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제가 왜 공동 1등이죠?”
투표가 조작된 게 틀림없다. 하지만 제작진분들이 조작할 이유가 없잖아? 도대체 왜?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뭐야? 양심껏 밝히자. 누가 진하온한테 투표했어? 유찬 형?”
이서호가 제일 먼저 유찬 형을 지목했다. 형은 입술을 들썩이면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지목당하자마자 푸하핫, 하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 말고 또 누가 같은 생각 했어?”
유찬 형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검지로 슥 닦아내면서 물었다. 정신없이 웃으면서 말하는 바람에 단어가 많이 씹혔지만 알아듣는 데 문제는 없었다.
왼편에서 슬그머니 손을 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정이한이었다. 그러니까 유찬 형이랑 정이한, 두 사람이나 자진해서 나한테 투표했다고? 왜?
궁금증을 담아서 정이한을 지그시 바라봤더니 큼큼, 하면서 목을 가다듬는다. 이유를 말해 봐! 왜 나한테 투표했어!
“그, 아무도 하온이 안 찍으면 속상할까 봐…….”
대답을 듣자마자 유찬 형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유찬 형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하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속 좁아 보여요?”
“아니, 그건 아닌데. 우리 하온이 미역국 실패하고 울상이었잖아. 표도 못 받으면 더 속상해할까 봐 찍었지. 설마 이한이도 그랬을 줄이야.”
이런 건 전혀 기쁘지 않다. 미역국 때문에 동정받다니. 자존심 상해.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저 표 못 받았다고 속상해하지 않아요…….”
이서호가 혀를 차면서 고개 저었다.
“진짜 우리 형들, 아주 진하온한테 잡혀 산다니까. 나는 공정하고 투명하게 강현 형한테 투표했는데!”
“그럼 이한이 찍은 건 강현이랑 하온이겠네.”
“어. 맞아.”
피디님은 어쨌든 투표 결과는 결과이므로 인정하겠다고 하셨다. 결국 나와 정이한을 두고 재투표에 들어갔다. 나는 멤버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투표하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결과는 4:1.
정이한은 또 나한테 투표했다.
“내가 나한테 투표하긴 좀 그래서…….”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변명하는 걸 보니 귀여워 죽겠다. 그래도 이번 투표 사유는 좀 타당해서 납득할 수 있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이건 인정.
“다음엔 그러지 마요.”
“응, 알았어.”
정이한은 내게 애교 부리듯이 고개를 기울인 채 순하게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욕구가 잠깐 차올랐지만, 카메라 앞이라서 참았다. 동생이 형 머리 쓰담쓰담하는 그림은 좀 별로일 것 같아. 그래서 그냥 마주 본 채 방긋 웃어줬다.
“그럼 1위는 이한 씨네요. 원하는 방과 룸메이트 결정권은 이한 씨가 획득했습니다!”
경쾌한 피디님의 발표에 카메라를 의식한 멤버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룸메이트 결정은 새로운 숙소에서 진행할 예정이라 곧바로 뒷정리를 시작했다. 설거지까지 콘텐츠라나.
휴대폰을 돌려받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곧장 미역국 레시피를 검색해 봤다. 왜 내 미역국은 폭망했으며, 정이한이 미역을 꺼내 박박 빨았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래, 제대로 된 레시피만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다음에는 꼭 성공해서 멤버들한테 맛있는 걸 먹여줄 거야. 왠지 오기가 솟구쳤다.
***
숙소에 도착해 메이크업을 한 번 더 손 본 뒤 바로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스태프분들과 카메라는 현관 쪽에 배치되었고, 정이한을 제외한 우리는 거실 창을 등진 채 쪼르륵 둘러앉았다.
새 숙소에서 쓸 방과 룸메이트를 정할 시간이었다.
정이한은 목숨이라도 달린 일인 양 심각한 얼굴로 세 개의 방을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왔다. 정이한은 소심한 데다가 순해 빠졌으니 멤버들이 원하는 대로 배정해 주려나? 반발도 있고 해야 좀 재밌을 텐데.
하지만 우리 멤버 중에 반발할 사람은…….
이서호? 아니야. 쟤는 워낙 단순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할 성향이었다. 강현 형은 2층 침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미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고, 유찬 형도 딱히…….
