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유찬 형이 우릴 보면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지금 미니 팬미팅 중이라는 걸 깨달은 이서호가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삼킬 순 없었다.
“별 건 아닌데요. 서호야, 네가 말할래? 아니면 하온이? 내가 말해도 되고.”
이서호한테 맡기면 안 될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말하자니 그림이 좀 이상했다. 자화자찬도 아니고, 제 얼굴이 너무 매력적이라 서호 형이 놀랐나 봐요. 라고 어떻게 말하냐고.
이건 전부 매력 스탯 때문이지만, 다른 사람은 모를 거 아니야. 제삼자의 설명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 유찬 형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이서호의 의견은 묵살해 주세요. 형이 말해주세요.
“내가 말할까?”
“네. 부탁해요.”
웬일로 이서호가 얌전했다. 슬쩍 보니 얼굴을 붉힌 채 큼큼,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너도 무한정 철면피는 아니었구나. 이서호의 새로운 면을 본 것 같아서 조금 생소했다.
“별 건 아니고요. 아까 대기실에서 서호랑 하온이가 꽁냥거렸거든요.”
꽁냥이라는 단어 사용에 내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팬분들 사이에서는 기쁨의 비명이 터졌다. 유찬 형은 팬분들이 이런 거 좋아하시는 걸 알고 있던 걸까?
“자세한 건 나중에 비하인드로 공개될 거예요!”
뭐? 비하인드?
유찬 형이 갑자기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이서호와 내가 깜짝 놀라서 형을 쳐다봤다. 형은 짓궂은 미소와 함께 말을 덧붙였다.
“애들 투닥거리는 거 귀여워서 제가 카메라에 담았거든요.”
언제? 언제 찍었어? 전혀 몰랐는데?
“매니저 형한테 넘겼는데 편집해서 올려준다고 했으니까 다들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줄 수 있죠?”
“네에!”
“당연하지이이! 기다릴게!”
유찬 형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넘긴 뒤 다시 원래 하려고 했던 질문 타임으로 넘어갔다. 비하인드가 신경 쓰였지만 또 폭탄 발언이 터질까 봐 형의 말에 집중했다.
“멤버들 첫인상. 음. 강현이는 무뚝뚝한 조각 미남, 이한이는 무섭게 생긴 미남, 서호는 귀여운 미남, 하온이는 예쁜 미남이었어요.”
“에이이!”
뭔가 팬분들이 바라는 대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되게 모범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대답이긴 하지만, 확실히 재미는 없었다. 그래도 이실직고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자, 그럼. 다른 분들 질문도 받아야 하니까 멤버 전원이 돌아가면서 말하는 건 무리고 한 명 정도 더 받아 볼게요! 어떤 멤버에게 물어보고 싶으세요?”
“다 해주면 안 돼요?”
“저희 팬미팅 시간제한이 있어서요!”
“전부 듣고 싶어요!”
팬분들이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멤버 별로 다 알려달라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많은 분이 원하시니까 그럼 돌아가면서 할게요! 다음은 이한이!”
마이크는 정이한에게 넘어갔고, 정이한은 우리를 한 명씩 바라본 뒤 말했다.
“유찬 형은 다정해 보였고, 강현이는 조금 친해지기 어려워 보였어요. 서호는 사랑받고 자랐구나, 싶었고. 하온이는…….”
날 보면서 말꼬리를 늘이던 정이한이 이내 맑고 환한 미소를 만들었다.
“빛났어요. 환하게.”
“아, 뭡니까? 하온이만 너무 특별한데?”
유찬 형이 그거 아니라면서 태클을 걸어왔다. 하지만 정이한은 당당하게 대꾸했다.
“느낀 그대로 말한 건데요.”
팬분들이 맑게 웃으셨다. 나는 멋쩍음에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덥네, 더워.
“자, 그럼 다음은 강현이!”
