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58화 (58/320)

58.

매니저 형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드라이 리허설 전까지 해야 할 일정, 주의 사항을 알려주고 나갔다. 신인 그룹 매니저로서 인사 다녀야 할 곳이 많을 게 뻔해서 마음속으로 형을 응원했다.

나와 이서호가 도시락을 해치우고, 형들이 포션 빨 듯 커피를 쪽쪽 거릴 때였다. 딥컬러가 들어와 우리는 동시에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였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잔뜩 피곤한 얼굴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어? 어, 네. 안녕하세요.”

서로를 마주 보고 서서 꾸벅꾸벅, 어색하게 인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 한 명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선배예요?”

아직 이름표가 없어서 누군지 모르겠다.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는 얼굴과 이름을 매칭시킬 수 없었다.

“네! 저희 데뷔 1일 차예요.”

이럴 때 사회생활 짬을 발휘해 대표로 대답하는 건 유찬 형이었다. 이서호는 말실수의 위험이 있어서 단단히 주의받은 상태였다. 끼어들고 싶은데 꾹꾹 참는 게 보였다.

“아, 우리는 8일 차인데……. 이 정도면 동기 아닌가?”

“맞네. 동기네.”

“편하게 해요. 그런데 그쪽 얼굴 장난 아니다. 다들 어디 가면 비주얼 멤버 할 거 같은데? 우리 비주얼 멤버 누구냐?”

“나지!”

“나임.”

“님들 돌았어요? 내가 비주얼 원탑인데?”

딥컬러는 서로가 비주얼 멤버라면서 와글와글 떠들었다. 여섯 명이 동시에 말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다. 새삼스럽게 그동안 내 주변이 참 조용했구나, 깨달았다. 우리 그룹에서 시끄러운 멤버는 이서호뿐이다.

“얘들아! 조용히 좀 해자!”

“해자~ 조용히 해자~”

“이찬형! 쪼꼬만 게 형을 놀려?”

“악! 아악! 형! 내 관자! 악! 거긴 급소! 악! 잘못했어! 악! 아악!”

으와…….

뾰족하게 세운 검지로 관자놀이를 누른 채 사정없이 빙글빙글 돌렸다. 아무래도 조용히 시킨 사람이 리더인 모양이었다. 본보기 덕에 우리까지 합죽이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가서 조용히 앉아 있어. 죄송해요. 어, 일단 저희 활동명으로 소개해 드리자면 저는 블루입니다. 여기는 그린, 하얀, 흑강, 주홍, 레드에요.”

블루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재빠르게 손이 번쩍 들렸다가 내려갔다. 파도타기 하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이번엔 유찬 형이 우리를 소개했다.

“하……. 그래도 디아스는 미자가 한 명뿐이네요. 저희는 저 빼고 다 미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블루가 제 멤버들을 돌아봤다. 잠깐 조용했던 것이 무색하게 이미 왁자지껄해진 상태였다. 제일 신기한 건 이서호가 마치 오랜 친구인 것마냥 그들 틈에 섞여 있다는 것이다. 친화력 무슨 일이야.

그래도 같이 대기실을 쓰는 그룹이 친절한 편이라서 다행이었다. 이 좁은 곳에서 피할 곳도 없는데 서로 불편한 것보다는 나으니까.

“야! 진하온!”

“……왜.”

나는 너처럼 친화력이 좋지 못해. 그런 어색한 장소에 나를 부르지 마.

“하여간. 저 봐. 우리 막내는 저렇게 뻣뻣하다니까? 레드는 이렇게 귀여운데!”

“우우! 그니까! 내가 이렇게 귀여운데! 우리 형들은 막내 귀여운 걸 몰라! 맨날 구박한다니까?”

“에고! 귀여워라!”

저 집 막내가 몇 살이지? 아까 소개받았지만 기억할 리가. 슬쩍 휴대폰을 꺼내서 검색했다. 17살이네. 귀여울 나이지.

“그럼 내가 형 취급 안 해줘도 되는 거지?”

