볍게 논의 좀 하고 싶어서 연락했었거든. 만났으니까 됐지. 시간 되면 점심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할래?”

“점심이요?”

그 말에 내 손을 움켜쥔 정이한의 악력이 한층 세졌다. 조금 세게 잡는 것 같아서 체력을 슬쩍 확인해 보았는데, 빠지기는커녕 평소처럼 잘 차오르고 있었다.

체력이 개복치 되는 건, 접촉한 상대에게 불쾌감을 느꼈을 때만인 건가.

“응. 엔지니어님 오시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감정선 잡아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전화해 볼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만났네?”

“야, 진하온. 소고기 안 먹을 거야?”

이서호가 내 왼쪽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나름 목소리를 낮춘다고 한 것 같은데 워낙 목청이 커서 그런지 세화 형 귀에까지 들린 것 같았다.

“아, 멤버들이랑 약속 있어?”

“네. 실장님이 카드 주셔서요.”

세화 형도 같이 먹어도 되려나? 우리 돈으로 먹는 게 아니라서 같이 먹어도 되는지 헷갈렸다. 한솥밥 먹는 식구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잘 모르겠다.

이럴 때는 역시 유찬 형 찬스지. 형에게 물어보려고 하던 찰나에 세화 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멤버들이랑 점심 먹고 나한테 전화 줄래? 작업실에 있을 거야.”

와! 벌써 개인 작업실 배정받았구나. 하긴 데뷔곡도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이니까 받을 만하지.

“네, 그럴게요. 그런데 형.”

“응?”

“이따 유찬 형이랑 같이 가도 돼요?”

“상관없는데, 왜?”

“유찬 형이 작곡에 관심 많거든요!”

정이한과 세화 형의 곡은 장르가 완전히 달랐다. 이왕이면 다양하게 경험해보는 게 유찬 형한테 훨씬 도움 되겠지? 친해지면 작곡 가르쳐 줄지도 모르잖아.

전생에서 세화 형은 작곡가로서도 이름을 날렸었다. 본인 스타일에 맞지 않는 곡을 하나씩 다른 가수들에게 주다 보니, 자연스레 히트곡을 여러 개 보유한 작곡가가 된 것이다.

친한 후배들한테는 작곡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고, 분명 그런 인터뷰 기사를 봤었다. 유찬 형도 그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헉, 하온아. 나 괜찮은데…….”

“작곡에 관심 있으세요?”

세화 형이 무척 반가워하면서 묻자, 유찬 형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네, 조금.”하고 대답했다.

“와, 진짜 반갑다! 저 작곡 얘기하는 거 좋아해요. 궁금한 거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세요. 저도 부족한 실력이지만,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도와드릴게요!”

“제가 아직 초보 수준이라, 사실 뭐를 잘 모르는지도 몰라요. 이한이한테 조금씩 배우고 있거든요.”

“아, 그럼 이한 씨도 작곡하시나요?”

“……취미로 조금 하는 정도예요.”

세화 형과 정이한은 공손해도 너무 공손했다. 그게 부족한 실력이고, 취미면 베토벤도 취미로 피아노 조금 칠 줄 아는 거겠네. 정이한도 엄청 잘한다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계속 세화 형을 경계하면서 신경 쓰고 있는 티가 너무 나서였다.

“나중에 기회 되면 같이 작곡 이야기해요. 제가 너무 붙잡은 것 같은데, 선배님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친근감 있는 어조로 활기차게 말한 형은 내게 따로 “이따 전화해.”라고 말한 뒤 멀어졌다. 자꾸 선배님이라고 하니까 이상하다…….

나만 느낀 게 아닌지, 이서호가 두 손으로 양팔을 문지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선배님 소리 되게 오글거려!”

“우리가 더 어리지 않나?”

유찬 형이 날 보면서 물었다. 세화 형의 나이는 모르지만, 일단 우리보다 많은 건 확실했다.

“그럴 거예요.”

“이따 만나면 말 편하게 해달라고 해야겠어.”

안 갈 것처럼 대답하길래 설득해야 하나 싶었는데, 나와 같이 갈 생각인 모양이다. 유찬 형 성격에 욕심이 없었다면 절대 안 간다고 했을 텐데. 일 때문에 만나는 건데 방해하기 싫다고 말이지.

역시 배우고 싶은 거야. 그 정도로 관심이 있는 거면, 실장님 옆구리 한 번쯤 찔러 볼 법한데도 아직까지 작곡 배우고 싶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있다. 우리 순두부 형.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고도 남을 세화 형이 우리 기획사로 온 게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보면 유찬 형한테는 좋은 기회일 지도 모르겠다. 세화 형이랑 친해지면 제대로 배울 수 있을 테니까. 열심히 판을 깔아줘야겠어.

