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어. 성공하자.”
강현 형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맞아……. 나 너무 억울해. 진하온 너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 씨이. 근데 왜 그렇게 했는지 아니까 더 화나. 너무 억울하다고. 미안해…….”
나와 멤버들이 느낀 게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팔을 들어 머리를 토닥토닥 쓸어주자 조용히 흐느끼던 이서호의 입에서 히끅히끅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역효과인 것 같네.
“후우. 그래. 너희 말이 맞아. 우리 성공하자. 서호도 진정하고, 그러다 눈 붓겠어. 그리고 하온아.”
“네?”
“연락처 줘. 그거 정곤 형 주자.”
“아, 네.”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유찬 형한테 건넸다. 나도 매니저 형한테 넘길 생각으로 받은 거였다. 괜히 대기실이나 방송국 내에서 버렸다가 흘러 들어가면 어떡해. 이런 건 좀 사려야 한다.
“얘들아? 무슨 일이야?”
매니저 형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우울한 기색이 역력한 우리와 누가 봐도 울고 있는 이서호를 보고는 화가 제대로 났다.
“정곤 형.”
유찬 형이 작은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쪽지를 건넸다. 매니저 형은 쪽지를 물어뜯을 기세로 노려보다가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거 말고 다른 일은 없었고?”
“네.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매니저 형은 내게 무척 미안해했다. 하지만 데뷔 10년 차, 대형 기획사 소속인 문라이트에게 중소 기획사 소속이자 이제 막 데뷔한 디아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는 마인드로 임하는 게 상책이었다.
“매니저 형. 저희 성공하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유찬 형이 정이한과 눈을 마주친 뒤 매니저 형을 보면서 말했다. 매니저 형은 날카로운 입매를 꾹 다물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너희 도와주려고 내가 있는 건데. 당분간은 계속 인사 다녀야 하니까 너희끼리 있어야 해. 그쪽이랑 얽히지 않게 조심하고, 혹시 못 피하겠다 싶으면 나한테 전화해. 무조건 달려올 테니까. 알았지?”
“네.”
“곧 드라이인데 서호 저렇게 울어서 어떡하지.”
매니저 형이 끄응 앓았다. 눈물 그치게 하려면 역시 도발인가.
“이서호. 너 자꾸 울면 동생 취급한다?”
“시끄러워!”
“하여간 울보야. 별일도 아닌데 엉엉 울기나 하고.”
“그게 왜 별일 아냐!”
이서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콧물이 찍 늘어지는 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러워! 아이돌이면서 저게 뭐야!
“별일이야! 너한테 막, 씨이, 너한테, 그렇게, 막, 돌아보라고, 막, 품평하듯이, 명령하고, 그게, 그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야아……!”
내가 겪은 일인데 꼭 자신이 겪은 것처럼 말한다. 나 대신 화내주고, 억울해하고, 울어준다. 콧물은 더럽지만 그래도 기특하니까 어깨를 두들겨줬다.
“고마워, 서호 형.”
“……훌쩍. 뭐가.”
“나 대신 화낼 정도로 내가 좋다는 거잖아.”
“……아, 니거든! 우씨이. 그 정도는 아니야!”
“응? 정들었다면서?”
“아, 너는 꼭 그렇게, 훌쩍. 오글거리는 소리 하더라!”
이서호가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지르면서 씩씩거렸다. 저러면 더 붓지! 내가 이서호의 팔목을 잡자 흔들거리던 팔이 뚝 멈췄다.
“눈 부어. 드라이하고, 바로 메이크업 받아야 하는데 더 부으면 어쩌려고 그래. 사녹 언제 불려 나갈지 모르는 거 알면서.”
“알았어…….”
정이한이 휴지를 내밀자 훌쩍거리던 이서호가 패앵, 하고 기운차게 코를 풀었다.
***
드라이 리허설은 보통 가볍게 동선만 맞추는 거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신인으로서 가볍게 하는 것 따위는 몰랐다. 문제는 표정이었다. 다들 한이 안 풀린 모양인지 표정이 아주 매서웠다. 부족을 대표로 싸우러 나가는 장정들 같았다.
드라이라서 아무 말 듣지 않고 내려오긴 했으나, 내려온 뒤에는 달랐다. 일단 매니저 형한테 주의받았다. 와중에도 내 표정만큼은 아주 좋았기에 나만 칭찬받았다.
감정을 무대에서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건 삼류라고. 하지만 멤버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단련되는 건 원치 않았다. 좀 더 긍정적으로 자신을 분리할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알 방법은 없었다.
드라이 리허설이 끝나고 사전녹화 대기를 위해 본격적인 꾸미기가 시작됐다. 가뜩이나 좁은 대기실에 두 그룹의 스태프들까지 비집고 들어오니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자리가 부족해서 릴레이식으로 헤메를 끝내고 나니 문제가 생겼다. 조금씩 최선을 다해 끌어모은 체력이 간당간당했다. 아까 문라이트 대기실에서 훅 깎여 버린 영향이 컸다.
벌써 물약 마시기엔 조금 아까운데…….
서브 미션이라도 딱 나오면 좋겠는데 안 나온다. 역시 연기를 올려야 하나. 연기 스탯이 높았으면 체력이 조금이라도 더 보존됐을지도 모르잖아.
지금 남은 포인트는 3,740이었다. 노래를 S-로 올리기엔 부족해서 계속 모아둔 덕이었다. 이번에 메인 미션 깨면 1,000점이 더 생겨서 그걸로 S- 까지 단번에 올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체력이…….
아, 뭐가 좋을지 모르겠다. 일단 체력 회복을 하긴 해야겠는데……. 멤버들 텐션이 평소와 달라서 나한테 달라붙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좀 치대줘야 내 체력도 회복되는데 말이지.