“뭐? 야! 그거랑 이거는 별개지!”

“난 뻣뻣하다면서.”

“그럼 너도 귀여워해 줘?”

“……아니?”

뭐야? 나 지금 말린 건가? 이거 평소에 내가 쓰던 수법 아니야? 이서호는 본인이 이긴 것도 모르고 “야야! 내가 형은 형이잖아!”라면서 억울해했다. 황당하네. 저쪽 막내나 예뻐해라.

두 팀이 한 데 섞인 대기실을 쭉 둘러봤다. 유찬 형은 저쪽 리더한테 뺏겼고, 강현 형도 메인 댄서랑 이야기 중이었다. 평소보다 말이 빠르고 많은 걸 보니 춤 이야기 하나 봐.

우리 멤버 중에 오도카니 남은 건 나랑 정이한 뿐이었다. 잔뜩 긴장한 정이한은 2인용 소파 끝에 혼자 앉아 있었다. 덕분에 사나운 인상이 더욱 날카롭게 보여 그 근처는 청정 구역이었다. 저쪽으로 가야겠다.

“너희는 네가 막내야?”

막 방향을 틀려고 했는데 내게 친근한 척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저 사람과는 아무런 접점도, 아는 바도 없었기에 어떻게, 뭘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대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멤버들을 만났을 때처럼 차라리 내게 적대적이면 대하기 쉬울 텐데…….

“네. 안녕하세요.”

“왜 그렇게 딱딱해? 나 너랑 동갑이야. 열아홉! 본명은 이정수, 예명은 흑강이야. 너희는 다 본명? 아니면 예명?”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하면 되겠지?

“저희는 다 본명이에요.”

“아~ 동갑끼리 왜 그렇게 딱딱해~ 그냥 편안하게 해. 편안하게. 아, 혹시 내가 좀 불편한가?”

무척 불편하다. 하지만 일주일이라도 선배는 선배였기에 놀란 척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불편한 건 아니에요.”

“정수우~ 까였냐?”

새로운 얼굴이 정수의 어깨에 팔을 턱 얹으면서 나타났다. 삐딱하게 선 사람이 건들거리면서 정수를 놀렸다.

“어? 나 까인 거임?”

“응. 제대로 까였네. 이 형님 하는 거 잘 봐라.”

정수가 팔짱을 낀 채 턱을 까딱거렸다. 옆에 선 남자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주홍이라고 해. 본명은 김준호. 편안하게 홍이라고 불러도 돼. 만나서 반갑다, 친구야.”

“으하핳핳하핳!”

“…….”

책을 읽는 것처럼 딱딱하고 어색한 어투였다. 정수가 배를 부여잡고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나도 저렇게 인사해야 하나?

“아~ 이거 안 통하네. 이 친구 웃음장벽이 높은가 봐! 까비!”

“니 개그 수준이 저질인 거지.”

“네 다음 쳐 웃은 정수씌~”

어려워. 불편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두 사람이 내 뒤를 보면서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런지 확인하니 어느새 정이한이 내 뒤에 서 있었다.

“하온아.”

정이한이 나를 구조하러 왔다. 두 사람은 바짝 긴장한 채 “아, 안녕하세요! 형님!”하고 인사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흩어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정이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이한 긴장했네.

“미안해요. 형이 할 말 있는 것 같아서.”

“어! 으응! 이따 또 이야기하자!”

“가봐, 가봐!”

두 사람이 흔쾌히 나를 보내줬다. 후우. 좋은 사람들인 것 같은데 경계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어려운 건 어려운 거다.

어떤 말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기에 조심스러웠다. 얽히지 않는 게 좋다. 나 때문에 디아스에 피해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자 정이한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내가 방해한 거야?”

“아니요. 저 낯가려서 어려워하고 있었어요.”

“……낯 가린다고?”

정이한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날 봤다. 허공을 더듬는 시선이 기억이라도 떠올려 보는 모양새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너 친화력 좋던데…….”

