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얘들아! 도착했어!”
매니저 형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나 언제 잠들었지? 이서호가 나한테 기댄 채로 잠들어서 불편하다고 생각한 게 마지막이었다. 어깨가 뻐근해서 보니 아직도 내 어깨를 베고 있었다.
“야, 이서호. 일어나.”
무거운 머리를 꾹꾹 밀어내면서 말했다.
“혀엉……. 나 조금만 더…….”
“나 진하온인데. 이제부터 형이라고 부를 거야?”
“……몰라아.”
꼼지락거리던 이서호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진하온? 진하온이라고? 내가 너한테 형이랬어?”
“응. 잠 깼으면 내리세요. 서호 동생.”
“으악!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나는 팔짱 낀 채 이서호가 머리를 쥐어뜯는 걸 구경했다. 유찬 형이 “얘들아, 빨리 내리자~”하고 우리를 재촉했다.
“야, 취소야. 잠결에 헛소리한 거야. 알지?”
“모르겠는데~”
“아이씨! 취소라니까! 취소! 취소!”
“빨리 내리기나 해.”
맨 뒷줄 창가 자리에 앉은 나는 이서호한테 가로막혀 나갈 수가 없었다. 이서호는 그제야 엉덩이를 뗐는데, 허리를 수그린 채 반 발자국 뗄 때마다 계속 뒤를 돌아봤다. 그때마다 “실수다?”, “실수인 거 알지?”, “내가 형 맞거든!” 하면서 집요하게 굴었다. 그렇게 신경 쓰이나.
“알았으니까 빨리 내려. 허리 아파.”
좁은 차 안에서 뭐 하는 짓인지.
“야, 진하온.”
“또 왜.”
“형이라고 또 불러주라.”
“뭐?”
“어제 쇼케 때 서호 형이라고 했잖아. 어제처럼 자연스럽게 해 줘봐.”
나는 희귀 동물 보듯 이서호를 들여다봤다. 불그스름해진 뺨으로 입술을 삐죽이더니 “싫어?”하고 묻는다. 평소처럼 마구잡이로 우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야 뭐, 놀리려고 하는 거니까 싫을 이유는 없지만……. 원한다면야.
“서호 형.”
“어!”
“됐어?”
“응! 내린다!”
잔뜩 상기된 이서호가 폴짝 뛰어내렸다. 어깨를 쭉 펴더니 기세등등한 걸음으로 “형들! 빨리 가자!”하고 재촉했다. 유찬 형이 황당해하면서 “너 때문에 늦은 거잖아!”하고 외쳤다.
저렇게 신날 일이야? 이서호한테는 내가 처음 생긴 동생도 아니잖아? 연습생 중에 형형, 하면서 따르는 애들이 많았다. 우리 멤버들 중 최고 인싸는 이서호고, 다음으로는 유찬 형이었다.
근데 왜 저렇게 좋아해? 그동안 형 취급 안 해준 게 조금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아무리 애로 보여도 정이한 대할 때처럼 부를 땐 형 소리 해줘야 하나. 근데 안 나오는 걸 어떡해.
드르륵. 벤 문을 닫고 멤버들 뒤를 따라가는데 정이한이 멈춰서서 나를 기다렸다.
“하온아, 안 피곤해?”
“네. 괜찮아요. 형이야말로 다크서클 심각한데 이거 화장으로 가려지려나.”
정이한의 눈 밑이 퀭하게 죽어 있었다. 하도 시커메서 다크서클이 아니라 뭐가 묻은 것처럼도 보였다. 엄지로 슥슥 문질러 보니까 다크서클 맞다.
“그렇게 심각해?”
“조금요. 어제 못 잤어요?”
“응……. 두 시간쯤 잔 것 같아.”
“아하.”
다들 비슷하려나. 그나마 내가 제일 오래 잤네.
***
숍에 들러서 꾸민 듯 안 꾸민 듯 가볍게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았다. 그런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우리는 다시 벤을 타고 방송국으로 이동했다. 무대용 헤어와 메이크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망가지면 안 돼서 편하게 기댈 수도 없었다.
방송국과 가까워지자 매니저 형이 다시 한번 주의 사항을 읊었다. 특정 팬이 “계 탔다”고 느낄 만한 행동은 하지 말 것. 다 같이 움직일 것. 환하게 웃으면서 대응할 것 등등.
우리 팬보다는 선배 그룹 팬이 대부분일 테니 실망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사이 벤은 방송국에 들어섰고, 어둡게 선팅된 창 너머로 줄줄이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 벤을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기다리는 그룹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본 순간 가슴이 꽉 조여들며 과거의 한 순간이 떠올랐다.
「아, 진하온 찍혔잖아!」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민폐 끼쳐서 미안하다며 나를 밀어내고 포즈를 취하던 멤버들, 꺅꺅 소리 지르며 팬서비스에 호응해주던 팬들. 좀처럼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진하온, 긴장되냐?”
내 시야 앞으로 불쑥 이서호의 얼굴이 끼어 들어왔다.
“야, 이 형님만 믿어.”
“응? 서호가 믿을만한 형이던가?”
“아! 유찬 형!”
“하온이 긴장 많이 했어? 내가 손잡아줄까?”
“이한이 네가 잡고 싶은 거 아니고?”
“……뭐어.”
정이한이 코끝을 찡긋거리면서 큼큼거렸다. 나 진짜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내 얼굴이 바짝 굳어 있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딱딱한 표정을 풀면서 말했다.
“조금 긴장됐는데 이서호 바보 같아서 이제 괜찮아요.”
