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아쉽다…….
무대가 끝났는데 흥분감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우리에게 할당된 건 한 곡뿐이었기에 더 아쉬웠다. 나중에 인지도 올리고 컴백하면 두 곡도 가능하겠지?
“아~ 일부러 실수할걸.”
이서호도 자꾸 무대를 돌아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정말 그랬다면 한 번 더 부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은 모두 똑같은지 아무도 이서호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다들 상기된 얼굴로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무대를 가만히 올려볼 뿐이었다.
“그러게. 또 하고 싶다.”
유찬 형이 이서호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강현 형의 시선도 무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우리가 올라가 있었던 무대엔 이미 다른 그룹이 사녹을 대기하며 팬들과 소통하는 중이었다. 완벽하게 마쳤는데도 왜 이렇게 아쉬운 건지.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사녹 한 번 했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홀리면 어떡하라고.
나는 원래 무대를 좋아했다. 춤과 노래를 사랑한 만큼 무대에서 뛰는 순간이 행복했다. 비록 아무도 나를 환영하지 않았고, 라이브라고 하기에도 뭣한 짧은 소절을 소화하는 것뿐이었어도, 매 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졌잖아. 나는 흥분감으로 옅게 떨리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무대가 좋다.
무대 위에서 넘치는 생동감을 느꼈다.
멤버들과 눈 마주치는 순간마다 느껴지는 그 끈끈함이 소중했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응원을 보내주는 팬분들이 사랑스럽다.
이대로 변하지 않기를. 나와 멤버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팬분들과 함께 영원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떡하지. 욕심이 생겨버렸다.
“하온아.”
상념을 끊듯 나를 불러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정이한이 날 내려보면서 웃고 있었다.
“네?”
“즐거웠지?”
“네. 무척.”
“나도.”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참 예뻤다.
“우리 평생 무대에 서자.”
“……평생이요?”
“응. 다 같이!”
정이한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이서호가 귀신같이 달려와 정이한의 팔에 매달리며 벅찬 얼굴로 외쳤다.
“디아스! 평생 가자!”
“오! 좋지!”
유찬 형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평생 가자고! 강현아! 너는?”
“뭘 묻고 그래.”
강현 형이 코웃음 치면서 대답했다. 그리고는 “당연하지.”하고 말을 덧붙였다.
평생.
지금 멤버들이 입에 올린 ‘평생’은 무척 가벼운 것이었다. 그저 무대에서 느낀 흥분감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흥분된다. 나는 한껏 입꼬리를 당겼다. 입으로 뱉으면 사실이라도 될 것처럼 꾹꾹 힘주어 말했다.
“좋아요. 평생 같이 가요!”
***
음악방송이 모두 끝난 뒤 우리는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방송국의 도움으로 미니 팬미팅이 준비 중이라 전부 대기실에 남은 상태였다. 뭐 대단한 서포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방송국 후문 안쪽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다들 빨리 팬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매니저 형이 간단한 먹거리와 무선 마이크를 챙기러 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딥컬러도 모두 퇴근한 뒤라 대기실에 남은 건 우리 다섯 명이 전부였다. 우리 짐도 모두 빠져서 신인치곤 넓은 대기실을 받았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아, 무대 화장 괜히 지웠나?”
화장대 앞에 앉은 이서호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서호를 부르자 거울 너머로 눈을 맞춰온다. 내 말에 귀 기울이는 걸 확인하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별 차이 없어.”
“어? 진짜?”
“응. 둘 다 못 생김.”
“아! 진하온!”
이서호가 벌떡 일어나 나한테 달려왔다. 하지만 나에게도 학습 효과란 게 있다. 내 옆구리를 노리는 못된 손을 기가 막히게 방어했다.
“어딜!”
“어쭈? 잘 막네?”
“덤벼, 덤벼!”
“오냐! 간다!”
이서호가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켜더니 눈을 번뜩이면서 양손을 뻗어 왔다. 그 손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내가 재빠르게 막아내면서 거리를 벌렸다.
“오, 의외로 민첩한데?”
두 차례의 방어에 성공해 콧대가 높아진 내가 턱을 치켜들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에 질세라 다시 내 약점을 노리는 이서호가 슬금슬금 접근했다.
“그럼 이것도 막아 보시지!”
말 끝나기 무섭게 스타트 라인에 선 육상 선수가 출발 신호를 받은 것처럼 이서호가 돌진해 왔다. 손만 경계하고 있었기에 짧은 거리에서 달려드는 이서호를 피하기 어려웠다. 본능적으로 양팔을 뻗어 이서호의 어깨를 붙잡았을 뿐이었다.
“잡았다!”
이서호는 정면에서 나를 끌어안았는데, 두 팔로 내 허리를 칭칭 휘감고 있었다. 덕분에 옴짝달싹 못 하게 품에 안긴 꼴이 되었다. 벗어나려고 꼼지락거리자 팔을 더 강하게 옥죄어 왔다.
“아! 뭔데! 이건 반칙이지!
“규칙 정한 적 없는데?”
그러더니 아주 짓궂게 웃는 얼굴로 어디 한번 도망가 보라면서 킬킬거렸다. 이런 식으로 도발한다 이거지? 침착하자, 진하온. 분명히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힘으로 안 되면 머리를 쓰면 되지.
분명히 지난번에 옆구리를 간지럽혔을 땐 심드렁한 반응이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 컨포 촬영 갔을 때는 간지러워했으니까…….
아, 옆구리가 아니라 귀가 약점이구나? 컨포 촬영 때 귓속말했더니 몸서리쳤던 건 그래서였나? 좋아. 목표는 정했다.
