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74화 (74/320)

74.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요리라는 말도 그렇고, 실패 시 멤버들의 신뢰 하락이라니. 요리 하나 못 한다고 신뢰가 떨어지는 건 너무 하잖아.

그때 한 스태프분이 조리실로 거대한 돌림판을 끌고 들어왔다. 돌림판은 우리 정면에 놓였는데, 각기 다른 색의 시트지가 붙어 있어 안에 쓰여 있는 글자는 읽을 수 없었다.

“돌림판 안에는 각각의 메뉴가 적혀 있어요. 뽑은 멤버가 직접 요리하시면 됩니다. 다섯 분 모두 뽑아 주시죠!”

서브 미션이 걸려 있으니까 조리하기 쉬운 거면 좋겠는데. 돌림판에 메뉴가 적혀 있는 건 아니라, 돌리는 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 있는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돌렸다.

유찬 형은 계란찜, 정이한은 탕수육, 강현 형은 닭볶음탕, 이서호는 고등어구이, 나는 소고기미역국이었다.

고등어구이가 더 쉬워 보였지만, 내 메뉴도 만족스러웠다. 정확한 레시피는 모르지만 먹어본 짬이 있으니까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역 넣고, 소고기 넣고 끓인 다음에 간 맞추면 되는 거잖아. 마늘도 둥둥 떠다녔던 것 같고……. 또 뭐가 있더라. 무……도 넣었던가? 잘 기억이 안 나네.

“요리에 필요한 재료는 준비해 놨습니다.”

조리대 사이사이에 놓인 트레이 위에 간단한 조미료와 메인 재료들이 있었다. 예능 형식으로 하길래 요리 재료 구하는 것도 조건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주네.

“하온아, 요리할 줄 알아?”

정이한이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속살거렸다.

“해 본 적 없는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으응. 잘 모르겠으면 물어봐. 칼 쓸 때 조심하고.”

“형 요리 잘해요?”

“응. 나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해 먹었거든.”

“어, 그러면 저 레시피 좀 알려주세요.”

확실한 성공을 위해 시작하기 전에 도움 좀 받는 건 괜찮겠지?

“응응. 먼저 미역을 불리고…….”

“스톱!”

정이한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려는데, 피디님이 손바닥을 쫙 펼치시면서 우리를 막았다.

“이번 요리 미션은 개인전입니다.”

개인전? 다 같이 밥 먹자는 건데 개인전이 왜 나오지? 의아하다고 생각하며 피디님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피디님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와 함께 말씀하셨다.

“숙소에 방이 세 개 있었죠.”

“네.”

“하지만 디아스 여러분은 다섯 분이죠.”

“그렇죠?”

유찬 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긍정했다. 피디님이 말씀하신 개인전의 의미를 지금 대화 흐름으로 대충 알 것 같았다.

“각자 맡은 요리를 하고, 다 같이 드신 후 가장 맛있었던 음식에 투표해 1위를 선정합니다.”

1위가 룸메이트 정하는 건가? 이런 형식이면 결과를 예상하기 힘든 다양한 조합이 나올 것 같았다. 결과가 궁금할 테니 팬분들도 즐겁게 보실 수 있을 것 같고.

진짜 다행이다. 완전 노잼 망 콘텐츠는 아닐 것 같아.

예상한 그대로의 설명에 안심하고 있는데, 이서호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동점 나오면 어떻게 해요?”

“동점인 분들만 두고 재투표를 해서 가릴 예정입니다. 하지만, 또 동점이 나온다면 그때는 스태프의 표도 보태게 됩니다.”

아하. 어쨌든 확실히 우열을 가리겠다는 소리구나. 우리는 다섯 명이지만 기권표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현재 시각이 9시 40분, 제한 시간은 11시까지입니다! 그럼 시작!”

나는 제일 먼저 미역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흔들어보니 바스락거리는 녀석들이 안에 가득 들어 있었는데, 정이한이 미역을 불려야 한다고까지는 말해줬으니까 이걸 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다 넣으면 되겠지?

다음으로는 소고기……. 뭐가 소고기야? 핑크빛 도는 고기가 잔뜩 있어서 구분되질 않았다. 조리 전에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있어야 알지. 뚫어지게 보고 있었더니 강현 형이 고기가 담긴 접시를 하나씩 집어 들면서 중얼거렸다.

“흠. 이건 소고기, 이건 돼지고기니까…….”

그러더니 닭 두 마리를 통째로 들고 간다. 강현 형 닭볶음탕이잖아. 형이 은근슬쩍, 이라기엔 대놓고 흘려준 힌트 덕분에 소고기를 주워 올 수 있었다. 형, 고마워요!

그리고 무……. 무가 들어갔나? 먹었던 기억을 열심히 떠올려 봤는데 영 헷갈렸다. 뭔가 비슷한 게 있었는데. 소고기뭇국……에는 당연히 무가 들어갈 거고, 미역국엔 안 들어가던가? 넣어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일단 넣자. 커다란 무 하나와 마늘도 한 움큼 집었다.

“고등어~ 고등어~ 내가 제일 쉽네!”

이서호는 자신만만하게 으햐햐, 하고 웃었다. 그리곤 접시 위에 놓인 고등어 다섯 마리를 통째로 들고 가면서 “진하온, 힘내라~”하고 말했다. 응원하는 게 아니라 약 올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재료를 가지고 돌아온 나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어떤 냄비를 써야 하는 거지?

