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68화 (68/320)

68.

겨울 바다 음원!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마지막 톡을 읽고, 또 읽었다. 드디어 겨울 바다 음원이 나오는구나! 광대가 제멋대로 솟구쳐 올라갔다.

너무 좋다! 진짜 좋은데…….

<겨울 바다>에는 원래 피처링이 없었다. 오직 세화 형 목소리만 오롯이 담겨 있는 곡이었다. 자칫하다가는 내가 망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너무나 애정하는 노래에 내 목소리를 더할 수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다.

[권세화 형: 말이 없네]

[권세화 형: 역시 좀 부담스러운가? ㅠㅠ]

계속 톡을 보고 있던 탓에 숫자 1이 바로 사라졌다.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테니 계속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야겠어…….

[나: 제안은 정말 감사한데...]

[나: 제가 형 노래 망칠까 봐 걱정돼요.]

톡을 보내기가 무섭게 1이 사라졌다. 형도 계속 보고 있나 봐! 어떤 대답이 올지 예상할 수 없어서 초조한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권세화 형: 아니야. 너 데뷔 무대에서 내 노래 부르는 거 듣고 결정한 거야.]

아. 맞아. 내가 불렀……는데 그걸 봤구나! 그럼 내가 개사한 것도 다 들었다는 소리잖아! 원작자에게 못 볼 꼴을 보였다는 부끄러움이 삽시간에 몰려왔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미쳤다. 미치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흑역사가 쌓이고 있었구나.

[권세화 형: 사실 톡으로 부탁할 내용은 아니지만]

[권세화 형: 이제 막 데뷔해서 바쁠 테니 불러내는 것도 미안하더라고]

[권세화 형: 방해될까 봐 전화하기도 그래서 기다렸거든]

[권세화 형: 데뷔 무대에서 내 노래 부르는 거 듣고]

[권세화 형: 하온이 목소리가 내 노래를]

[권세화 형: 더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확신이 섰어]

[권세화 형: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부탁하는 건데 어려울까?]

쭉쭉 올라오는 톡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내 목소리가 겨울 바다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당연히 하고 싶다. 나는 형의 노래를 전부 좋아했고, 그런 만큼 권세화라는 싱어송라이터가 지닌 뛰어난 감각을 믿었다.

[권세화 형: 부탁할게! (손바닥 맞부딪치는 이모티콘)]

그런 형이 이렇게까지 부탁한다면, 해야지.

[나: 네. 제가 필요하면 뭐든지 도울게요!]

[권세화 형: 고마워! 우리 소속사에서 정식으로 의뢰 갈 거야! (뺨 붉히는 이모티콘)]

[나: 네!]

나도 이따 매니저 형한테 말해야겠다. 허락해 주시려나…….

***

숙소 주차장에 도착해 매니저 형과 이야기 끝내고 돌아섰더니 멤버들이 전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공동 현관 앞에 가까이 가자 안쪽에서 문을 열어줬다. 먼저 가라고 했는데, 왜 다들 여기 있어?

“저 기다렸어요?”

“응. 같이 가야지.”

유찬 형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대답했다. 그 말과 함께 지그시 날 보는 눈에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유찬 형뿐 아니라 멤버들 전원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는데 왜 다들 내외하는 것마냥 어색하게 굴지?

“저 무슨 얘기 했는지 궁금해요?”

이서호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면서 얼굴을 들이댔다.

“물어봐도 돼?”

“……왜 안된다고 생각한 건데?”

“아니, 그냥, 뭐. 개인적인 사정일 수 있으니까.”

아, 내가 형들 보내고 매니저 형한테 독대를 신청해서 그랬구나. 멤버들 앞에서 꺼내기 곤란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기특한 배려에 웃으면서 이서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오구구, 그랬어요.”

“야! 나 형이다?”

“형인 거 알아. 귀에 딱지 앉겠다.”

“형 취급 전혀 안 하는 것 같거든?”

이서호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면서 자신의 두 팔을 교차시켜 팔짱 꼈다. 그러면서도 내가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쳐내지 않았다. 심지어 얌전하다. 이건 또 새로운 반응이네.

