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나는 유찬 형이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앨범을 빼 들었다.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형에게 괜찮다고 웃어줬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쉬시는 데 저희가 너무 크게 말한 것 같아요. 앨범만 드리고 가겠습니다.”
몇 발자국 앞으로 나와 선반 위에 앨범을 올려두고 멤버들에게 돌아갔다. 소파남의 시선이 나를 따라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빨리 나가야지.
“야, 너.”
까칠한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때리듯 쏘아졌다. 멤버들 앞에 선 채 소파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누구를 가리킨 건지 모르니까 일단 내가 몸빵해야지.
“네.”
소파남은 등받이에 삐딱하게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소파남의 발끝이 건들건들 흔들렸다.
“이름이 뭐야.”
“진하온입니다.”
“몇 살?”
“열아홉이요.”
“흐음. 그래?”
그나마 우리 편을 들어줬던 남자가 “애기네, 애기. 쟤네 다 굳은 것 봐. 화 좀 눌러라, 엉?”하고 소파남을 달랬다. 소파남이 남자를 휙 노려봤다가 불길하게 미소 지었다.
“뭐, 그래. 미안하다. 너 잠깐 이리 와봐.”
“……저요?”
“어. 와봐.”
소파남이 검지를 세워 까딱까딱 날 불렀다. 이거 거절해도 되는 건가? 대선배님이니까 안될 것 같은데. 역시 얌전히 따라야겠지? 왠지 찝찝한데…….
인내심 없는 소파남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인상을 콱 찡그린 채 짜증스럽게 시비 걸듯 말했다.
“무시하냐?”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신인 기죽이기? 아니면 원래 성격이 나쁜 편? 매니저 형의 경고를 생각하면 후자일 것 같다.
“김호채.”
“아, 넌 좀 빠져. 무시하냐고. 안 와?”
가요. 가. 한 걸음 떼려는데 팔이 잡혔다. 강현 형이 나를 꽉 잡고 있었다. 괜찮다는 의미로 손등을 두들겨줬다. 소파남이 성질부리기 전에 원하는 대로 비위 맞춰주고 돌아가면 될 일이다. 괜히 트집 잡혀서 좋을 게 없어.
“야, 너. 내가 쟤 잡아먹냐? 잡아? 왜 잡아? 오겠다는데. 보내.”
“하, 또 시작이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사람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더니 소파남을 휙 노려보고는 “적당히 해라.”하고 경고하면서 우리를 지나쳐 대기실을 나가버렸다.
분위기가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는 이서호마저 내 셔츠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선배님, 무슨 일로 부르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굳어 있던 유찬 형이 움직였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얼굴에 차분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이유? 선배가 부르면 이유 불문 튀어 와야지?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시겠다? 요즘 애들 참 건방져. 응? 너희 그룹명이 뭐라고?”
“…….”
창조적 시비네. 저런 사람한테는 무슨 말을 하든 다 꼬투리 잡히기 마련이다. 역시 이럴 땐 분위기 좀 맞춰주고 퇴장하는 게 깔끔해. 그래도 쫓아와서 괴롭힌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전생과 다르니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 지금처럼 독립된 공간에 같이 있지 않으면 문제없어 보였다. 10년 차면 방송국에 보는 눈 많다는 것쯤은 알 거 아니야. 매니저 형한테 말하면 최대한 엮이지 않게 해줄 것 같기도 했고.
“디아스입니다. 선배님.”
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앞으로 나갔다. 잔뜩 치켜 올라간 눈썹이 날 향하면서 조금 누그러졌다. 소파남 앞쪽까지 걸어갔을 때였다.
“거기 멈춰봐.”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괸 채 나를 품평하듯 슥 훑어봤다. 기분 나쁜 눈이다. 이번에는 검지로 원을 그리면서 “돌아봐.”하고 명령했다. 슥 뒤로 반 바퀴 정도를 돌았을 때 다시 검지가 까딱거렸다.
아바타라도 된 것 같았다. 불쾌감이 치솟았지만 감정을 꾹꾹 누른 채 얼굴에 미소를 곁들였다. 체력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기껏 채워놨더니 여기서 다 떨구네.
“너 폰 번호 뭐야.”
소파남이 제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내 앞으로 내밀었다. 휴대폰은 있지만…….
“저희 개인 휴대폰이 아직 없어요…….”
나는 잔뜩 미안한 것처럼 시무룩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너희도 뭐 음방 1위 해야 휴대폰 주고 그러냐?”
“딱히 말은 없으셨는데 언제 받을지 모르겠어요.”
“1위 하면 주겠지 뭐. 대부분 그러니까.”
소파남이 갑자기 내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어정쩡하게 소파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홍보해 줄 테니까 웃어.”
카메라를 셀프 카메라 모드로 바꾼 소파남이 내 어깨 위에 팔을 턱 올리곤 휴대폰을 들이댔다. 아, 이건 곤란한데. 이 시한폭탄 그룹이 사달 날 때 괜히 나까지 구설에 오르기 딱 좋다. 대기실에서 단둘이 사진이라니. 이건 어떻게든 거절해야 했다.
“우리 계정에 올려준다니까? 친한 척 좀 해봐.”
“아, 그건 너무 선배님께 민폐인 것 같아요…….”
