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형 혹시, 이 얘기하려고 팬미팅 때 의미심장하게 저 본 거예요?”
“너 눈치 빠르잖아.”
강현 형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완전히 낚였네. 강현 형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뛰어다니며 제대로 놀아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형이 어떤 의도로 이랬는지 잘 알기에 불쾌감은 없었다.
“형은 참 자상하네요.”
“……처음 듣는 소리인데.”
금시초문이라는 듯 밍숭맹숭한 어조가 돌아왔다. 모르는 척하기는. 유찬 형이나 정이한을 배려해서 날 몰래 불러내기 위해 낚은 거면서. 형들이 알면 또 속상해할까 봐 그런 거잖아.
“그럼 저만 아나 보죠. 형 자상한 사람인 거.”
강현 형은 “아닌 것 같은데.”하고 툭 뱉으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지금 어떤 얼굴인지 궁금했지만, 그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형이 저 걱정하는 건 잘 알겠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다음에도 전 똑같이 할 거예요.”
날 피해 도망쳤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잔뜩 좁아진 미간이 형의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미간을 향해 손을 뻗자 시선이 내 손가락 끝을 따라 움직였다. 일그러진 미간 사이를 검지로 살살 문지르자 부드럽게 풀어진다.
“그러니까 다음에도 참아주세요.”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더라도 참아야 한다는 거 다들 알잖아. 우리는 신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 먹이사슬 가장 밑에 있으니까.
성공한다는 건 에베레스트를 등산하는 것과 같다. 출발하기 전에 모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점검하고, 검토하고, 연습한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했다 한들, 발 한번 잘못 디디면 보이지 않았던 크레바스 밑으로 뚝 떨어져 버리고 만다.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산산이 부서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거, 백강현도 잘 알겠지. 나 혼자만의 꿈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니까.
그러니까, 다음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진대도 나는 기꺼이 나설 거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금방 털어 낼 수 있으니까.
때마침 씻고 나온 정이한이 나를 불렀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소파에서 일어나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강현 형이 우직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필요하면 내가 나서.”
“형은 익숙하지 않잖아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 보기보다 단단하거든요.”
내 손목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단단한 손등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톡톡, 두들기면서 웃어줬다.
“하온이 안 씻어?”
정이한이 목에 걸친 수건으로 앞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아내면서 물었다.
“씻어요.”
“우리는 항상 널 걱정해. 그것만 알아둬.”
그제야, 그런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강현 형의 손이 떨어졌다. 하지만 형의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할 순 없었다. 내가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
일요일. 오늘도 음악방송 스케줄이 있었기에 이른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매니저 형이 오기 전까지는 어제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매니저 형이 온 순간 달라졌다.
“자자, 서둘러! 빨리빨리 움직이자. 좋은 소식 있는 데 가면서 말해줄게.”
무척 상기된 어조와 들뜬 느낌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예능 출연 통과된 건가? 아무리 방송업계에 주말이 없다지만, 빨라도 너무 빠른데? 게다가, 분명 미팅을 가진 후 출연 여부가 확정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예능 쪽은 아닐 것 같은데…….
그렇다고 테오스 데뷔 무대 협상이 벌써 끝났을 리도 없다. 인기 아이돌의 첫 번째 데뷔 무대는 여러모로 좋은 협상 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 테오스를 위해 우리가 딸려가면 모를까 그 반대가 되긴 힘들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아는 남은 소식은 세화 형 피처링 정도인데, 이건 저렇게 들뜰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게만 전하면 되는 소식이니까 이것도 제외.
실시간 차트도 확인했지만, 여전히 100위권 밖이므로 이것도 아니다.
결국 내가 모르는 이야기라는 소리인가? 자꾸 궁금하게만 하고 말 안 해주는 형 때문에 괜히 매니저 형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하온이 궁금해?”
“……네. 궁금해요.”
말해줘요. 궁금해 죽겠으니까.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하온이 귀여워서 좀 더 숨겨야겠다.”
이럴 수가…….
허한 마음을 안고 매니저 형한테서 떨어졌다. 아무래도 이야기 들으려면 이서호의 준비가 끝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곧장 이서호한테 날아갔다.
“이서호 형!”
“어, 어! 다 해가!”
“서둘러!”
“잠깐만, 잠깐만!”
이서호는 허겁지겁 셔츠를 주워 입으면서 가벼운 봄 점퍼를 옷장에서 꺼내 들었다. 점퍼를 팔에 끼워 넣기만 한 채 그대로 후다닥 달려 나온다. 머리 말릴 시간도 없었는지 움직일 때마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감기 걸리지.”
“괜찮아, 괜찮아. 난 튼튼함.”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힘들어?”
“힘들어! 겁나 힘들어……. 너처럼 잠 없는 애들은 모른다.”
“그럼 밤에 일찍 자.”
날 한 번 보고는 절레절레 고개 저어 대는데, 꼭 ‘넌 아무것도 몰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원래 새벽에 노는 게 제일 재밌는 법이거든~ 일찍 자면 아깝잖아.”
무슨 대단한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번에는 내가 한심하다는 눈길을 보내면서 이서호를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왜! 급하다면서?”
“시끄러워. 머리는 말려야 할 거 아냐.”