“그거야.”

‘미움받아도 상관없었으니까.’

무의식중에 쏟아내려던 말을 뚝 끊었다. 원래는 편안하게 뱉던 말이 갑자기 목에 탁 걸려버렸다.

“그거야?”

“그거야……. 형들은 멤버니까.”

대충 수습했는데 다행히 정이한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아주 예뻤다.

“하온아~”

갑자기 소파 뒤가 내려앉았다. 동시에 묵직한 무게감이 어깨 위로 느껴졌다. 유찬 형이 백허그하듯 내 등 위에 무게를 실어왔다.

“무거워요…….”

“하온이 충전 좀 하고 갈게.”

“제가 충전기예요?”

“응.”

당당한 대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찬 형이 등에 이마를 대고 부비적거려서 간지러웠다.

“간지러워요!”

몸을 비틀다가 균형이 앞으로 쏠렸다. 정면에 있던 정이한이 날 받아 안는 바람에 앞뒤로 두 사람에게 짓눌린 인간 샌드위치가 되고 말았다.

“어! 뭐야! 나도!”

이서호가 와다닥 뛰어왔다. 튼실한 다리가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걸 보고 기함해서 눈을 감았다. 나 허리 작살나는 거 아니야?

“으악! 서호야! 뛰지 마!”

“으억!”

“하온이 잡을 일 있어?”

다행히 내 몸에 가해지는 충격은 없었다. 상황을 살펴보니 강현 형이 이서호의 허리를 낚아챈 모양이었다. 형의 팔에 힘줄이 잔뜩 솟아 있었다.

“오오오! 민첩해! 민첩해!”

딥컬러 멤버들이 다 같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강현 형 장난 아니다. 엄청 빠른데?”

“……나랑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눈 깜박했더니 사라졌어.”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는 걸 보니 날 구해준 일등 공신은 강현 형인 모양이다. 어떻게 잡은 거지?

“으, 이서호. 내 허리 작살내려고 했지?”

“아니야! 난 살포시 올라가려고 했어!”

믿기 어렵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더니 이서호가 억울해했다. 자기도 상식이 있단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 너는 상식이 없어.

***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우리는 앨범을 챙겨 들고 선배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그러면서 방송국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무시하고 쌩하니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이네.”

대기실 문에 ‘문라이트’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데뷔 10년 차의 3인조 보컬 그룹이었다. 매니저 형이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 준 그룹이기도 했다.

원래 4인조 그룹이었는데, 멤버 하나가 마약 문제로 퇴출당해 나머지 셋만 활동 중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남은 멤버들도 걸리지 않았을 뿐이지 안 좋은 소문이 많다고 했다.

인기도 많고, 대형 소속이라 밖으로 새어 나가진 않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이미 찌라시도 몇 번 돌았다고 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는 소리였다.

인사만 하고 교류의 여지를 주지 말 것. 절대로 엮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그 때문에 다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유찬 형이 길게 심호흡한 뒤 우리를 봤다.

똑똑.

“네.”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문을 열고 우르르 들어가자 두 쌍의 눈이 우리를 향했다. 한 명은 얼굴을 덮은 채 소파에 누워있었는데 잠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어~ 신인? 인사하러 왔어?”

“네!”

유찬 형이 신호를 보내고 우리는 동시에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디아스입니다.”

“아, 그래그래. 앨범 가져왔겠네. 이쪽에 올려놔.”

“아! 시끄럽게!”

소파에 누워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신경질 냈다. 헙, 하고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호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슬쩍 이서호를 가리면서 앞으로 나갔다.

이서호만이 아니었다. 유찬 형도 얼음처럼 굳어 버렸고, 정이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강현 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이럴 때 나서는 타입은 아니었으니, 나서서 분위기를 바꿀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야야. 호채야. 신인이 인사하러 온 건데 그러면 되겠어?”

“아, 잠 좀 자자! 잠 좀! 작게 말할 수 있잖아!”

날카로운 시선이 휙 우리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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