강현 형은 마이크를 받은 채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유찬 형은 정석적으로 잘 췄고, 이한 형은 못 추더라고요. 서호는 그럭저럭 잘했고, 하온이는 즐겼어요.”
“……우리 춤추는 것보다 인사 먼저 하지 않았어?”
유찬 형이 조금 질린 듯한 얼굴로 강현 형을 질타했다. 그래, 이건 첫인상이 아니잖아. 하지만 강현 형은 뻔뻔했다.
“아, 춤추는 것 보기 전에는 어땠는지 기억 안 나요.”
“너무하네. 우리 존재감이 그렇게 없어?”
강현 형이 어깨를 으쓱이자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춤친놈이라는 별명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어휴. 알았다, 알았어. 그럼 서호.”
요주의 인물이다. 내가 다 긴장돼서 괜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찬 형은 똑똑해 보였고요! 이한 형은 무서워 보였고요! 강현 형은 와 씨,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 있나? 싶었고요! 하온이는 어려웠어요.”
많이 순화했네. 이 정도면 이서호치고 수위를 잘 지킨 셈이었다.
“왜 어려웠어?”
팬분들이 궁금해하자 이서호가 씨익, 양쪽 입꼬리를 가득 끌어 올렸다.
“제가 항상 막내였는데 처음으로 생긴 동생이라서요!”
“그랬어?”
유찬 형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물었다. 이제 슬슬 질문을 끝냈으면 좋겠는데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서호처럼 거짓말 못 하는 애는 길게 말하다 보면 모순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네. 그냥 친한 동생들은 많지만 멤버는 다르잖아요. 조금 더 특별한, 가족 같은 사이니까. 처음 생긴 동생이죠.”
이서호가 나를 보면서 순수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건 좀 의외였다.
짓궂은 얼굴, 화내는 얼굴, 당황한 얼굴, 우는 얼굴, 틱틱거리는 얼굴, 부끄러워하는 얼굴. 그간 이서호에게서 다양한 얼굴을 봤지만 저런 미소는 처음이었다. 낯설었다.
내가 형이라고 불렀을 때 좋아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이서호에게 가족이나 마찬가지란 소리였다. 가족. 내게는 한없이 낯설고 차가운 단어였는데, 이서호는 그 단어가 따듯하고 소중한 거겠지.
“막내야, 네 차례란다.”
이서호가 다시 장난기 담은 어조로 짐짓 근엄한척하면서 마이크를 건넸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서호에게 마이크를 받고서 “네, 형.”하고 대답하자 아주 좋아했다.
좋아하는 건 해주고 싶다. 앞으로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러줘야지. 화나게 하지만 않으면 말이야.
“음, 제 첫인상은……. 이거 어디까지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일부러 유찬 형을 보면서 물었다. 형은 “적당히 솔직하게?”하고 대답했고, 팬분들은 사실대로 말해주길 원했다.
“서호 형 첫인상은 강아지였어요. 강아지 닮았잖아요. 그리고 유찬 형은 강아지 주인 형.”
“……내 아이덴티티는?”
“강아지 주인 형이라니까요.”
“너무하네.”
유찬 형이 삐진 척하면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형도 따라 웃었다. 그러더니 마저 말하라면서 손짓한다.
“강현 형은 춤 잘 추는 미남! 저 형처럼 잘생긴 사람 처음 봤어요.”
강현 형이 눈매를 좁히더니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하고 반박했다. 나는 잘생긴 쪽은 아니지 않나?
아, 지금이다. 미션!
서브 미션을 성공시킬 적절한 타이밍이 온 것 같았다. 장난처럼 가볍게 할 수 있고, 망하면 재빠르게 정이한 첫인상 이야기로 화제를 넘기면 그만이니까.
“저는 잘생긴 건 아니고, 귀엽잖아요.”
그러면서 작은 주먹을 만들어 볼에 대고 뿌잉뿌잉, 소리를 내면서 속눈썹을 깜빡였다.