빨리 의자에 앉기나 하라고 닦달하면서 드라이기 선을 꽂았다. 시간이 부족해서 마구 흔들면서 말렸더니 이서호가 살살하라면서 칭얼거렸다. 시끄러워. 나는 일부러 더 거친 손길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면서 말렸다.
“엌엌, 야! 어지러워!”
“사람이 책임감 있게 굴어야지. 노는 게 좋아서 늦게 자는 건 형 마음이지만, 그래도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서 제대로 일어나야 할 거 아냐. 유찬 형이랑 이한 형이 매번 깨우느라 고생하는 거 미안하지도 않아? 형들은 무슨 죄야.”
“너 잔소리하는 게 꼭 우리 엄마 같다.”
“누가 엄마야? 형 같은 아들 필요 없거든?”
“아니, 내가 왜? 우리 엄마는 내가 예뻐 죽겠다는데?”
이서호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몰라서 묻는 거야? 도대체 집에서 얼마나 오냐오냐 귀하게 큰 거야……. 그러니까 아직도 이렇게 일곱 살 어린애같이 굴지.
아니지, 오냐오냐 자란 덕분에 팬분들 대할 때 애교가 몸에 밴 거잖아. 팬분들한테 잘하는 거 생각하면 이 순수함을 지켜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좋게 말해 순수한 거지 나쁘게 말하자면 철없는 거다. 뭐가 나은 건지 알 수 없어서 헷갈렸다.
그사이 대충 두피는 마른 것 같아 드라이기를 껐다. 시간이 부족해서 완전히 말릴 순 없지만, 이제 물은 안 떨어지니까 괜찮겠지.
“다 됐어. 가자.”
“응!”
경쾌하리만치 발랄한 대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서호와 함께 방에서 나가자 매니저 형이 흐뭇한 미소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출발해요!”
좋은 소식이 뭔지 궁금해 죽겠거든.
궁금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형들은 이미 출발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이서호와 내가 대충 신발을 구겨 신었다.
자, 이제 말해주세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매니저 형을 지그시 올려봤다. 형은 흠흠, 헛기침한 뒤 당차게 말했다.
“벤에서 말해줄게.”
왜 이렇게 우리랑 밀당하는 건데? 기대치를 자꾸 높이는 게 아주 수상했다. 이러다가 실망스러운 내용이면 그 원성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아, 형 너무해요!”
이서호가 매니저 형의 옆구리를 검지로 콕콕 찌르면서 칭얼거렸다. 옆구리도 근육으로 덮여있는지 형은 간지럼을 타긴커녕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호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궁금해?”
“네!”
우리가 동시에 대답하자 매니저 형이 눈을 반짝거렸다. 드디어 말해줄 것 같은 기색에 강현 형도 매니저 형을 주시했다.
“흠흠. 좋은 소식이 세 가지 있어.”
세 개나? 기대감이 마구마구 치솟아 올랐다.
“일단 하온이.”
저요? 내 이름이 불리자 머릿속엔 곧장 피처링이 떠올랐다. 이게 벌써 협의가 끝났을 리 없는데?
“겨울 바다 피처링 하고 싶다고 한 거, 그거 픽스됐어. 두 아티스트가 모두 원하는 일이라서 실장님이 바로 오케이 하셨어.”
응? 뉘앙스가 이상하다. 분명히 기획사에서 정식으로 의뢰한다고 했는데?
“세화 형 기획사에서 벌써 피처링 의뢰가 왔어요?”
“응? 아, 하온이 너도 몰랐구나?”
“뭐를요?”
“권세화 씨, 우리 기획사더라고.”
“헐.”
어째서? 아니, 우리 기획사도 좋긴 좋지만 왜 여기를 골랐지? 솔로 아티스트니까 더 좋은 기획사가 많았을 텐데 이유가 조금 궁금해졌다.
“아, 진하온 뺏어가네~”
이서호가 장난스레 말하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매니저 형은 이서호를 향해 한 번 웃어 보인 뒤 말을 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형의 말을 놓칠세라 귀를 쫑긋거렸다.
“두 번째는 예능! 그것도 확정이야.”
“…….”
이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한 게 다 나왔다. 그러면 마지막 소식은 설마 SVSKPOP에 우리 영상 올라가는 건가? 테오스 컴백 방송사를 우리 그룹 푸시해주는 걸 목적으로 결정했다고? 설마 이건 아니겠지…….
“미팅 전에 먼저 방송 포맷이 왔는데, 괜찮아서 실장님께 보냈거든. 실장님도 오케이 하셨어. 미팅해서 일정 조율만 하면 돼. 이건 촬영 일정 정해지면 다시 알려줄게.”
“어떤 형식인데요?”
유찬 형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매니저 형한테 얼굴을 들이대면서 물었다. 잔뜩 격양된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고정 패널과 게스트가 대결하는 구도인데, 1:1로 게임 해서 승자가 상대팀 멤버를 뺏을 수 있어. 그렇게 최종 경기 멤버를 정하고, 우승팀에게는 상품이, 패배팀은 벌칙이 주어지는 포맷이야.”
그냥 흔한 게임형 예능이구나. 하지만 저런 서바이벌 포맷의 예능은 촬영하는데 하루를 온전히 써야 한다. 게다가 운 없으면 나 혼자 다른 팀에 갈 수 있는 거잖아.
체력……. 무조건 부족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