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뭐야? 숙소가 왜 이래?
어제 숙소로 돌아왔을 때부터 이미 곳곳에 카메라가 잔뜩 설치되어 있긴 했었다. 익숙한 숙소가 아니라 카메라 서식지에 내가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그 때문인지 멤버들 모두 삐거덕삐거덕 고장 나서 어색하게 대화하다가 흩어졌다.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이었는데 왜 그렇게 어색했는지.
적응한다고 노력하긴 했는데 예상보다 강력하게 존재감을 주장하는 카메라는 강적이었다. 나라고 다를 건 없어서 침실까지 차지한 카메라가 부담스러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다.
그리고 지금, 잠에서 깨 나와 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있던 숙소 거실의 가구가 모두 빠져있었다. 바닥에 쌓인 먼지만이 저 자리에 원래 가구가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카메라, 알고 보니까 쭉 켜져 있던 거 아냐? 우리 잠드는 거 관찰하다가 전부 잠들었을 때 몰래 들어와서 짐 뺀 거 아니냐고, 이거.
나는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 얼굴을 인식해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바라봤다.
“이렇게 큰 가구가 빠지는 동안 아무도 안 깼다고……?”
리얼리티 방영하면 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가구가 다 빠져서 그런지 더욱더 카메라가 주인인 집 같았다. 던전이라도 잘 못 들어온 느낌이야…….
거실을 둘러보다가 원래 소파 테이블이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엽서 봉투를 발견했다. 미션 봉투겠지? 저건 이따가 멤버들 일어나면 다 같이 열어봐야 할 테니까 내버려 두자.
신경 쓰이는 미션 봉투를 뒤로하고 일단 씻으러 들어갔다. 화장실에는 당연히 카메라가 없어서 느긋하게 샤워하고 나왔는데도 아직 7시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이른 시간이라 멤버들 깨려면 꽤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평소라면 연습이나 하러 갔을 텐데, 오늘은 촬영이니까 숙소에 콕 박혀 있어야 했다.
나 혼자 있는 장면은 대부분 편집될 테니 편하게 있어도 되겠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면서 돌아다니는데, 혼자라서 그런가 더더욱 집요하게 날 쫓는 카메라가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다. 차라리 뭐라도 하면 좋을 텐데.
아, 아침상 차리자.
다행히 냉장고는 남겨뒀는데 열어보니 내용물도 그대로 있었다. 데뷔하기 전에 딱 한 번 아침을 차린 적 있는데, 그때 다들 기쁘게 먹어줬던 기억이 났다. 그 뒤에 요리라는 걸 좀 배워볼까 했지만, 도저히 시간이 안 났지…….
그래도 있는 반찬 가지고 상 차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냉동실에 꽝꽝 얼려둔 국을 꺼내서 해동하는 사이 강현 형이 눈 비비면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 나와 같이 일시 정지.
“……이거 뭐야?”
“몰라요. 일어나니까 이렇게 되어 있던데요?”
형을 등진 채 선반에서 즉석밥을 꺼내 뚜껑을 뜯었다. 그 사이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해 돌아보니 강현 형이 과감하게 미션 봉투를 뜯어보고 있었다.
“헉! 형!”
“……?”
눈으로는 날 보면서도 손은 주저 없이 미션 봉투를 해체했다.
“그거 미션 아니에요? 형들 다 있을 때 열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런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강현 형은 미션 내용을 본 뒤였다. 못 본 척하자고 말하려 했는데 형의 반응이 이상했다. 강현 형은 오묘한 표정으로 날 한 번 보고, 시계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하온아, 너 일어난 지 얼마나 됐어?”
“저요?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아요.”
“아…….”
낭패 섞인 탄성과 함께 강현 형이 미션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첫 번째 멤버가 기상한 후 2시간 이내로 주차장 내려오래.”
“…….”
미션 내용을 빠르게 훑어본 뒤 고개를 들었다. 강현 형과 나는 잠시 서로의 눈을 보면서 서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유찬 형!”
“야, 이서호! 일어나!”
잠이 덜 깨서 흐리멍텅한 유찬 형한테 미션 내용을 주입시키듯 말해줬다. 저쪽 방은 강현 형이 책임지고 정이한과 이서호를 깨우는 중이었다. 일단 유찬 형의 등을 떠밀어서 빨리 씻으라고 들여보낸 뒤 시간을 확인했다.
7시.
정확하게 몇 시에 일어났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무작정 서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넉넉하게 잡아도 남은 시간은 50분. 네 명의 멤버가 전부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가기에는 부족했다. 그냥 물로 세수하고 양치만 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아이돌이고, 지금은 리얼리티 촬영 중이다. 아무리 팬분들이 리얼한 우리를 보고 싶어 한들 꼬질꼬질한 모습까지 좋아할 리 없잖아. 다행히 나는 이미 뽀송뽀송한 상태라 초조하게 시간을 재며 형들의 준비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은 점점 가고, 마침내 확실한 실패 각이 서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팬분들한테는 오히려 미션 실패가 더 재밌을지도 모르고…….
***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카메라 감독님 두 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지금부터 어딘가로 이동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카메라 감독님이 따라다닐 리 없잖아.
시간 내에 내려오면 편안하게 차 타고 가는 거고, 실패하면 알아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그런 거 아닐까?
“어? 저기!”
이서호가 원래 우리 벤이 주차되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주차 칸 정 중앙에 숙소에서 본 것과 똑같은 미션 봉투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다음 미션?”
“……우리 리얼리티 찍는 거 맞아?”