“그래서 뭔데?”

호기심 때문에 얌전하게 군 건가? 그저 내 개인적인 용건으로 기다리게 만드는 게 싫었던 것뿐, 숨기려던 건 전혀 아니었기에 솔직하게 말해줬다.

“헐. 너 쇼케 때 부른 그 노래 주인?”

“응.”

“……우리 버리지 마.”

얌전히 듣고만 있던 정이한이 대뜸 두 손으로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아니,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야. 그룹으로 데뷔했는데 뭘 어떻게 버려? 나는 사서 걱정하는 정이한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냥 피처링 좀 해달라는 거예요. 그게 왜 그룹을 버리는 거로 연결돼요? 제가 우리 디아스 두고 어디 간다고.”

“그 사람 좋아하잖아.”

어떻게 알았지? 조금 전에 이야기할 때 내가 그렇게 기뻐 보였나?

“그렇긴 하죠.”

“…….”

정이한의 양쪽 눈썹이 하염없이 바닥으로 쳐졌다. 예전처럼 우울해 보이는 기색이 보여서 당혹스러웠다.

내가 세화 형 좋다고 한 말이 정이한을 우울하게 만들 정도였어? 이유를 모르겠지만 일단 달래주자. 이럴 때 정이한이 좋아하는 말을 안다.

“형도 좋아해요.”

“그 사람보다?”

어린애도 아닌데 유치하게 굴기는. 이상한 포인트에서 내게 집착하는 정이한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하여간 덩치만 컸지 전부 애들이라니까.

“굳이 따지자면 그렇죠?”

세화 형은 좋아함의 범주가 조금 달랐다. 내 새끼 낳아준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만 놓고 보자면, 당연히 우리 멤버들이 더 좋지.

“나 노력할게.”

정이한의 얼굴이 서서히 피어나 맑게 개었다. 뭘 노력하겠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냥 알겠다고 했다. 기분 풀린 것 같으니까 됐다.

“근데 하온이 체력 괜찮겠어?”

유찬 형이 날 걱정하면서 물었다. 나도 그게 걱정되긴 했지만, 그럭저럭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 안되거든 물약 먹으면 되지!

오늘 서브 미션 성공해서 랜덤 박스가 하나 더 생겼으니까 체력 회복약이 두 개 거든. 아직 안 깠지만 분명 회복약이 나올 테니까 두 개라고 봐도 된다. 그러니까 세화 형을 위해 하나쯤은 쓸 수 있었다.

“괜찮을 것 같아요.”

자신 있게 대답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올라탔다.

“매니저 형은 뭐라는데? 괜찮대?”

“소속사 쪽으로 정식 피처링 의뢰 오면 그때 확인하고 알려준대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만큼, 일단은 최대한 하는 방향으로 이야기해 보신댔어요.”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럴게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날 보던 유찬 형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유찬 형이 나를 곁눈질했다. 사실 오늘 스케줄은 음악방송 하나뿐이었기에,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휴식뿐이었다. 하지만 주말 음악방송은 5시 30분에 끝나서 아직 9시도 안 되었다. 숙소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바로 회사로 가자고 멤버들의 의견이 모인 건 그래서였다. 연습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니까.

“저는 괜찮다니까요.”

여전히 내 팔을 꼭 잡아주고 있는 정이한 덕에 체력도 회복되고 있었다. 체력 모자라서 연습실에서 쉬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가고 싶었다.

무대에서 실수하기 싫다. 더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이미 무대에서 황홀함과 짜릿함을 맛보았기에 연습을 포기할 순 없었다.

“형들은 다 갈 거잖아요.”

“우리야 거뜬하지.”

“저도 거뜬해요.”

이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로 강현 형을 봤다. 형이라면 분명 찬성해 줄 테지!

“괜찮을 것 같은데.”

역시! 연습에 관해서는 가장 나랑 잘 맞는 사람이 강현 형이었다.

“체력 저질인 거 본인도 잘 알잖아.”