“아! 내가 또 뭘!”
“형이 내 긴장 풀어줬다고.”
“……그으래?”
“응. 고마워.”
“어, 뭐, 뭘! 이 정도로. 내가 형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흠흠.”
이서호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기분 좋은가 보네. 역시 예전이랑은 달라. 여기엔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멤버들은 나를 밀어내지 않을 것 같았다.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기어가던 벤이 멈췄다. 형들이 모두 내리고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뒷좌석 창가에 앉으니 매번 마지막 순서였다.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벤에서 내렸다.
“하온아!”
벤에서 내림과 동시에 들리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찰칵 찰칵 찰칵. 빠르게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온이 예쁘다!”
“서호야~ 여기 좀 봐줘! 서! 호! 야!”
“앗! 넵넵!”
이서호가 바쁘게 손을 흔들면서 방긋방긋 순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형들도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 중 우리를 찾는 팬들은 소수였다. 하지만 그중에는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시발, 미친.”
그때, 갑자기 들려온 욕설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만 들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헉! 들렸나 봐.”
두 손으로 입을 턱 막은 사람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웃어주자 “아, 시발, 미쳤네!” 하고 또 욕을 하셨다.
내가 움찔거리자 두 손을 마구마구 휘저으면서 횡설수설 말했다.
“헉. 아니, 아니, 이게 욕한 게 아니라요! 아! 웃는 게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아아아!”
몇 명의 사람들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감탄사 대신 욕을 쓰신 거구나.
“괜찮아요.”
“윽, 윽, 아, 윽.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디아스의 진하온입니다!”
“하……. 미, 아니, 아오. 내 주둥이! 아오!”
갑자기 어깨에 팔이 턱 올라왔다. 누군지 봤더니 유찬 형이었다. 형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하온이 예쁘죠?”
“네! 존, 아니, 아, 네, 엄청! 와. 와아.”
“하온아! 유찬아! 이쪽 좀 봐줘!”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다시 찰칵찰칵 플래시 소리가 터졌다. 손을 흔들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저희 무대도 열심히 할게요! 디아스 응원해주세요!”
“네에!”
유찬 형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홍보까지 한 뒤 나를 이끌었다. 방송국 안으로 들어선 뒤 작은 목소리로 “놀랐어?” 하고 물어왔다.
“네. 조금.”
“너 굳는 거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
“어휴, 진하온. 감탄하는 거랑 진짜 욕하는 거랑 구분도 못 하냐? 그럴 땐 그냥 웃어주면 돼!”
이번에는 이서호의 말이 맞았기 때문에 끄덕였다. 그랬더니 얌전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다면서 입맛을 다셨다.
***
주차하고 온 매니저 형의 뒤를 졸졸 따라 대기실에 도착했다. 대기실은 좀 협소했는데, 우리 말고 ‘딥컬러’라는 그룹도 같이 쓰는 모양이었다.
이런 건 익숙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오히려 두 그룹만 쓴다는 점에서 호사스러움이 느껴졌다. 문제는 내가 딥컬러라는 그룹을 모른다는 거였다.
“아직 선배님들은 안 오신 것 같지?”
우리는 데뷔 1일 차기 때문에 누가 와도 무조건 선배님이었다. 유찬 형은 딱 봐도 부족해 보이는 의자를 보면서 어떡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딥컬러를 검색했다. 우리보다 일주일 먼저 데뷔한 그룹이었다. 총 여섯 명의 멤버로 예명에 모두 색이 들어가는 그룹이었다. 우리 그룹은 본명과 예명이 일치해서 나로서는 아주 다행이었다.
“자, 얘들아. 이름표 메자.”
매니저 형은 이름이 박혀 있는 허름한 천 쪼가리를 나눠줬다. 팔에 끼워 넣고 달랑거리는 끈을 등허리에 딱 붙도록 질끈 묶어서 고정했다.
“음. 우리가 다섯 명이고 선배님들이 여섯 명인데…….”
대기실에는 2인용 소파 하나와 등받이 없는 간이용 의자 여섯 개가 전부였다.
“어쩔 수 없네.”
유찬 형이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부르길래 다가갔더니 제 허벅지 위를 툭툭 두들긴다.
“하온이는 내 무릎에 앉자.”
“…….”
저것도 체력……회복되나? 시도라도 해볼까? 조금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매니저 형이 말했다.
“아, 의자 추가로 달라고 했어. 올 거야.”
“……그래요?”
유찬 형이 어색하게 대답하면서 일어났다. 나는 매니저 형의 능력에 감탄, 또 감탄했다. 저게 가능한 일이구나. 의자를 받을 수 있는 거였어!
“우리 좀 일찍 도착해서 여유 시간 많아. 드라이 리허설까지 시간 남았는데 도시락 먹을 사람 손?”
“저요.”
“하온이 말고 다른 애들은?”
매니저 형이 메뉴를 고르라면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슥슥 내려보는 사이 이서호가 “저도여!”하고 외치면서 합류했다.
“정곤 형. 자판기 다녀와도 돼요?”
“강현이 도시락은?”
“커피면 돼요.”
“아, 저도 커피 마실게요.”
“커피이…….”
나랑 이서호 빼고는 아무도 안 먹나 보네. 밥을 먹어야 체력 회복이 잘 되므로 나는 무조건 먹어야 했다. 이렇게 꼬박꼬박 밥 챙겨 먹는 건 순전히 시스템 때문이다. 체력만 아니었어도 귀찮아서 안 먹었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