분량 챙길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정이한이 지정해주면 무조건 싫다고 해야 하나? 다른 방이 좋다고 바꿔 달라고 할까? 사실 나도 별 상관없는 쪽인데…….
“음. 제일 먼저 서호.”
제 양 발목을 잡고 편안히 앉아 있던 이서호가 허리를 곧추세우면서 대답했다.
“응!”
“서호는 현관 바로 옆에 제일 작은 방 혼자 쓰면 어떨까?”
“어? 나 독방이야?”
“으응. 싫어?”
이서호는 커다란 눈을 몇 번 끔벅거리면서 고민했다.
“나는 같이 쓰는 게 좋은데……. 아! 나 잠꼬대 심한 것 때문에?”
“응.”
이 정도로 단호하게 나오는 정이한은 처음 봤다. 잠꼬대가 얼마나 심했길래 독방을 줘. 그래도 정이한 다운 선택이긴 했다.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결정을 한 거니까.
“으아! 그런 거면 알았어. 다들 피곤한데 나 때문에 잠 설치면 안 되지!”
이서호는 상체를 좌우로 흔들면서 경쾌하게 대답했다. 정이한의 표정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찬 형을 향해 몸을 틀었다.
메인 카메라 등지고 있는데…….
거실 창 쪽에도 거치된 카메라가 있어서 상관없으려나?
“그리고 유찬 형이랑 강현이는 제일 큰 방 같이 쓰면 어때?”
아, 이건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다. 성향도 비슷하고, 똑같이 작곡에 관심을 두고 있는 유찬 형이랑 같이 쓴다고 할 줄 알았다. 강현 형이랑 나랑 기상 패턴이 맞기도 하고.
“오! 우리한테 큰 방 줘도 돼?”
“응. 형이니까.”
“알았어. 하온이랑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강현아, 이제 우리가 룸메다!”
유찬 형이 강현 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현 형은 예상한 반응 그대로 아무런 말 없이 손을 맞잡았다. 이제 내가 분량을 위해 장난으로 정이한을 거절……해야 할 차례인데.
“하온이는 나랑 같이…….”
잔뜩 긴장해 꼼지락거리는 손이 눈에 들어와 버렸다. 왼쪽 주먹을 가볍게 말아쥐고 다른 손으로 툭 튀어나온 뼈마디를 엄지로 연신 쓸어대고 있었다.
나를 힐끔거렸다가 시선을 내리깐다. 촘촘한 속눈썹이 떨리면서 팔락거렸다.
……저렇게 긴장하니까 안 된다고 못 하겠다. 장난으로라도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멍청하게 “응.”하고 대답해 버렸다.
분량……. 앞에서 많이 뽑았으니까 괜찮겠지.
“정말? 나랑 잘 거야?”
“네. 같이 자요.”
내리깔고 있던 정이한의 시선이 나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됐다. 길게 찢어진 눈초리가 조금씩 커지더니, 이내 상냥한 호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이제껏 본 적 없는 환한 미소였다. 그렇게 좋은가. 거절했다가 울릴 뻔했네.
결국 새 숙소 룸메이트 정하기는 아무 잡음 없이 심심하게 끝나버렸다. 앞으로도 이럴 것 같으니 평화롭고 사이좋은 게 우리 그룹의 아이덴티티라고 하지, 뭐.
이제 피디님의 주도하에 하는 촬영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나머지는 우리끼리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 알아서 편집하시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촬영팀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스태프분들을 도와 짐을 나르려 했는데, 다들 괜찮다며 극구 사양하셨다.
“하온 씨.”
“앗, 네?”
피디님이 나를 찾아오셔서는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악수를 되게 독특하게 청하시네.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살포시 얹자 갑자기 “으하핰!”하고 웃음을 터트리시기까지 한다.
“……?”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박장대소하는 피디님을 멀뚱멀뚱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흐, 하온 씨, 너무 귀엽네요. 손 말고 쪽지요. 멤버들과 하고 싶은 거 적어서 달라고 했잖아요. 하온 씨만 안 주셨어요.”
“어? 아!”
안 썼다!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형들은 대체 언제 준 거야?
“금방 적어올게요! 죄송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여서 사과하자 피디님이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아니 아니, 그냥 아무 종이에나 써서 줘도 괜찮아요. 지금 적어 주시겠어요?”
“네! 빨리 써 올게요!”