이따금 팩폭을 날려서 그렇지. 뼈 때리는 말을 덧붙인 강현 형이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까 팬미팅에서 형이 말하려던 건 뭐였을까? 분명히 하려던 말을 바꾼 것 같았는데. 나중에 슬쩍 물어봐야겠다.

“그렇긴 해. 힘들면 알아서 철퍼덕철퍼덕 엎어져서 잘 쉬잖아~”

웬일로 이서호가 지원사격을 해줬다. 나는 잔뜩 의기양양해진 채 유찬 형을 봤다. 순순히 나를 데려가라고!

“우리 연습실 바닥 맨질맨질한 거 진하온이 옷으로 다 닦아서 그런 거잖음.”

“너도 한몫하거든?!”

아, 앞으로 형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는데 또 나를 도발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솔직히 바닥 청소 지분율 따지면 이서호가 더 많지 않나? 나는 한 장소에 얌전히 널브러지는데 쟤는 굴러다니잖아!

“나 한 번 쉴 때 넌 열 번 쉬잖아~”

“열 번까지는 아니야. 그리고 형은 굴러다니니까 연습실 청소 담당은 형 아닌가?”

“……어?”

갑자기 이서호가 기운 빠진 어리숙한 목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숙소가 있는 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에서 띵, 하는 소리가 났다. 다들 내리는데 이서호 혼자 멀뚱멀뚱 서서는 특유의 커다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안 내려?”

“……아!”

뒤늦게 대답한 이서호가 허둥지둥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몸을 꼬면서 팔꿈치로 내 팔뚝을 툭툭 건드린다. 꽉 다물린 입술이 물결치다가 양쪽으로 쭉 찢어졌다.

“흐흐흐.”

뭐야? 왜 저래.

“……숙소 오니까 좋냐?”

의심 가는 건 이것뿐인데.

“아니? 진하온이 나더러 형이라잖아.”

그게 그렇게 좋나?

“형님, 형님~ 이서호 형님~”

이상한 노래까지 부른다. 그리고 난 형님이라고 부른 적 없는데? 하지만 산토끼처럼 오두방정을 떨며 깡충거리는 걸 보니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쏙 사라졌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열심히 불러줄걸.

“이제 강아지 주인 형님 포지션은 하온이한테 넘겨야겠어. 아니지. 형님이 아니라 그냥 주인님인가?”

유찬 형이 날 향해 짓궂게 웃으면서 말했다. 강아지 주인님이라. 나쁘지 않네. 이서호, 앞으로 내가 네 주인이다.

***

우리는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메이크업을 지워야 했기 때문에 결국 거실에 옹기종기 모이게 되었다. 소파에서 기다리다가 정이한이 씻을 차례가 되어서 나는 옆으로 옮겨 앉아 강현 형 옆에 붙었다.

궁금했던 거나 물어봐야지.

“강현 형.”

“응?”

“아까 팬미팅할 때 저, 크흠. 예쁘다고 하기 전에 하려던 말 뭐였어요?”

바로 떠오르지 않는 듯 강현 형은 한참 침묵했다. 그러다가 기억난 듯 “아.” 하는 고저 없는 감탄사를 낸 뒤 또 말을 할지 말지 고민했다.

뭔데! 둘만 있을 때도 못 할 말을 팬분들 앞에서 하려고 했던 거야? 이 형도 은근히 위험한 사람일세.

“넌 걱정된다고.”

“……네?”

강현 형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면서 나를 봤다. 내가 형을 마주 보는 방향으로 자세를 고쳐 앉자 커다란 손이 뻗어졌다. 형은 흘러내린 내 앞머리를 슬슬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너는 너를 좀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게 걱정된다고 말하려고 했어.”

“저는 저를 되게 소중히 여기는데요.”

세상에 믿을 건 나밖에 없는데? 강현 형은 고요한 시선으로 날 응시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라이트 대기실에서. 네가 나설 필요 없었는데 나섰잖아. 우리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

이 형, 진짜 눈치 너무 좋은 거 아니야?

“그런 것들이어도 선배는 선배고, 네 의도를 아니까 참긴 했는데. 다음부터는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마.”

잠깐만. 좀 이상한데? 팬분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리 없잖아.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봤었지? 아, 이거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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