두 손을 내저으면서 슬쩍 상체를 뒤로 뺐다. 체력 떨어지니까 신체 접촉은 피해줬으면. 소파남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구설만의 문제가 아니네. 우리 잘 되면 마치 저가 키워줬다는 식의 워딩이 밖으로 새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아스에 똥 묻히기 싫어.
“야,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보여? 너희 같은 무명 신인 사진 하나 올렸다고 민폐? 이거 웃기네?”
나는 겁먹은 것마냥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성질을 못 이긴 소파남의 쇳소리를 들어줄 생각으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해 버렸다. 이대로 성질 뻗쳐서 꺼지라고 해주면 좋겠는데.
“뭘 또 그렇게 겁먹어? 됐고, 웃어.”
턱 밑에 손이 들어와 강제로 내 얼굴을 잡아 올렸다. 소파남이 옆에 딱 붙었고, 카메라가 다시 들이밀어 졌다. 나는 눈썹을 떨구고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누가 봐도 잔뜩 겁먹고 있다는 게 사진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이 정도면 찍혀도 괜찮겠네. 못 올릴 테니까. 찍힌 사진을 확인한 소파남이 마음에 안 차는지 웃으라고 나를 윽박질렀다. 뒤로 가면 갈수록 겁먹고 있는 티가 팍팍 났다.
“하, 진짜.”
못 올리겠지? 이런 사진은 어디 공개되어도 문제없다. 누가 봐도 신인 윽박질러서 찍은 사진이잖아. 본인 그룹을 위해서라면 삭제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거다.
물론 안티에게는 대선배 앞에서 표정 관리 못 한다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뭘 하든 깔 거라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너 SNS 계정 뭐야.”
“저희 개인 계정은 없어요…….”
“뭐? 그것도 없어?”
소파남이 나를 노려보면서 SNS을 켰다. 우리 그룹을 검색해 보고는 어이없어했다. 소속사에 따라 방침이 다르기에 건수 잡힐 일은 아니었다.
“야, 김호채. 슬슬 매니저 올 시간이야. 애들 보내.”
“아, 진짜. 알았어.”
소파남이 벌떡 일어났다. 나도 슬쩍 일어나서 슬금슬금 형들을 향했다.
“야! 기다려.”
아, 왜 저래. 강현 형이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 못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유찬 형한테 한쪽 팔이 꽉 잡혀 있는 걸 보니 아까부터 저랬을지도 모르겠다.
소파남은 화장대 앞에서 뭔가를 휘갈겨 쓰더니 내게 건넸다. 반으로 접어 대충 찢어낸 종이에는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무나 주는 거 아니야. 개인 폰 생기면 연락해라. 형이 너 띄워 줄 테니까.”
“……네. 고맙습니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의기양양한 얼굴이 날 내려봤다.
“가 봐.”
우리는 다 같이 인사한 뒤 문라이트 대기실을 나왔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유찬 형이 “일단 우리 대기실로 돌아가자.”라고 운을 뗐다. 대기실로 돌아갈 때까지 형들은 아무 말도 안 했다.
***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딥컬러 멤버들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나간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우리는 소파 근처에 옹기종기 모였다. 유찬 형이 걸어가자 자연스럽게 다들 그 뒤를 따른 탓이었다. 풀썩 주저앉은 유찬 형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하온아,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내가 해야 했는데……. 내 역할이었는데…….”
아, 우리 순두부!
나는 일부러 기운차게 유찬 형 옆에 앉았다. 소파가 출렁거리자 유찬 형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그 사람이 저 부른 거잖아요. 형이 저 대신 갈 수도 없는 거였고, 저 지켜주려고 했잖아요. 할 만큼 했어요.”
“하지만, 너 겁먹었잖아. 무서워했는데 아무것도 못 했어…….”
“겁 안 먹었어요.”
“거짓말.”
이서호가 끼어들었다. 저 녀석도 잔뜩 울상이었다. 강현 형은 계속 한숨 쉬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평소보다 거친 숨이 화가 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정이한도 다르지 않았다. 고개 숙인 채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정이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러니까 지켜주고 싶지. 날 소중하게 여겨주는 내 멤버들. 나쁜 건 내가 다 막아주고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 나한텐 이런 일 아무것도 아니니까.
“형들. 매니저 형이 주의 준 거 기억하죠? 하지만 선배님이 사진 찍자는 거 거절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못 올리게 하려고 무서운 척한 거예요. 안 무서웠어요.”
어느새 울상이 된 유찬 형이 나를 꽉 안았다. 거참. 괜찮다니까.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며 형을 위로하는 사이 이서호가 매달렸다. 어깨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는데 어쩐지 축축했다. 설마 울어?
“이서호, 울어?”
어깨를 튕겨 올리면서 물었더니 “아니야!”하고 잔뜩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얼굴을 떼지 않고 자꾸 묻으려는 걸 보니 이건 무조건이다. 눈 부으면 안 되는데.
“나 결심했어.”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정이한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잔뜩 굳은 얼굴이 더욱 사납고 거칠게 보였다.
“성공할래. 성공하고 싶어. 그게 우리 멤버들 지키는 방법이잖아. 하온이가 두 번 다시 그런, 불쾌한 경험 겪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릴 거야.”
정이한이 이런 소리를 해? 조금 놀라웠지만 기특하기도 했다. 마냥 어리고 약하게만 보였는데. 내가 다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