으음.
조금…, 아니. 많이 민망하지만 내가 먼저 해볼까…….
지금 아쉬운 건 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헤메 끝나고 여유 있는 사람 없나.
눈에 띈 건 강현 형 혼자였다. 형은 벽에 느슨하게 기댄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또 댄스 영상 보는 모양이다. 슬그머니 옆에 가서 섰더니 나를 보고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할 말 있어?”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
손 좀 잡아주세요. 이걸 어떻게 말하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러갔다.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곤란하다.
“긴장돼?”
혹시 이걸로 유도할 수 있으려나……. 안 해본 짓 하려니 낯간지럽다.
“조금요?”
“손잡아줄까?”
“……네?”
“너 좋아하잖아. 형들이 손잡아주는 거.”
과연. 관찰력의 대가! 눈치가 아주 귀신이다. 아무 말 않고 슬쩍 내밀었더니 단단하고 따듯한 체온이 내 손에 가득 퍼졌다. 기분 좋다.
“원래 스킨십 좋아해?”
아무렇지 않게 툭 들어온 질문이었다. 그래서 무심결에 “아니요.”하고 대답해 버렸다. 강현 형의 한쪽 눈썹이 삐뚤게 올라갔다. ‘아니었어?’ 하고 되묻는 듯했다.
“형들이랑 하는 것만 좋아요. 다른 사람이 달라붙으면 오히려 체력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흠.”
강현 형이 마주 잡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기울여 날 봤다. 와. 진짜 이 형은 뭐든 화보로 만들어 버린다니까.
“그럼 나는 특별한 쪽?”
“그럼요. 당연하죠.”
“그래?”
“네. 형들 다 특별해요. 매니저 형도 그렇고, 우리 실장님도, 보컬 쌤도, 댄스 쌤도요.”
전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다. 아주 특별하고 귀중한 인연. 소중히 가슴에 안고 갈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나는 이서호의 위치를 확인했다. 거리가 있는 걸 확인하고 경계하면서 작게 말을 덧붙였다.
“이서호한테는 비밀이지만 이서호도요.”
“풋. 서호는 ‘형들’에 포함 안 된 거였어?”
강현 형이 못 참고 소리 내 웃었다. 정말 드문 모습이라 놀랐다. 멀뚱히 보고 있으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라는 거 전염성이 아주 강한 녀석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멀끔하게 변신한 유찬 형이 우리한테 다가오면서 물었다. 나와 강현 형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내가 비밀이라고 했더니 단단히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우, 우리 막내가……!”
어느새 정이한도 무대 준비를 마친 뒤 합류했다. 잠시 후 소란스러움을 몰고 온 이서호까지 뭉쳤다.
“이야, 너희는 진짜 사이좋네.”
딥컬러의 리더가 우리를 보면서 감탄했다. 그러더니 여기저기서 왁왁거리는 제 멤버들을 보고 한숨 쉬었다. 사실 저게 보통이지. 혈기 왕성한 10대, 20대 남자들만 모아놨는데 얼마나 시끄럽겠어. 우리가 유독 얌전한 편인 거다.
“우리 애들도 좀 얌전하면 좋겠는데……. 유찬아, 네가 부럽다. 나랑 멤버 바꿀래?”
“아니. 절대 싫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무척 완고했다. 딥컬러 리더가 상처받았다면서 과장되게 가슴을 쥐어뜯었다. 연기하는 티가 팍팍 났다.
“절대까지는……. 너무하다.”
“아하하!”
“윤재 혀어어어엉! 이정수가 나 괴롭혀! 악! 혀엉! 악! 이정수! 이 나쁜 놈아!”
“이정수? 나쁜 놈? 너 형한테 그딴 식으로 굴지!”
“아아악! 고작 한 살 차이 갖고 왜 난리야! 윤재 혀어어어어엉!”
“아, 저 사고뭉치들…….”
딥컬러 리더 이름이 윤재였구나.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으니까 열심히 외워야겠다. 본명이랑 예명 좀 똑같이 해주지. 그나마 무대 의상의 넥타이 색으로 자기주장을 해줘서 리더의 예명이 블루인 건 알 수 있었다. 아, 파랑인가? 제발 통일 좀…….
***
사전녹화 부름을 받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 대기실에 콕 박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딥컬러는 시끄러워졌고, 심지어는 뛰어놀다가 드라이기 선에 걸려서 우당탕 넘어지는 사람까지 나왔다. 시끄러운 이서호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차례가 왔다. 인이어를 끼고, 마이크 팩을 착용했다. 누나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시 한번 풀 점검해줬다.
매니저 형이 우리를 불러 모아서 재차 주의 사항을 전달해 줬다.
“그리고 사녹 신청해서 들어온 팬은 30명 정도고 나머지는 다른 팬덤에서 끌어온 거야. 이제 시작이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고?”
30명? 30명이나 왔다고? 한두 명 있으면 많은 거로 생각했는데 30명이나 왔단다. 우리가 새벽같이 출근했듯이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대기했을 텐데……. 너무 소중하고 감사한 분들이었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형들의 반응도 나랑 다르지 않았다.
“……너희 표정 보니 알겠다. 진짜, 우리 애들이 이렇게 순하고 착하지. 크흑. 얘들아. 너희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형형! 그럼 이따 팬분들 만날 수 있어요?”
이서호가 눈을 반짝거리면서 물었다. 매니저 형이 가슴을 팡팡 두들겼다.
“방송 끝나고 미니 팬미팅 할 수 있는지 알아볼게.”
“와아!”
이서호가 두 손을 번쩍 들었을 때였다.
<시스템: ‘서브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어? 서브 미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