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서브 미션>
ㅡ 미니 팬미팅에서 애교 부리기
O 성공 시 데우스 선물 상자 x1 획득
O 실패 시 흑역사 적립
아…….
참담한 마음으로 서브 미션을 읽고 또 읽어도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애교 부리는 것만으로도 막막한데, 실패하면 흑역사까지 생긴다고? 이번 서브 미션은 패스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체력 회복약은 아쉬운데…….
게다가 내가 원했던, 어떻게 보면 쉬운 미션이었다. 눈 딱 감고. 아니, 근데 실패하면? 어떡할지 고민하다가 흐린 눈으로 서브 미션 창을 꺼버렸다.
그래도 서브 미션 나온 거 보니 팬미팅은 무조건 하나 보네. 미래를 훔쳐본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쇼케이스 때도 그러더니.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선배님 무대 끝나간다. 얘들아, 준비됐지?”
유찬 형이 우리를 불러 모았다. 무대 바로 뒤에 옹기종기 모여서 인이어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MR이 제거된 라이브가 고스란히 들렸다. 조명이 암전되고 거친 숨소리가 고막을 때려 박았다.
선배님들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우리는 주르륵 서서 꾸벅꾸벅 인사했다. 가벼운 덕담을 해준 선배님들이 멀어졌다.
“빨리 올라가고 싶다!”
이서호가 발꿈치를 들었다가 내리면서 흥분감을 드러냈다. 팬분들을 빨리 만나고 싶다면서 난리였다. 사녹 큐사인 들어오기 전에, 잠깐 팬들과 대화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디아스 올라가세요.”
스텝이 신호를 주자 이서호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유찬 형이 강아지처럼 꼬리를 붕붕 흔드는 것만 같은 이서호의 뒷모습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본인도 잔뜩 상기된 얼굴로 성큼성큼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꺄아아아아!”
이서호의 발랄한 인사말에 환호성이 쏟아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올라가야지. 이젠 다르다는 걸 아는데도 주저하게 된다. 어쩔 수 없지. 강렬하게 남아버린 학습 효과니까.
“하온아, 가자.”
정이한이 나를 챙겼다. 먼저 가라고 했는데 등 뒤에서 강현 형이 내 등을 밀었다.
“같이 가.”
“아, 네에.”
정이한이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뒤에 있는 강현 형이 꼭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우리 세 사람이 나란히 등장하자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서른 명이 내는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스튜디오 안이 꽉 찬 것 같아.
“이한아!”
“강현 오빠아아아!”
“하온아아!”
아, 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채 쪼르륵 무대 앞으로 나갔다. 역시 다르잖아! 괜히 겁먹었어!
내 이름이 걸린 플래카드를 들고 계신 분들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꺄아아악! 하온아아! 귀여워어어엌!”
“아, 저 귀여워요? 반바지라서 그런가?”
무릎 위까지 오는 반바지를 의식하면서 한쪽 다리를 들었다. 갑자기 비명 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 이런 거 좋아하시나?
“얘들아! 밥 먹었어!”
한 팬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다.
“먹었어요! 여러분도 드셨어요?”
“아니이이이잌!”
“배고파아아!”
밥 소리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왔다. 이서호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헐, 밥은 먹어야죠. 힘들어서 어떡해요…….”
“너희! 얼굴! 보니까! 배부르다아아앜!”
“배터져! 괜찮아! 배불러!”
“엇! 그럼 제 얼굴 더 보여드릴게요!”
무대 앞까지 아슬아슬하게 나간 이서호가 팬들과 가까이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제 뺨을 감싼 채 생글생글 웃으니 아주 난리가 났다. 저런 거 좋아하시나? 그럼 나도!
이서호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똑같이 꽃받침을 했더니 다들 울먹이기까지 하면서 좋아하셨다. 와. 어떡하지. 나 지금 너무 기쁜데!
“뭐야? 진하온, 나 따라 하네?”
“형이 솔선수범 보여준 거 아니었어?”
“흠흠. 뭐, 조금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유찬이도! 같이! 해줘어어어!”
“엇! 네! 강현아, 이한아, 너희도 같이하자.”
“와아아아앜!”
폭발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정이한이 어색하게 쭈뼛거리면서 내 옆에 자리 잡았다. 강현 형은 목덜미를 붉게 물들인 채 자꾸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유찬 형이 “팬분들이 원하시잖아.” 하자 결국 쑥스러워하면서도 쪼그려 앉는다.
“앜앜! 너네 신고할 거야!”
갑자기?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감이 오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굳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멤버들 모두 웃음이 터져버렸다.
“내! 심장! 폭행죄에에엨!”
“아! 한 번만 봐주세요~”
이서호가 윙크하면서 애교 부리자 “꺄으아아아악!”하는 환호성이 들렸다. 애교……. 저 정도만 해도 되는 건가? 그럼 나도 이따가 도전해 봐?
“안돼엨! 못! 봐줘! 내! 심장이! 너덜! 너덜!”
“앗씨, 그럼 제가 호 해드릴게요. 호오~”
“꺄아아아아악!”
“와악! 앜! 아악!”
