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사문동 아파트 단지는 101동부터 110동까지 밖에 없었다. 201동은 왕복 10차선 도로 건너편에 있었는데, 그러면 쥐글 좌표가 달라지니 이 안에서 목적지를 찾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암호 해석 자체를 잘못했다는 의미였다.
“어…….”
유찬 형의 동공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우리 순두부 형 멘탈 터지기 전에 지원 사격해 줘야겠다.
“쥐글 좌표로 위치 추적하는 건 맞는 것 같거든요? 뒤에 숫자 해석만 틀린 것 같으니까 같이 고민해 봐요.”
“아, 응. 여기.”
주섬주섬 꺼내든 미션지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멤버들 전원이 머리를 맞댔다.
[CG.EACFB, ABF.IGACJ, 2081601]
앞에는 맞아. 지도상으로는 정확하게 사문동 아파트 단지 정중앙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도를 크게 확대하니까 동까지 나오는데 이걸 못 봤구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일단 가서 찾아보자고 했을 테니까.
나는 암호의 숫자를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주변을 훑어봤다. 앞의 영문 암호를 한번 꼬아놓은 걸 보면 뒤의 숫자 암호도 트릭일 가능성이 있었다.
“숫자를 영어로 바꿔봤는데 유의미한 영단어는 아닌 것 같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한참 고민하던 유찬 형이 말했다. 그럼 영문과 숫자 변경은 아니라는 거네. 아까 휴대폰 자판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올라 휴대폰을 꺼냈다. 키보드 자판 종류를 전부 바꿔가며 쳐봤지만, 단어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사문동 아파트를 가리키는 좌표, 그리고 숫자. 저 숫자가 동호수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럼 모든 동이 1로 시작하니까 1로 시작하게끔 규칙을 찾으면…….
1?
“106동 1802호.”
거꾸로 읽으니까 그럴듯한 동호수가 나왔다.
“어? 어!”
“오! 진하온! 한 건 했네!”
정답인지는 가봐야 아는 거지만, 시도해 볼 만하지.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106동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멤버들과 106동 앞에 도착하니 새로운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우리는 모르잖아. 그럼, 여기가 아닌가? 혹시 2081601이 비밀번호인가? 아니면 1802호를 호출해 봐야 하나?
“일단 물어나 보자.”
이서호가 과감히 공동 현관 인터폰으로 1802호를 호출하는 동안 유찬 형은 바짝 긴장해서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아니면 어떡해? 아침부터 괜히 민폐인데…….”
하긴, 우리가 잘못 짚은 거라면 아침부터 엄한 가정집에 웬 커다란 남자들이 찾아온 거니까…….
“그럼 죄송하다고 하면 되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이서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흘러나오는 호출 벨을 아주 편안한 얼굴로 따라서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가만 보니 우리 멤버들 중 이런 걸 나서서 할 사람은 이서호밖에 없네.
“아무도 없나 본데?”
“그래? 여기도 아닌가…….”
“잠시만요.”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숫자 암호대로 쳐보려고 했을 때였다.
“사람 나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던 강현 형이 조용히 읊조렸다. 편안한 캐주얼 차림의 여성분이 문을 열고 나오셨다. 그분은 우릴 보고 잠깐 놀란 듯 멈칫했다가 쫑쫑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잽싸게 106동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좀 느낌이 좋지 않아. 여기가 미션 장소가 맞다면 누군가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고, 그러면 당연히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으아아! 잡, 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보고 쏘아 올린 것처럼 튀어 나간 이서호가 닫히는 문 사이로 팔을 넣어 붙잡았다. 저런 위험한 행동을……!
“그러다가 팔 끼이면 어쩌려고 그래.”
하여간 꼭 한마디를 하게 만든다. 이서호가 실실 웃으면서 안에서 열림 버튼을 누른 채 손짓했다.
“괜찮아, 센서 있잖아. 빨리 와, 빨리 와.”
기계는 언제든지 고장 날 수 있다. 저런 안일한 생각이 사고로 이어지는 거다.
“다음부터는 하지 마. 센서 오류 나면 다칠 수도 있잖아.”
“흐히히. 알았어. 안 할게.”
순순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영 수상쩍다. 하지만 해맑게 방긋 웃는 표정을 보고는 이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이서호에게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상황을 가장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쨌든, 무사히 1802호 앞에 왔는데. 이번에도 문제는 비밀번호. 하지만 힌트라고는 주차장에서 주운 미션지가 전부였다.
“아닐 수도 있는데 일단 쳐 볼게요.”
그렇게 말하며 카메라 감독님들의 눈치를 슬쩍 보았지만, 표정 변화가 없어서 정보를 얻어내긴 요원해 보였다.
그래도 이건 우리를 곤란에 빠트리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괜찮겠지? 정말 이 집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슬쩍 말해주셨거나, 혹은 미리 집 주인분께 이야기를 해뒀을 거다. 그렇게 믿어보자.
삑, 삑, 삑,
그런데 정말 엄한 집이면 어떡하지? 처음 보는 남자들이 멋대로 인터폰을 호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집안에 들어오려고 비밀번호까지 막 눌러대는 거면…….
삑, 삑,
집에 누군가 있다면 이거 공포 영화가 따로 없을 것 같은데? 자칫하면 리얼리티 촬영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갈지도 모르겠어.
삑, 삑. 띡. 띠리릭.
여, 열렸다!
“열렸다아!”
“하아……. 다행이다.”
유찬 형이 가슴에 손을 얹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새가슴인 형은 나랑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정이한이 감탄 섞인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봤다.
“그냥 우리 미션지에 적힌 숫자 그대로 쳤어요.”
“아!”
“빨리 들어가 보자!”