***

점심부터 소고기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회사로 복귀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항상 소식하던 강현 형이 제일 많이 먹었다. 강현 형 고기 좋아했구나.

“얘들아, 이따 5시에 데리러 올게.”

“네!”

매니저 형은 우리를 주차장에 내려준 뒤 다시 차를 끌고 나갔다. 다른 멤버들은 안무 연습실로, 나와 유찬 형은 세화 형 작업실로 갈 예정이었다.

2층에서 먼저 내리려는데, 뒤에서 “이한 형! 어디가!”하는 이서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정이한이 나와 유찬 형을 따라 내리고 있었다. 이서호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른 채 “우리는 3층!”하고 외쳤다.

“……아는데.”

실수로 내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자신감 없이 주눅 든 정이한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였다. 그래서 세화 형한테 물어봐야 한다는 것도 잊고 “왜 안 돼요. 되죠.”하고 대답해 버렸다. 나 정이한한테 너무 약한 것 같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각인 된 어미 새 따르듯이 나를 졸졸 따라다니니까 책임감이 마구마구 들 수밖에 없잖아. 게다가 이렇게까지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을 실망시키긴 싫으니까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싶기도 했고.

“어? 뭐야! 이한 형도 가는 거야?”

엘리베이터에는 이서호와 강현 형뿐이었다. 이서호는 이쪽을 한 번, 강현 형을 한 번 보다가 삐거덕거리면서 다리 한쪽을 들었다.

“그, 그럼 나도.”

슬쩍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던 이서호는 곧장 강현 형에게 뒷덜미를 붙들렸다. 형은 조용히 이서호를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잡아끌며 우리를 배웅했다.

“다녀와.”

“아악! 안돼! 이한 형! 날 버리지 마! 형!”

이서호의 긴박한 외침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라졌다. 이제 보니 강현 형이랑 1:1로 연습하기 싫어서 도망치려고 했던 거네. 정이한이랑 같이 있으면 덜 혼나니까.

강현 형은 완벽주의자라 완벽해 보이는 안무도 형의 기준에 못 미치면 가차 없이 ‘다시.’를 외치곤 했다. 덕분에 우리 실력은 조금씩 발전해서, 이제는 무대 영상만 보고도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있게 됐지.

무한 ‘다시’의 늪에 깊숙이 발 담근 이서호에게 애도를 표하면서, 세화 형 작업실 문을 두들겼다.

“왔어?”

“네, 그런데, 어. 이한 형도 같이 왔는데 괜찮아요?”

“응? 괜찮지, 그럼. 그런데.”

세화 형은 정이한을 힐끔거리다가 내게 손짓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분위기를 살핀 형은 곧 내 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저 친구한테 뭐 잘못한 거 있나? 날 싫어하는 것 같은데.”

정이한! 너 너무 티 냈다! 형이 알아차려 버렸잖아! 일단 오해부터 풀어주자는 생각에 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 아니요. 형 잘못은 아니고요.”

“나 싫어하는 건 맞는 거네?”

아, 일단 저걸 부정했어야 했나? 어쩌다 보니 이간질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대로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형한테 차근차근 설명하기 위해 서둘러 운을 뗐다.

“아뇨. 형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뭐라고 하지? 형한테 절 뺏길 것 같아서 불안한 모양이에요……? 아니, 이건 좀 어감이 이상하지 않나?

정이한 이미지를 시궁창에 처박아버리기 딱 좋은 설명이었다. 예전에 이러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그 뒤로 부쩍 사이가 가까워져 나를 따르게 됐다고 설명해 주자니, 그건 또 너무 길고.

“아니라?”

“……이한 형이 저희 그룹 멤버들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형을 좋아하니까, 일종의 경쟁심리……? 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세화 형이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불쾌해 보이지는 않는데 왜 저렇게 웃지…….

“헤에. 그래? 하온이가 날 좋아해?”

“네?”

“나 좋아해서 저 친구가 질투하는 거라며?”

질투? 질투가 맞나 갸웃거렸다가, 비슷한 것 같아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대답했다.

“아! 네, 당연히 좋아하죠. 형 노래 듣고 첫눈에 반했는데요!”

겨울 바다는 그만큼 최고의 노래였다. 처음 듣자마자 나를 홀렸거든.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세화 형은 조금 놀란 듯이 반문했다. 그런데 어감이 어째 좀 이상하다? 내가 실언했나? 조금 전 내가 한 발언을 되짚어보던 나는, 이내 내 말에 어마어마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음을 알아채고 얼굴을 화악 붉혔다.

형이 아니라, 형의 ‘겨울 바다’ 노래에 반했다는 뜻이었다고 다시 설명하려고 했을 때였다.

“하온아.”

잔뜩 얼굴을 굳힌 정이한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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