이서호 대단하잖아?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게 멋져 보였다. 아이돌로서 저런 태도는 본받아야 했다. 나도 뭔가 해 볼까? 무슨 말 하지? 열심히 팬분들한테 전해줄 말을 고르던 때였다.
“디아스 준비하세요.”
“네!”
아, 이런…….
“하온아!”
“네, 넵!”
목소리 큰 팬분의 부름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형들이 어리숙하게 구는 날 보고 웃었다.
“사랑해!”
“어, 저, 저도요! 저도 사랑해요!”
와! 와아! 너무 기뻐. 팬분들을 만나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구나. 전생에서 멤버들이 왜 그렇게 팬들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꺄아아아악! 하온아! 사랑해에에엨!”
“녹화 시작합니다. 조용히 해주세요.”
딱딱한 현장 스텝의 경고에 스튜디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내 자리를 찾아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 대기하며 무대 아래를 바라봤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날 향하던 다정한 시선들이 선명했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된 후 응원법에 맞춰 들리는 힘찬 함성.
“박유찬!”
“정이한!”
“백강현!”
“이서호!”
다음……이 있을까. 전생에서도 나는 스무 살 막내였다. 하지만, 공식 응원법에서 언제나 맨 끝을 차지했던 건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멤버들의 이름이 주르륵 불리고, 마지막에 내 이름이 불리는 일은 그룹이 해체할 때까지 없었다.
“진하온!”
하지만, 다르다. 정말 모든 게 달랐다. 내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는 목소리들은 형들을 부를 때와 똑같이 우렁차고 선명했다. 팬분들의 마음속에 내 자리가 있다는 게 비로소 와닿았다. 웃어야 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행복하면 오히려 눈물이 난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인생 2회차 도전하길 잘했다. 나는 내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웃자. 내 감정이 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게!
***
“얘네 뜨겠네.”
정연식 피디가 중얼거렸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디아스 멤버들을 하나씩 잡고 있었다. 멤버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좋았다. 피디는 그중에서도 가장 화사하게 미소짓는 진하온을 눈여겨봤다.
보고 있으면 저절로 따라 웃게 되어서 주책없이 올라가는 입꼬리 단속이 힘들었다. 피디는 촘촘하게 적힌 사녹 리스트에서 ‘디아스’에 형광펜을 칠했다. 그런 다음 진하온의 이름 옆에 별표를 하나 그려 넣고 패드를 내려놓았다.
“엔딩 저 애로 잡아.”
피디가 손가락으로 진하온 담당 카메라를 가리켰다.
“네.”
곡이 끝난 뒤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진하온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헐떡이는 어깨와 충만감이 넘쳐흐르는 화려한 미소. 뺨을 타고 흘러 턱에 맺힌 땀방울까지 완벽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에 젖어 있는 눈동자가 조명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났다.
“한 번 더 갈까요?”
“아니. 다들 잘하네.”
피디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사녹이 끝났다. 아쉬워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피디는 그를 무시한 채 휴대폰을 들었다.
“어, 서준아.”
- 네, 선배님!
“너 기획 중인 파일럿 방송 신인 아이돌 쓸 거라고 했지?”
- 네! 맞습니다.
“섭외 끝났어?”
- 아뇨. 좀처럼 맘에 드는 그룹이 없어서 아직입니다.
그럴 만하지. 정 피디는 후배의 고민에 충분히 공감했다. 파일럿 방송은 프로그램을 온고잉할지, 이대로 드랍할지의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방송이었다. 첫 섭외에 온 신경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파일럿인 만큼 제작비가 부족해 게스트까지 빵빵하게 채울 순 없었다. 그래서 게스트 없이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피디로서 처음 기획한 파일럿 방송이라면 제작비는 더더욱 부족할 터였다.
“고정은?”
- 그쪽은 섭외 끝났어요. 남은 건 게스트인데…….
“남돌 맞나?”
- 네네. 남돌. 괜찮은 애들 있어요?
“응. 디아스라고. 오늘 첫방인데 느낌이 좋아. 뜰 것 같으니까 검토해 봐.”
물론, 너무 신인이라 조금 아쉬운 감은 있었다. 신인 아이돌을 데려다가 쓰는 건 출연료 절감 목적도 있지만, 그보단 한줌단이라도 팬덤을 포섭해 시청률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었다. 그러기에 디아스는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방송 예고편 나갈 때는 팬 좀 붙을 것 같긴 한데…….’
어차피 선택은 후배의 몫이었다.
- 오! 선배님 촉은 믿을만하죠!
“매니저 연락처 넘겨줄 테니까 확인해 보고 결정해.”
- 아! 네! 고맙습니다! 제가 거하게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뭘 이런 거 가지고. 나 사녹 중이니까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 넵! 수고하십시오!
‘흠. 그러고 보니.’
“아까 디아스 매니저가 방종 후 미니 팬미팅 하고 싶다고 요청 왔었지?”
“아, 네네.”
“그거 허락해. 장소 제공해주고. 30분 정도 자리 만들어 줘.”
“네. 전달하겠습니다.”
정연식 피디는 베테랑 음악방송 PD로서 쌓아온 자신의 직관을 믿었다. 지금까지 축적된 데이터가 ‘저 애들은 뜬다.’라고 속살거렸다. 잘해줘서 나쁠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