의외로 요리가 신경 쓸 게 많구나. 일단 최소 5인분을 만들어야 하고, 혹시 모르니 스태프분들 것까지 대충 10인분 정도 만들면 되겠지?

10인분 만들 냄비를 골라야 하는데……. 이 정도 사이즈면 되려나? 조리대 하부장에 크기 별로 쌓여 있는 냄비 중 중간 사이즈를 골랐다. 냄비에 물을 3/4 정도 채우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미역을 불려야 한다고 했으니까 제일 먼저 넣는 게 맞겠지?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양이 너무 적어 보인다. 이거 하나로 되나? 하지만 미역 봉지는 하나뿐이었다. 일단 다 넣자.

“어!”

“아…….”

마지막까지 탈탈 털어 넣는데 갑자기 스태프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가 실수했나 봐. 저런, 잘 좀 하지.

그래도 정이한 덕분에 미역 불리기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소고기 잘라서 넣고, 마늘도 넣고, 무까지 넣은 다음에 끓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네!

곧장 도마를 꺼내 소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너무 질겨서 그런가, 썰다 보니 이게 고기를 써는 건지 찢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어쨌든 잘렸으면 됐지.

냄비에 소고기까지 넣고 보니 아주 뿌듯했다. 미역도 조금씩 불어나는 것 같아! 신기해서 긴 나무젓가락으로 몇 번 휘적거렸다.

“오! 진하온 비주얼 그럴듯한데?”

“그렇지?”

이서호가 알짱거렸다. 고등어구이라서 벌써 끝났나 봐.

“고등어 다 구웠어?”

“아니! 굽고 있어! 어차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구경 중. 그런데 무는 왜 가져 옴?”

“미역국에 무 안 들어가?”

“몰라? 있었나? 잘 기억 안 나네.”

“나도. 그래서 그냥 넣으려고. 넣어서 나쁠 거 없잖아.”

“어어, 원래 국에 무 많이 들어가니까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바로 그거지. 무 없는 국은 본 적이 없다고. 일단 이 녀석을 어떤 모양으로 자를지가 관건인데…….

“……하온아.”

“네?”

나를 불러오는 애처로운 목소리에 뒤를 쳐다보자, 내 바로 뒤편 조리대를 지키고 있는 정이한이 피디님 눈치를 살살 보며 열심히 도리질 치고 있었다. 뭔가 힌트를 주려는 것 같은데 나는 혼자 해야 하므로 “화이팅!”하고 모른 척했다. 하지만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무는 안 넣는 건가 봐.

무를 슬쩍 밀어 둔 뒤 시스템 메시지를 신경 썼다. 도움받았다고 실패 뜰까 봐 걱정했는데 잠잠해서 다행이었다.

마늘까지 퐁퐁퐁 털어 넣어주고, 소금을 한 번, 이건 좀 부족해 보이니까 한 번 더 떠서 넣은 뒤 냄비 뚜껑을 닫았다. 양이 이렇게 많으니까 두 스푼은 넣어야 밸런스가 맞겠지. 이제 끓기만 기다리면 된다.

어질러 놓은 것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렸다. 물이 벌써 다 끓었을 리가 없…….

이게 뭐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린 냄비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미역 줄기를 쳐다봤다. 내가 아무리 요리 재료에 상식이 없더라도 미역이 해초라는 건 안다. 그런데 왜 살아 있는 것처럼 기어 나오는 건데……?

달그락거리던 냄비 뚜껑이 기어코 바닥으로 떨어져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냄비 뚜껑을 밀어낸 미역들이 폭발하듯이 솟구쳐 나왔다.

“……어, 어?”

미역들이 냄비 외벽에 눌어붙고, 가스레인지 위에까지 흘러넘치고 나서야 뒤늦게 정신 차렸다. 후다닥 가서 먼저 가스 불부터 껐다.

내가 미역에 생명을 불어넣었어…….

“하온아, 괜찮아? 안 다쳤어?”

유찬 형이 냄비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서 뛰어왔다. 그제야 주변을 좀 살펴봤는데, 강현 형도 행동을 멈춘 채 경악하는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정이한은 기름에 빠트린 탕수육 때문에 이도 저도 못 한 채 안타까운 눈으로 제 자리에서 서성이기만 했다.

“형, 미역이 살아났어요.”

“무슨 소리야. 이건, 그, 죽은 거 맞을 텐데?”

유찬 형이라고 요리 상식이 나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미역 얼마나 넣었어?”

결국 맞은편에 있는 강현 형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미역 봉지를 가리켰다.

“……전부다?”

“네. 조금 밖에 없던데요.”

“그거 20인분이야. 해초류는 원래 물 먹으면 불어서 부피 엄청 늘어나. 미역 건져내고 다시 해.”

“……아, 네에.”

그렇군. 몰랐네.

아, 잠깐. 아까 스태프분들이 탄식하셨던 게, 설마 나 때문이었나? 내가 주인공이었어? 아, 우리 팬분들 요리 잘하시려나……. 내 뻘짓 그대로 보시겠지? 망했다. 이렇게 된 거 미역국이라도 맛있게 만들어야겠다.

강현 형의 조언대로 미역을 절반 이상 건져내고, 다시 물을 넣고 끓였다. 보글보글 끓자 그럭저럭 좋은 냄새가 나길래, 용기 내어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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