어떡하지. 소름 돋았다. 내가 한 짓거리를 비난하듯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솟아올랐다. 망했어. 이건 강력하게 망한 느낌이야…….
“꺄아악! 귀여워어어어!”
“하온아, 어디 아파?”
“…….”
정이한이 심각한 얼굴로 날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심지어 이마에 손까지 올린다. 팬분들이 그 행동에 웃음을 터트렸다. 스멀스멀 올라온 열기에 얼굴이 익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이한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형이 여기서 그러면 안 되죠…….”
정이한의 어깨에 이마를 쿵쿵 박으면서 원망했다. 망하면 자연스럽게 넘기려고 했는데 빼도 박도 못 하게 되었잖아!
그 순간이었다.
<시스템: 서브 미션 완료! 보상으로 데우스 랜덤 박스x1를 획득하셨습니다!>
헐? 이게 뭐야? 왜 지금 미션이 완료돼? 딜레이가 있었던 건가? 아닌데. 지금까지는 조건을 달성하면 바로 미션이 완료됐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지금 정이한 어깨에 이마 박은 행동이 ‘애교’로 인정되었다는 뜻인데…….
설마 팬분들한테 애교 부리라는 게 아니라 멤버들한테 하라는 거였나? 근데 이것도 애교로 쳐주는 거야? 도대체 성공 기준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이놈의 시스템은 이해 좀 하려고 하면 꼭 한 번씩 이상한 방향으로 튄다.
“미, 미안. 놀라서…….”
당황한 정이한이 말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내 귓가에 “나 실수한 거야?”하고 물었다. 그 때문에 더 황당해졌다. 날 놀리려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어디가 아파서 이상행동을 했다고 생각한 거잖아?
“으하하하핳!”
그런 우리를 보고 이서호가 목청껏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어떻게 수습하지? 미션 성공은 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흑역사도 같이 적립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생긴 걸지도 모르지…….
뿌잉뿌잉은 실패한 거잖아.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켜내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얼른 뻔뻔함을 둘렀다. 하지만 내 솔직한 얼굴은 뜨끈뜨끈해진 지 오래였기에, 통할지는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무리수를 던졌네요…….”
“아니야! 귀여웠어!”
“하온이 귀엽다!”
상냥한 팬분들이 나를 위로해줬다. 감동이야…….
“그, 그럼 이한 형 첫인상으로 넘어갈게요! 형은 솔직히 생긴 것만 보면 되게 사나워 보이잖아요. 게다가 랩퍼라고 소개받았고. 그래서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나 무서웠어?”
정이한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그래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형이 생긴 거랑 다르게 되게 소심하고 착하거든요.”
“이한이가 하온이 껌딱지지.”
유찬 형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을 보탰다. 하지만 이서호가 “형도 만만치 않아.”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그래.”
유찬 형이 아무렇지 않게 수긍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다행이야. 내 뿌잉뿌잉 사건은 그럭저럭 묻힌 것 같다.
멤버들 첫인상 이야기가 끝나고 곧장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이번엔 강현 형을 콕 찍은 질문이었다.
“서호랑 하온이! 누가 더 귀여워? 쇼케 때는 유찬이만 대답해서 궁금해~”
강현 형에게 마이크를 건네면서 내가 슬쩍 덧붙였다.
“이건 당연히 서호 형이죠. 저희 팀 공식 귀염둥이니까요.”
“네! 제가 공식 귀염둥이입니다!”
이서호가 양쪽 검지로 제 뺨을 쿡 찌르면서 방긋방긋 웃었다. 아니, 이서호는 어떻게 저런 걸 저렇게 자연스럽게 하지? 정말 태생부터 아이돌이었다.
“하온이랑 서호 중에.”
강현 형은 마이크를 쥔 채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호요. 하온이는…….”
왜요? 무슨 말을 하려고요…….
‘이 말을 해도 되나.’ 하는 강현 형의 눈빛을 보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