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79화 (79/320)

79.

벽에 편안히 등을 기댄 채 내가 가장 애정하는 노래 ‘겨울 바다’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충 부르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가사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감정을 담아 진지하게 불렀다.

확실히 음색에 깊이가 생긴 것 같았다. 겨울 바다의 싸비는 꽤 높은 데다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했는데, 그 부분도 전혀 문제없이 매끄러웠다. 오히려 이 곡 난이도가 이렇게 쉬웠나? 싶을 정도로 너무 편안하게 불러버려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불렀지만, 정말 잘 불렀다…….

이 정도면 웬만한 솔로 아티스트들이랑도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은데? A+가 아직 발전하는 신인 가수, 아이돌 메인 보컬급 실력이 맞았다. S-로 올리니까 수준이 확연히 달라졌다. 요구하는 포인트도 많은 데다, 경험치 차는 속도까지 극악이었던 이유가 있었다.

이런 거면 인정이지. 뿌듯하게 웃고 있는데 갑자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을 훔쳐보는 눈동자들이 끔벅끔벅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악! 놀랐잖아요! 왜 그러고 있어요!”

자세히 보니 위에서부터 유찬 형, 정이한, 이서호가 세로로 쪼르륵 붙어 서 있었다. 얼굴만 둥둥 떠 보여서 진짜 놀랐네.

“아, 아니…….”

유찬 형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방문을 밀었다. 그 바람에 가장 밑에 있다 개구리처럼 철푸덕 엎어져 버린 이서호는 일어설 생각이 없는 건지 흐릿한 눈으로 허공만 보고 있었다.

“하온이, 노래…….”

“네? 아, 저 좀 잘 불렀죠!”

노랫소리가 새나가서 엿듣고 있던 모양이다. 잘 됐다. 감상이나 물어봐야겠다. 노래 스탯 ‘S-’가 다른 사람 귀에는 어떻게 들렸을지 궁금했다.

“……서호 형?”

그런데 그때, 이서호의 눈에 굵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눈가를 가득 적시다가 후두둑 떨어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뭐, 뭐야? 왜 울어?”

넘어진 게 아팠나? 아까 유찬 형한테 혼난 게 뒤늦게 서운해졌나? 애가 울고 있으니 맘이 쓰여서,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이서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유찬 형이 다 이해한다면서 어깨를 토닥거리며 달래는 중이었다.

“갑자기 왜 우는 거야? 우리 형아, 유찬 형한테 혼나서 서러웠어요?”

“씨 이, 아니야! 서러운 게 아니라, 크흥, 노래가 너무 슬퍼서…….”

아. 그래서…….

진짜 감수성 풍부하네. 울 정도는 아닐 텐데. 감수성이 풍부해서 연기 재능도 타고난 걸까? 이렇게까지 감정 몰입하기도 쉽지 않은데.

“진하온, 네가, 윽, 네가 너무, 쓸쓸해 보여서, 가슴이 꽉, 조였어…….”

이서호는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이 바닥에 점점이 흩어졌다. S-로 오른 덕분에 호소력이 짙어진 모양이었다. 데뷔 쇼케 날 같은 노래를 불렀을 땐 그냥 잘했다고 좋아했었는데 말이지.

“노래일 뿐인데 뭘 그렇게까지 이입하고 그래. 나 안 쓸쓸해.”

정말이다. 멤버들에게 둘러싸여서 외로움 느낄 새가 없는걸. 그저 노래할 때 그때의 감정을 담았을 뿐이었다. 둔감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민하게 눈치챈 이서호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서호는 팔등으로 눈자위를 슥슥 문질러 닦곤 또렷한 눈매로 내게 말했다.

“야, 너는 힘들면 나한테 말해라. 뭐든지. 내가 다 도와줄게. 알았지?”

나를 뭐로 보고. 내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다. 한껏 비아냥거려줄까 하다가 이 민망함이 쑥스러움에서 오는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도와줄게.

예전에도 이서호한테 이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렇다고 널 좋아하는 건 아니야.’하고 못 박았었지. 감회가 새로웠다.

“서호 형.”

“어.”

이서호가 엎드려있던 상체를 세우면서 대답했다. 내 쪽으로 손을 까딱까딱했더니 순진한 눈망울이 가까이 다가왔다. 카메라를 의식해 이서호가 기겁하지 않을 거리를 지키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이젠 나 좋아해?”

“……아! 진하온!”