이서호가 철컥, 고민 없이 문을 열었다. 실내 곳곳에 카메라가 잔뜩 달려 있었다. 새로운 카메라 던전이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새 미션지 있나 찾아봐.”
“식탁 위.”
강현 형이 성큼성큼 부엌으로 들어가 작은 카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거침없이 미션 봉투를 뜯는 형의 주위로 간식을 조르는 강아지처럼 달라붙었다.
“여기 우리 숙소라는데?”
“우리 숙소라고?”
“헐, 진짜?”
눈썹을 치켜올린 채 동그랗게 뜬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멤버들은 잔뜩 격양되어 있었다. 이서호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가 유찬 형에게 층간소음 조심하라고 한 소리 들었다.
곧장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다녔지만, 다리를 바둥거리는 게 무척 들떠 보였다.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이서호를 뒤로하고 나는 미션지를 살폈다.
“다른 내용은 없어요?”
“응.”
강현 형도 나에게 미션지를 넘기고서는 방을 살펴보러 갔다.
[여러분의 새로운 숙소에 도착한 걸 환영합니다!]
이게 다야? 별거 없네. 그럼 나도 숙소 탐방이나 해야겠다. 집안을 슥 훑어보니 문이 네 개였다. 방이 세 개, 하나는 화장실이겠네. 아파트 평수가 꽤 넓어 보여서 큰 방에는 화장실이 하나 더 딸려 있을 확률이 커 보였다.
그러면 새벽 출근할 때 조금 늦게 일어나도 될 것 같았다. 화장실 하나가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큰 방이 어딘지 찾아보려던 때였다.
“으악!”
현관이랑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어젖힌 이서호가 별안간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재빠르게 달려가려고 했는데…….
“아, 깜짝 놀랐잖아요오!”
별일 아닌가 보다. 스탭이라도 있었나 보네.
“뭔데?”
다른 방을 살펴보던 멤버들이 모여들어 방 안을 살폈다. 침대 아래에 작은 상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앞에 피디님이 앉아 계셨다. 매니저 형과 메이크업 누나들이 우릴 보고 반갑게 눈짓을 보내왔다. 다들 여기 있었네!
피디님은 무전기를 들어 올라와도 된다고 말한 뒤 우리를 보고 말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자, 다들 앞에 앉아 주세요.”
피디님은 시원스레 웃으면서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모두 피디님 앞에 앉자 곧장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걱정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면 편집하면서 디아스 숙소 주소가 노출되지 않도록 할 예정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촬영에 임해 주시면 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주소 전부 노출됐겠네. 어떤 아파트인지, 몇 동 몇 호인지까지도. 암호 푸느라 전혀 생각 못 했다.
“그럼 본격적인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께 쪽지를 하나씩 나눠 드릴 겁니다.”
피디님이 작은 상 아래에서 꺼낸 빈 쪽지를 상 위에 올려놓으셨다.
“쪽지에 각자 멤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을 적어서 오늘 중으로 제게 주시면 됩니다. 무슨 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단, 멤버 분들끼리 내용을 공유하시면 안 됩니다.”
“해외여행도 되나요?”
이서호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그러자 피디님은 매우 짓궂게 웃으면서 “네, 적는 건 본인 마음이니까요.”하고 대답하셨는데, 그게 왠지 수상쩍게 느껴졌다. 당연히 적는다고 들어줄 건 아닐 텐데…….
“자, 그러면 모두 휴대폰을 반납해 주시고요.”
이제부터는 검색 찬스 없이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거구나. 옆에 계시던 스태프분이 천 주머니를 가지고 오시길래 그 안에 휴대폰을 넣었다.
전달 사항이 더 없는지 피디님은 주섬주섬 상을 접어서 옆구리에 챙기셨다. 내가 궁금해하는 게 보였는지 날 보고 웃으시더니 대답해주셨다.
“아, 이건 저희 소품이라서요.”
“아하.”
“그럼 거실로 이동할까요?”
피디님을 따라 거실로 우루루 몰려나갔다. 거실에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못 봤던 옷이 꽉 찬 행거가 있었다.
코디 누나들이 끌고 다니던 거랑 똑같이 행거 위에는 우리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전부 새 옷 같은데, 협찬 의상인가? 인지도 없는 신인 남돌한테 협찬이 들어올 리 없는데…….
그런데 행거 옆에 서 계신 여성분의 얼굴이 어쩐지 익숙했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서호가 “어! 아까 그분!”하고 소리쳤고, 여성분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꼬리를 접어 웃으셨다.
“이건 멤버분들 옷입니다.”
“어, 이런 것까지……. 감사합니다.”
유찬 형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손사래 치면서 우리 소속사가 준비한 거라고 말해주셨다. 당연히 범인은 한 명뿐이다. 빛혜미 실장님!
다들 행거에 달려들어 옷을 살펴보던 때였다.
“여러분, 배고프시죠?”
피디님의 물음에 이구동성으로 “네!”하고 외쳤다. 아침밥도 제대로 못 먹고 왔는데 당연히 배고프지. 원래는 입이 짧은 편이었는데, 끼니때마다 꼬박꼬박 먹을 것을 넣어준 덕인지 언제부턴가 때가 되면 배고픔이 느껴졌다.
“그럼 식사 먼저 하러 가시죠!”
피디님의 말에 다들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라나섰다. 하지만 잔뜩 기대에 부풀어 차를 타고 이동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식당이 아니라 거대한 조리실이었다.
“오늘 점심은 멤버 분들이 직접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 요리하는 거구나. 배우고 싶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
<시스템: ‘서브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오! 서브 미션 환영하고! 주저할 거 없이 바로 미션을 확인했다.
<서브 미션>
─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요리 혼자 만들기
O 성공 시 데우스의 선물상자 x 1
O 실패 시 멤버들의 신뢰 하락
……?
뭔가 기분 나쁜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