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우리는 거실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오전에 피디님이 던져 주고 간 미션을 고민했다.
[1분 내외의 짧은 숏컷 영상 주제 10개 정하기]
대표로 펜을 잡은 이서호가 바닥에 엎드려서 노트에 큼직큼직하게 미션을 써 내려갔다. 의외로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였다. 글씨도 본인 닮았네.
[1) 커플 자세: 우다다 달려가서 팔 위에 무릎으로 착지하기
A는 양팔을 ㄴ자로 만들고 대기
B는 폴짝 뛰어서 팔 위에 점프
A는 잘 잡아주기!
2) 얼굴 변신: 꾀죄죄한 모습에서 훈남으로 변신
3) 성별 반전: 여장 후 카메라 앵글을 밑에서부터 올려서 얼굴까지 갔을 때 남자 빠밤
이거 날씬한 사람이 해야 하는데 난 안됨. 아무튼 안됨. 난 근육질임.]
이서호는 뿌듯하다는 듯한 얼굴로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일단 오늘 회의 때 이야기 나온 거 다 적었어. 또 뭐가 있을까?”하고 물었다. 유찬 형은 열심히 톡톡 채널에서 유행 중인 챌린지 영상들을 서치하는 중이었다.
“메리미~ 메리미~ 이건 어때?”
유찬 형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영상을 보니 보석 사탕 반지나 링 과자 같은 걸 쥐여준 뒤, 슬쩍 자신의 약지에 끼운 다음 무릎 꿇고 골반을 돌리면서 “메리미~ 메리미~”하고 노래 부르는 거였다. 아주 느끼하고 능글맞은 리듬이었는데 대충 장소를 세 군데 정도 이동해 다니며 찍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무표정을 유지해야만 하는 영상이었다.
“으하하! 이거 웃기겠다!”
이서호가 얼른 ‘4)’를 쓴 뒤에 끄적끄적 써 내렸다. ‘청혼 컨셉…….’
“근데 우리 이거 조회 수 50만 가능할까?”
정이한은 영 자신 없는 눈치였다. 뮤비 조회 수도 이제 겨우 20만을 달성한 우리에게, 50만은 너무너무 큰 숫자긴 했다.
우리 데뷔 무대 조회 수는 애초에 큰 채널에 올라간 거라서 논외였고…….
다음 주 화요일, 리얼리티 풀 촬영이 있는 날 우리가 적은 10개의 리스트 중 게임을 이긴 횟수만큼 영상 주제 뽑기를 할 예정이었다.
최소 1개부터 최대 10개까지.
그렇게 뽑은 주제대로 영상을 만들어서 올린 뒤, 전체 조회수의 합산이 10만을 달성할 때마다 우리가 지난번에 적어서 낸 ‘멤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 쪽지 내용을 들어준다고 했다. 물론, 그것도 랜덤 뽑기였다.
우리가 적은 걸 다 하려면 최소한 50만 뷰가 나와야 했다. 다들 가볍게 적은 모양이라 별생각 없었는데, 피디님이 돌아간 뒤 강현 형이 카메라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게 화근이었다.
“나 해외여행 썼어.”
그 말을 들은 우리는 그야말로 기를 쓰고 미션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런 얼토당토않은 여장까지 리스트에 들어가 버렸다. 저거 뽑으면 어쩌려고…….
왜 흑역사를 스스로 만들려고 하는 거야, 도대체…….
누가 걸릴진 모르겠지만 미리 애도를 표한다. 나만 아니면 되지, 뭐. 아이디어 낸 유찬 형이 하겠지.
“10만이라도 찍으면 다행이게?”
유찬 형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답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기더니 눈을 반짝이며 나를 가리켰다.
“하온이 엔딩요정, 그거 조회수 엄청 나오지 않았나? ‘웃는 얼굴이 예쁜 우리 막냉이’ 뭐 그런 제목으로 하온이 웃는 것만 얼빡으로 찍어서 올려도 10만 이상은 나올 것 같은데?”
“좋아! 그거 5번으로 적을게.”
“더 없나?”
“‘똥 밟았군’ 패러디는 어때?”
그건 또 뭐야…….
다들 미쳤다면서 웃는 걸 보니 나만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런 데서 소외감을 느낄 줄이야. 뭔지 궁금해서 휴대폰을 톡톡 두들겨 검색해 보니 영상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를 슬쩍 재생하자 정이한이 상체를 기울여 내 액정을 같이 봤다.