종일 주머니에 넣고 있어서 꾸깃꾸깃 볼품없어진 쪽지를 꺼냈다. 펜, 펜이.
“여기요.”
두리번거리는 내게 피디님이 가슴팍에 꽂혀 있던 펜을 내미셨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들고 멤버들이 없는 곳을 찾았다. 뭐 하냐고 물어보러 왔던 이서호는 쪽지를 적고 있는 걸 보곤 갸름한 눈을 떴다.
“어휴, 진작 좀 하지 그랬어~ 진하온 게으르네~”
자존심에 제대로 스크래치 내는 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서호한테 듣고 싶진 않았어…….
이거나 빨리 써서 드려야겠다. 멤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라…….
곰곰이 고민한 끝에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게 하나 있었다. 대부분 예능에서 빠지지 않는 체험. 쪽지에 쓴 걸 진짜 한다면 꽤 유쾌한 반응이 나올 것 같아서 분량 걱정도 없을 것 같았다.
끄적끄적 써 내려간 뒤 곧장 피디님께 제출했다. 봐도 되냐고 하시길래, 끄덕끄덕했더니 쪽지를 펼쳐 보시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물어보셨다.
“하온 씨는 괜찮아요?”
“아마도요?”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괜찮을 것 같다.
“그렇군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신 피디님은 이내 안주머니에 쪽지를 넣어 갈무리하고, 정리가 끝낸 스태프분들과 함께 숙소를 나갔다. 매니저 형도 편안하게 있으라면서 먼저 퇴근하셔서 남은 건 정말 우리 멤버들과 무인 카메라뿐이었다.
오늘 온종일 카메라 앞에 얼굴을 내보인 덕에 다들 조금 익숙해졌는지, 어제처럼 삐거덕거리진 않았다. 어쩌면 선물 받은 옷 때문일지도 모르고. 이서호를 필두로 멤버들은 패션쇼를 하듯 이 옷, 저 옷 갈아 입어보고 서로에게 골라주기 바빴다.
나도 입어보라는 성화에 못 이겨 몇 번이나 갈아입어야만 했다. 이서호가 만족스러워 할 때까지 패션쇼를 하고, 본능처럼 저녁을 찾았다. 냉장고에 꽉꽉 차 있는 재료를 보고 감탄한 것도 잠시, 나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이유로 주방에서 쫓겨났다. 물론 형들의 요리 솜씨는 정말 훌륭해서, 내 도움 따위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꼭 요리 배울 거야.
***
체력 관리를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일찍 잘 생각으로 침대에 올랐다. 새 침대 매트리스가 적당히 푹신하고 딱딱해서 무척 편안했다.
게다가 새 이불에서 포근한 햇살 냄새가 나서 기분이 좋았다. 덕분에 잠이 솔솔 와 눈이 감기려던 찰나,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시야에 새우처럼 몸을 만 채 배를 움켜쥐고 있는 정이한의 등이 보였다. 잠결에 뱉는 신음인가 싶어서 살금살금 침대에서 빠져나와 얼굴을 살폈다.
눈을 꽉 감은 핏기 가신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정이한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이따금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키고 있었다.
미련하게 혼자 앓고, 나 깨울까 봐 소리까지 죽이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가슴속이 일렁거렸다.
아까 내가 만든 미역국 때문에 탈이 난 게 분명해. 그러니까 먹지 말래도! 정이한이 아픈 게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쓰렸다. 약이 있으려나. 유찬 형한테 물어볼까? 11시니까 아직 안 자겠지?
서둘러 방을 나서려는데, 기운 없이 늘어진 목소리가 나를 잡았다.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기로 했잖아요.”
혼자 앓고 있던 게 속상해서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이 나갔다. 정이한이 꼬물꼬물 움직이면서 “……으응, 미안해.”하고 사과한다. 그게 또 탐탁지 않아서 눈살을 찌푸렸다. 상태 이상을 들켰을 때 걱정하던 형들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 잠깐. 상태 이상! 나 치료하는 스킬 있었지!
구원(F): 타인의 목숨을 구한 당신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다른 사람의 상태 이상을 회복합니다.
스킬 사용 시 체력을 요구하며 체력이 부족한 경우 상태 이상에 걸립니다.
요구되는 체력은 회복하고자 하는 대상의 상태 이상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