정이한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아침부터 미션에 쫓겨서 우르르 몰려다니게 될 거라곤 예상 못 한 모양이다. 피디님이 계시니까 뭔가 미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내가 예상한 것도 이런 건 아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또 뭔가 새로운 미션 같은 게 생기려나…….
이 정도면 아이돌 리얼리티가 아니라 리얼리티 예능 수준 아닌가. 뛰어다닐 각오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정이한한테 슬쩍 붙었더니 뒤에서 날 끌어안아 준다. 백허그 당한 채로 편안하게 기대 있으니 떨어지던 체력이 다시 차올랐다. 어떤 미션이 나올지 모르니까 최대한 유지해 놔야지.
“이게 도대체 뭐지?”
이서호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미션지를 뚫어지라 봤다. 이리저리 고개를 틀면서 보는 모양이 그림이라도 그려져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뭔데?”
“모르겠어…….”
유찬 형에게 미션지가 넘어갔다.
“으응? 이게 뭐야?”
이어서 강현 형이 유찬 형 어깨너머로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뭐지?”
다들 똑같은 반응이니까 궁금하잖아! 내가 보러 가기 전에 유찬 형이 나와 정이한에게 다가왔다.
“너희는 알겠어?”
미션 봉투에는 알 수 없는 영문과 숫자만 나열되어 있었다.
[CG.EACFB, ABF.IGACJ, 2081601]
이게 뭐야…….
전혀 모르겠는데.
“모르겠는데요…….”
“……나도.”
우리는 주차 방지턱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딱 고정되어 멀뚱멀뚱 서 있었다.
“힌트 없어요?”
“없는 거 같은데.”
유찬 형은 미션지를 앞뒤로 뒤집어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서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양 손바닥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나는 항복. 이런 건 쥐약이야.”
“……나도.”
강현 형까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다. 우리 디아스의 지성인! 가장 똑똑해 보이는 유찬 형을 믿어보자. 뭔가 떠오르는 거 없어요?
“……하온아, 나 부담돼.”
“왜요…….”
“너무 기대하지 말아 주라…….”
유찬 형의 활발한 두뇌활동을 위해 형에게 보내던 열렬한 시선을 거두었다.
“검색해도 걸리는 게 없네.”
한참을 골몰하다 포털 사이트에 입력해 본 유찬 형이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피디님이 우리 수준을 너무 높게 보신 거 아닐까? 어쩌면 여기서 헤매다가 다시 그 삭막한 숙소로 돌아갈지도…….
침대는 남아서 바닥에서 잘 일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영문 줄임말이라기에는 너무 길어. 이건 경우의 수가 많을 테니 아닐 거고.”
아, 맞아. 분명 미션지를 보기 전에 나는 어딘가로 이동하는 미션이 나올 줄 알았다. 주차장으로 보냈으니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잖아. 그러면 저 암호도 목적지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나는 곧장 유찬 형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일리 있는데, 그럼 이게 좌표라는 건가?”
“방위 표시 같은 거?”
정이한이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서 방위표, 지도 읽기 따위를 검색해봤다. 나를 팔로 끌어안듯이 가두고 휴대폰을 조작한 덕분에 나도 검색 결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쉽게 답을 알 수 있게끔 만들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만약 그런 종류였다면 휴대폰을 전부 회수했겠지.
휴대폰 소지를 허용했다는 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그럼 한 번에 나오는 게 아니라 무언가 꼬아서 만든 암호일 확률이 높지. 그걸 검색하다 보면 답이 나올 테지만…….
내 머리로는 한계다. 나는 슬쩍 유찬 형한테 지금까지 유추한 내 생각을 말해줬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한 유찬 형이 다시 미션지와 휴대폰을 들고 씨름하는 걸 옆에서 지켜볼 때였다.
“아~ 배고파…….”
“밥 먹으면서 생각해볼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이미 차는 떠났고, 미션지는 우리 손에 들어왔다. 굳이 지하 주차장에서 고민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냉장고만 안 빼놓은 이유가 있었네.
“하온이가 즉석밥 뜯고 있었는데.”
“네, 아침밥 차리려고 했죠.”
“형들 밥 먹자아-!”
이서호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공동현관으로 향했다. 나한테 매달린 정이한을 끌고 따라가려는데, 혼자 오도카니 서 있는 유찬 형이 눈에 밟혔다.
“유찬 형!”
“…….”
유찬 형은 계속 휴대폰과 미션지만 번갈아 보면서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득의양양한 미소와 함께 눈에 광채가 돌았다.
“나 해석했어!”
“진짜요?”
정이한의 팔을 풀고는 냅다 유찬 형한테 달려갔다. 형이 턱을 치켜든 채 두 팔을 펼쳤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내가 그 앞에 서자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젓는다. 뭘 바라는 거야?
“이럴 땐 ‘형, 대단해요!’ 하면서 안겨야지.”
“……제가요?”
“응. 빨리빨리.”
유찬 형이 나를 채근했다.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안 와!”
이서호가 엘리베이터 온다면서 우리 쪽을 두리번거렸다.
“암호 풀었어!”
“진짜야?!”
이서호의 우렁찬 외침이 지하 주차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더니 와다다 뛰어와서 유찬 형을 덥석 끌어안았다.
“형! 대단해!”
유찬 형이 ‘봤지? 이렇게 하는 거야.’ 하는 시선으로 나를 봤다. 덕분에 유찬 형의 요구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저런 건 이서호만 할 수 있는 애교잖아!
“암호 뜻이 뭔데?”
대답을 채근하는 이서호에게 씩 웃어 보인 유찬 형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전부 우리 하온이가 준 힌트 덕분이야! 암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