너도 모르면서 같이 웃었어?
“……이거 뭐예요?”
여자, 남자, 할머니, 어린애가 돌아가면서 똥 밭 위에서 춤추는 영상이었다. 할머니는 비보잉까지 하는데? 우리 중에 이거 할 사람 강현 형뿐인데…….
“웃기지? 거기 원본 영상 있거든. 분장 리얼하게 해서 따라 춰도 좋을 것 같아.”
할머니 분장한 강현 형을 떠올리자마자 웃음이 빵 터졌다. 아, 이거 재밌겠다!
“1분 내외로 만들어야 하니까 8배속으로 빠르게 추면 될 것 같은데.”
강현 형이 아이디어를 보탰다. 춤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영상을 두어 번쯤 돌려본 뒤 벌떡 일어나서 애니메이션 속 안무를 따라 춰봤다. 해볼 만하다. 8배속으로도 출 수 있을 것 같긴 해.
“으하하하! 진하온, 개웃겨!”
이서호가 날 손가락질하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아니, 뭐가 웃겨. 이것도 엄연히 안무인데. 춤이라고.
“우리 군무도 하나 추가할까?”
정이한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모두에게 기각당했다. 숏컷은 무조건 재미가 일 순위라나. 조회 수를 위한 괴물이 되어버렸어. 우리 멤버들 이런 모습 낯설다.
“이 노래 후렴구에 우리 도입무 안무 추는 건요? 안무라기보다는 그냥 장난치는 것처럼.”
안무는 있어 보이게 했지만 결국 때리고, 도망가다가 잡혀 오는 거였다. 가사도 좀 바꿔서 개그 포인트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가사도 좀 바꿔서 웃기게 만들고요.”
“개사까지?”
“네. 유찬 형이 해주세요.”
형의 작사. 작곡 재능을 믿는다.
“난 진지한 사람이라 남들 못 웃기는데…….”
이서호가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형 지금 진짜 웃겼어.”
“죽는다.”
“장난 아니야! 또 웃겼어! 으하하!”
“……흠, 흠.”
화내는 척하고 있지만 은근 좋아하네, 저 형. 데뷔 쇼케에서 성대모사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해. 유찬 형 개그에 욕심 있었구나?
그 후에도 별의별 의견이 다 나왔다. 아이디어 회의인지,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전부 받아 적는 건지 모를 아이디어 회의가 끝났다.
거기서 또 10개를 추려서 최종 리스트를 만들었다. 여장은 모두가 싫어했지만, 그래도 ‘재미’는 보장될 거라는 유찬 형의 강력한 주장에 기어코 후보에서 살아남았다. 흑역사를 자처해서 만들려는 형을 차마 말리지 못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뽑기 운이 좋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
오전 연습 후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데, 실장실로 모이라는 매니저 형의 호출을 받았다. 옹기종기 모인 우리에게 실장님은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전하셨다.
“너희 드라마 까메오 출연해보고 싶은 사람, 손.”
드라마 까메오?
다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멀뚱거렸다. 나는 연기에 뜻이 없었으므로 얌전히 있었다. 드라마 출연 이서호가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갑자기 왠 드라마예요?”
유찬 형이 묻자 실장님이 특유의 미소와 함께 말씀하셨다.
“라이가 단역으로 출연하게 될 드라마에, 너희 중 한 명 정도 까메오로 같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아.”
벌써부터 개인 스케줄 잡히는 건가? 생각보다 너무 이른데. 만일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한다면, 출연한 멤버의 개인 인지도가 그룹 인지도보다 확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도 소년가장이 생기는 건가?
“물론, 대사는 없고 얼굴만 비치는 정도야. 무척 짧게. 하지만 드라마가 너희 활동 종료 후 공백기에 방영될 예정이거든.”
아, 그 정도 수준이면 소년가장까지는 아닐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스케줄이 많이 잡히는 건 좋은 일이었다.
공백기는 많은 팬들이 버티기 어려워하는 시기였다. 활동기에 매일같이 방송에서 얼굴 보다가, 공백기가 되면 그 빈도가 확 줄어버리니까. 자컨이나 W라이브로 떡밥이야 계속 생기겠지만, 우리는 이제 막 크는 중이니까 스크린에 얼굴을 자주 내보일 수 있다면 당연히 좋았다.