아오, 낯간지러워. 이러다간 분위기 진짜 이상해질 것 같으니까 열심히 놀려야지! 신나게 웃어준 뒤 이서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일어났다.

이서호 덕분에 촬영 스케줄 봐서 여유로운 날 멤버들한테 엿보기 스킬 한 번씩 더 써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중간 점검이랄까, 예전과 달라졌으니 개화 조건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호가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스쳐 지나가며 희미하게 “어.”하고 대답한 이서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도망치듯 멀어지는 이서호의 등을 멍하니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야! 웃지 마!”

한껏 멀어진 이서호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씩씩거렸다. 그래봤자 거실로 도망친 게 다였다. 귀엽기는.

거실로 나가면서 슬쩍 메인 미션 경험치를 확인해 봤는데, 여전히 0%에서 미동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유찬 형에게 사진 한 장 찍어 달라고 했더니 0.001%가 올랐다.

혼자 거치 카메라 앞에 있었을 때도 아무 반응 없었던 거 보면, 남이 찍어줘야만 하는 모양이다.

이번 미션, 깨려면 좀 걸리겠네.

***

잔뜩 격양된 흥분감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언제나 무대가 끝난 뒤 진정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손가락 끝이 자꾸 저릿저릿해서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풀었다.

기분 좋은 전율이 내 손가락 끝에 맺혀 있는 것만 같았다. 일주일 중 6일을 무대에 서는데도 매번 아쉽기만 했다.

평소처럼 무대의 여운에 잠긴 채 멍하니 형들의 뒤를 쫓았다. 무대가 끝난 직후엔 항상 기분 좋은 몽롱함에 취해 있는 나를 알아서인지,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무대 위도 좋지만, 나른한 기분으로 형들의 뒤를 따라 대기실로 돌아가는 이 시간도 좋았다. 등 뒤로 들려오는 백 스테이지의 소란스러움이 저 멀리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팔이 확 잡혀서 몸이 돌려 세워졌다.

강제로 의식이 돌아오면서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누구지? 눈앞의 남자는 후드 모자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 또 야구 모자를 눌러 쓴 채였다. 후드 모자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누군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야, 내가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냐?”

……그때 그 소파남이잖아? 어디서 나타난 거야? 재빠르게 표정 관리하면서 죄지은 사람처럼 눈썹을 떨구었다. 진짜 피곤하게 하네.

문라이트는 분명 지난 일요일 음방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마무리한 상태였다. 도대체 왜 방송국에 나타난 거지? 여기서 마주칠 건 또 뭐고.

“죄송합니다, 선배님.”

사과하면서 슬쩍 팔을 빼려고 했는데 힘을 주고 있어서 그런지 빠지지 않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이것도 공격으로 인정된 건지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죄송이 아니라 연락 왜 안 했냐고 묻잖아.”

“윽.”

일부러 아픈 척 팔을 움켜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 이거 떼고 대화합시다. 우리는 신인인 만큼 방송 순서가 빨랐기에 아직 음방이 끝나려면 한참 남아 있었다.

그만큼 방송국 복도에는 사람이 많았다. 괜한 구설 만들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뭐 하는 거야? 얘는 생각이 없나?

“세게 잡지도 않았는데 아파?”

어처구니없다는 듯 콧바람을 세게 뿜은 소파남이 나를 한껏 비아냥거렸다. 아프진 않지만 체력이 빠지니까 놓고 말합시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라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았다. 그냥 안무 연습하다 팔을 좀 다쳤다고 둘러대면 되겠네. 거짓말을 하도 해도 그런지 이제 웬만한 변명 거리는 술술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하? 너 이거 뭐냐?”

내가 입을 열기 전에 강현 형이 무겁고 서늘한 어조로 인사해오며 소파남을 지그시 응시했다. 다음엔 참지 않겠다던 형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는 참아야 하는데…….

하지만, 형은 내 팔을 잡은 소파남의 팔목을 꽉 움켜쥔 상태였다. 이미 사고 쳤다.

“야, 눈에 힘 안 빼?”

아, 우리 형 또 오해받네! 원래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것뿐이다. 강현 형 미소는 레어템이라고. 하지만 선배 앞에서 원래 그렇습니다, 는 절대 통할 말이 아니라 곤란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여기에 가세하듯 등 뒤에서 세 사람의 목소리가 나란히 들려왔다. 과하게 우렁찬 인사에, 우리를 신경 쓰지 않고 복도를 지나다니던 방송국 스태프들의 시선까지 이쪽으로 집중될 정도였다.