나는 이서호가 도망치지 못하게 목에 팔을 감아 끌어당김과 동시에 까치발을 들어 높이를 맞췄다. 당황한 이서호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서 귓가에 후우, 하고 바람을 불어 넣었다.
“으악! 악악!”
이서호가 몸서리치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두 손으로 내가 바람 넣은 귀를 움켜잡고는 부르르 떤다.
“야! 이건 너무……!”
“너무?”
“너무, 윽, 으윽! 너무 하잖아!”
뭐가 너무하다는 거야. 나는 코웃음 치면서 이서호를 향해 똑똑히 말해줬다.
“너보다 힘 딸리니까 머리를 좀 썼지. 거기 네 약점 맞지?”
의기양양한 미소까지 곁들였다. 이쯤 되면 분노에 찬 반박이 돌아와야 하는데 영 잠잠했다. 이서호는 그저 얼굴을 붉힌 채 씨근덕거릴 뿐이었다. 삐졌나?
“이서호?”
심지어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기까지 한다. 진짜 삐졌나 봐. 좀 심했나? 아니, 근데 이게 심한 거였어? 좀 의아하긴 했지만 사람마다 언짢음의 선은 다르니까 이해해야지.
사과할 생각으로 반걸음 다가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얼굴을 들여다봤다.
“화났어?”
그러기가 무섭게 화들짝 놀란 이서호가 몸을 팽 돌려 버렸다. 아, 이거 진짜 단단히 삐졌나 보네. 어쩐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손가락으로 이서호의 등을 콕콕 찌르면서 말했다.
“서호 형, 화났어? 미안해.”
“윽. 아니야. 화난 거 아니고!”
알다마다, 삐진 거겠지. 삐졌다고 말하기 뭐하니까 이러는 거 아닌가? 이서호는 딱히 할 말이 없는 듯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화내지 마. 미안해.”
“화난 거 아니야. 그, 그냥 당황해서 그래…….”
이서호답지 않게 웅얼웅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뭐 때문에 당황한 거지? 딱히 당황할 만한 일은 없지 않았나?
“그, 야. 진하온.”
“응?”
이서호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붉게 물들었던 혈색은 원래대로 돌아온 뒤였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화르륵 타올라 고개를 팩 돌렸다.
아! 뭔데!
“으아아! 미치겠네.”
이서호는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성큼성큼 멀어졌다. 혼자 남겨진 나만 황망하게 멀어지는 이서호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푸흐흡.”
유찬 형이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억눌린 웃음소리를 냈다. 형을 향해 시선으로 ‘왜 그런지 알아요?’하고 물었다. 유찬 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날 향해 손짓했다. 쪼르륵 다가갔더니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살거렸다.
“하온아. 너는 네 파괴력을 알아야 해.”
“……저 뭐 부수고 다니지 않는데요.”
“그쪽 말고. 네 얼굴의 파괴력.”
내 얼굴?
무의식중에 내 뺨을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했다. 무대 화장은 지웠어도 미니 팬미팅을 위해 가볍게 메이크업을 받은 상태였다. 가까스로 얼굴 만지는 걸 피한 채 영 모르겠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 봐봐.”
동시에 유찬 형이 팔을 뻗어 내 목을 감싸더니 천천히 얼굴을 붙여왔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잘생긴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거리감이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쿵쿵쿵. 심장이 뛰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뭔가에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서히 가까워진 유찬 형이 내 귓가에 후욱,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내달리면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으아!”
그제야 진저리치면서 상체를 뒤로 쭉 뺐다. 유찬 형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것 봐.”하고 말했다. 뭐, 뭔데?
“네가 아까 서호한테 한 짓.”
“……제, 제가 잘못했네요.”
이런 느낌이었구나. 옆구리를 간질거리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사람에 따라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서호는 불쾌했던 걸까?
“다시 제대로 사과해야겠어요.”
이서호를 찾기 위해 대기실을 훑어봤다. 하지만 그새 밖으로 도망친 건지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화장실 갔던 정이한이 돌아오길래 이서호를 봤는지 물었다.
“응. 화장실 가는 것 같던데.”
“아! 저도 다녀올게요.”
“같이 갈까?”
“이한 형.”
“……알았어.”
시무룩한 정이한을 두고 돌아서려니 마음이 찜찜했다. 하지만 화장실 가려고 할 때마다 따라오려고 하는 건 좀 부담스럽다. 그때마다 떼어 놨더니 저렇게 축 처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게 화장실은 은밀한 장소다. 앞으로 체력 떨어지면 화장실에서 회복 물약 먹어야 할 텐데, 그것 때문에라도 정이한을 달고 다닐 순 없다. 습관 들여놔야지. 매번 실랑이하기 힘들잖아.
화장실은 대기실을 나와 오른쪽으로 50 정도만 가면 있었다. 스태프과 출연진이 전부 빠진 방송국 복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적막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서 화장실 앞에 도착했다.
“서호 형, 여기 있어?”
화장실에 얼굴을 쑥 들이민 채 소리 높여 이서호를 불렀다. 귀를 기울여보니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화가 많이 났나?
“나 들어간다?”
괜히 도망치고 그러지 말아라. 이런 건 그때그때 풀어야지. 날 피해 도망쳐다니는 이서호라니, 생각하기도 싫었다.
화장실로 들어가니 세 번째 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혹시 도망쳐 들어간 게 저기야?
똑똑.
문을 두들겼다.
“서호 형.”
“……아닌데요.”
곧장 대답이 돌아왔지만 이서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익숙한 목소리. 그것을 인지하고 당황한 순간 화장실 문이 열렸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