“공백기에 팬들한테 떡밥 계속 먹여줘야 하니까 지금부터 공백기 포함해서 닥치는 대로 스케줄 물고 올 거야. 올 한 해는 내내 그렇게 갈 것 같은데, 힘들겠지만 신인상을 위한 일이니 믿고 따라와 주면 좋겠다.”
“네!”
빛혜미 실장님이 밀어주시는 거라면 뭐든지 해낼 거다.
“든든하네. 그래도 스케줄 잡을 때 너희 의사는 확인할 거야. 정말 힘들 것 같으면 꼭 말해줘. 특히 건강 상태. 아프면 참지 말고 무조건 말해야 한다. 알았지?”
상냥한 실장님. 그냥 막 굴리더라도 따라야 하는 게 우리 입장인데 말이지. 멤버들과 나는 다 같이 “네!”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정곤 매니저님이랑 같이 힘내고 있으니까 우리만 믿어. 자,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드라마 할 사람?”
낯선 영역이라서 그런지 다들 선뜻 손을 들지 않았다. 연기하면 이서호지.
“실장님.”
“응, 하온이 할래?”
“아니요. 저 말고, 서호 형 잘할 것 같아요.”
“서호?”
이름을 불린 이서호가 화들짝 놀라 나를 보고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곤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내가? 나?”
“지난번에 뮤비 촬영할 때 보니까 연기 잘하더라고요. 재능있어 보였어요. 서호 형이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진심으로.”
“야, 내가 무슨…….”
이서호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듣고 있던 유찬 형이 “아, 맞아요. 서호 잘하더라고요.”하고 힘을 실어줬다.
“서호 해볼래?”
“……어,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 촬영 시작까지 아직 시간 남았어. 그사이에 연기 트레이닝도 받을 거야.”
연기 트레이닝?
그 말에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경험치 올릴 기회잖아!
“응? 하온이도 하고 싶어?”
“드라마 말고, 연기 트레이닝이요! 저도 같이 받고 싶어요.”
“아, 그럴래? 다른 애들도 같이 받아 볼래?”
“그럼, 저도…….”
정이한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강현 형은 관심 없다며 거절했고, 유찬 형은 고민해 보고 말해도 되는지 물었다.
전문 코치한테 연기를 배우면 경험치가 쭉쭉 올라가겠지? 그러면 포인트를 투자하지 않아도 연기 스탯을 올릴 수 있게 된다. 스탯 올라가는 거 봐서 남는 포인트로 스킬 좀 올리고, 잘하면 춤도 같이 올릴 수 있을지도!
기분이 급속도로 좋아지며 행복회로가 팽팽 돌았다.
“하온이는 세화 씨랑 테스트 녹음 있지?”
“아, 네! 2시부터예요.”
“그래. 세화 씨가 하온이를 진짜 마음에 들어 하더라. 그리고, 내가 들었을 때 그 노래 발매되자마자 무조건 히트 칠 것 같거든. 그만큼 곡이 좋아. 하온이랑 세화 씨 목소리도 잘 어우러질 것 같고. 잘해 봐! 좋은 커리어가 될 거야.”
“네!”
잘해야지. 노래도 S-로 올려 둔 상태라 자신감도 가득했다. 최소한 세화 형 노래를 망치지 않을 정도는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럼 드라마 출연은 연기 트레이닝 한 번씩 받아본 뒤에 결정하자. 다들 점심 아직이지? 오늘은 내가 카드 줄 테니까 이걸로 먹어. 이따 유찬이가 내 책상에 올려두고.”
“네!”
법카다! 이서호가 눈을 번쩍이면서 “소고기 먹어도 되나요!”하고 물었다.
“그래, 먹어도 돼.”
“실장님은 같이 안 드세요?”
왜 카드만 주고 가시지.
“아유, 나 챙기는 건 하온이 밖에 없네. 아쉽지만 난 대표님이랑 외부 일정 있어서 나가야 해.”
“아하…….”
“다음에 먹자.”
“네, 꼭이요!”
실장님이 웃으면서 우리를 문 앞까지 배웅해주셨다. 익숙한 사람과 마주친 건, 소란스럽게 사옥 근처 한우 맛집을 주절주절 읊는 이서호를 따라 복도를 돌아 나왔을 때였다.
“하온아, 안녕?”
“……어? 세화 형?”
나도 모르게 정이한의 표정을 살폈다. 피처링 소식 듣고 꽤 서운해했었는데,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