그제야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이 슬쩍 떨어져 나갔다. 그 틈을 비집고 유찬 형이 내 앞으로 끼어듦과 동시에 정이한과 이서호가 내 양옆에 섰다. 결과적으로 나는 양옆으론 정이한과 이서호를, 앞에는 유찬 형과 강현 형을 두고 서 있게 되었다.

“너희 뭐하냐?”

소파남이 같잖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히 올린 채 피식피식 웃었다.

“저희 막내라서요.”

유찬 형이 사회성을 발휘하기도 전에 강현 형이 선수 쳤다. 대놓고 뭐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뉘앙스가 너무 적대적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걱정이었다.

“막내인데 뭐. 내가 잡아먹어?”

“…….”

아니 이 형들이 진짜, 이 타이밍에 침묵하면 안 되지……. 소파남의 분노가 실시간으로 차오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안 되겠어. 내가 나서야 해.

강현 형과 유찬 형 사이를 비집고 나가려는데 둘 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정이한은 내 허리를 감싸고, 이서호는 어깨에 팔을 둘러 날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이거 왜 이렇게 조직적이야? 나 모르는 사이 자기들끼리 작전이라도 짜둔 거야?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지나가던 여자 아이돌 그룹 선배님들이 소파남을 알아보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정색하고 있던 소파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어, 그래.”하고 인사를 받아줬다. 그래도 대외용 이미지를 조금은 신경 쓰는구나.

일단은 사태를 수습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양옆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이한 형, 서호 형. 이거 놔요.”

“안 돼.”

“응. 안 됨.”

“방송국 복도에서 이러는 거 우리 이미지에 좋을 거 없어요.”

그렇다고 우리 대기실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문라이트 멤버가 디아스 대기실에 왔다 갔더라는 소문이 도는 것 자체가 싫었으니까. 나한테 볼일 있는 거니까 내가 상대하는 게 역시 제일 깔끔할 것 같다.

“괜찮으니까 놔요. 유찬 형이랑 강현 형 옆에 있을게요.”

“선배님.”

유찬 형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저희 막내한테 연락처 주신 거, 바지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제가 모르고 세탁기에 넣고 돌려 버렸거든요. 죄송합니다. 막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애가 하도 기죽어 있으니까……. 다들 걱정되는 마음에 감싸고 도는 거라서요.”

“하?”

“저희 같은 무명 신인한테 문라이트 선배님들은 너무너무 높은 곳에 계신 기라성 같은 분들이셔서요. 얼굴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떨리고 감동적인데, 제 실수로 선배님 번호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저희 막내가 한동안 정말 우울해했거든요.”

“……그래?”

소파남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네, 그럼요.”

그러면서 뒤를 돌아본다. 유찬 형, 잘하는데? 나는 유찬 형의 말에 맞춰서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저희 막내가 아직 열아홉이라 마음이 여려요. 정말 거듭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런 거면 됐어. 연락처 다시 줄 테니까 나중에…….”

소파남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달갑지 않은 사람과 마주쳤다는 듯, 우리 뒤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왜긴요. 우리 후배님들 무대 보러 왔다가 온 김에 깜짝 놀래켜 주려고 대기실에서 기다렸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잖아요.”

“네가 후배를 챙기는 놈이었나? 몰랐는데?”

“저도 처음 생긴 후배라 몰랐는데, 챙기고 싶어지네요. 김호채 선배님, 우리 후배님은 안 돼요. 아시죠?”

나긋나긋한 어조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던 남자는 어느새 디아스 멤버들을 등 뒤에 두고 가장 앞으로 나와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뒷모습만으로도 풍기는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또라이 새끼.”

소파남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혀를 차곤 그대로 뒤를 돌아 성큼성큼 멀어졌다.

“선배님도 참, 저 연차에 아직도 저렇게 자기PR에 진심이시라니까.”

남자가 한쪽 손을 세워 뺨에 댄 채 우리에게 속삭였다. 정면으로 얼굴을 보니 누군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자자, 얘들아. 대기실로 들어가자. 보는 눈이 많잖아?”

유찬 형과 이한 형의 어깨에 크게 팔을 두른 채, 우리의 걸음을 재촉시키던 남자와 내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아, 거기 처음 보는 삐약이가 마지막에 들어왔다던 친구 맞아?”

그렇게 물어오는 남자의 시선은 정확히 내게 꽂혀 있었다.

그는 선배 그룹 테오스의 리더, 도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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