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새벽 3시 30분.
알람을 듣고 부스스 일어나 제일 먼저 체력부터 확인했다. 어제 편안한 마음으로 잔 덕분인지 80퍼쯤 차 있었다. 유찬 형은 바로 옆에서 시끄럽게 알람이 울리는 데도 깰 기미가 안 보였다.
“형.”
유찬 형을 흔들자 꾹 닫혀 있던 눈꺼풀이 반쯤 올라갔다. 초점 안 맞는 시선이 허공을 더듬다가 나를 본다.
“세 시 반이에요.”
“으, 피곤해 죽겠다…….”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있었다. 형이 부스스 일어나 앉는 걸 확인한 후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복잡해지기 전에 먼저 씻어야지.
양치질하면서 온도를 맞추고, 뜨거운 물을 맞았다. 몸이 노곤노곤 풀리는 이 느낌이 참 좋았다.
생각보다 스케줄 빼곡하던데…….
오늘을 시작으로 일주일에 음방 출연만 여섯 개, 평일 음방 스케줄 중간중간 라디오와 너튜브 촬영, W라이브까지 끼어 있었다.
이게 이제 막 데뷔한 신인 그룹이 잡을 수 있는 스케줄 맞나? 원래 다 이런 건지 스알의 영업력이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전생에는 일주일에 한 번 음방 일정이 잡히면 많은 거였고, 예능은 한 달에 한 번 정도였다. 그것도 케이블의 비인기 채널. 라디오도 한두 번 정도였던 것 같고……. 지방 행사를 많이 뛰었었지.
내 체력 괜찮을까.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아이돌의 활동기 스케줄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데뷔하자마자 그게 내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스킬 올려서 대비할 시간이 있을 줄 알았거든.
어? 맞아. 어제 스킬 생겼었는데.
깜박 잊고 있었다. 바디워시를 쭉쭉 짜서 골고루 문지른 뒤에 스킬을 확인했다.
구원(F): 타인의 목숨을 구한 당신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다른 사람의 상태 이상을 회복합니다.
스킬 사용 시 체력을 요구하며 체력이 부족한 경우 상태 이상에 걸립니다.
요구되는 체력은 회복하고자 하는 대상의 상태 이상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쓸 체력도 없는데 다른 사람을 회복시켜 준다니. 힐은 힐인데 자힐 안되는 힐이네.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내 체력 회복시켜 주는 스킬이라면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엎드렸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가 서브 미션 보상으로 랜덤 박스를 받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시스템! 내 보상 어딨어? 알려줘!
<시스템: ‘데우스 선물 상자’ 1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뭐가 들어 있는지는 안 알려주나? 시스템이 잠잠했다. 일단 이름에서 느껴지는 강한 랜덤 박스 재질에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 생각했다.
응, 일단 사용.
눈앞에 창 하나가 또잉! 하고 떠올랐다. 아주 귀여운 돌림판이었다. 콕콕 찍어 보니 친절하게 설명도 나왔다. 총 13개의 아이템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정수 체력 회복약 3종, 비율 체력 회복약 3종, 포인트 랜덤 박스 3종, 스킬 등급 상승 아이템 4종이다.
와아. 진짜 있을 거 다 있네. 이렇게까지 충실하게 게임 시스템을 구현해 놨을 줄이야. 아이템 종류나 획득 확률까지 일반적인 게임의 가챠랑 비슷했다. 다음에 데우스 만나면 랜선 있냐고 물어봐야겠어. 이 정도면 신들끼리 다 같이 mmorpg 하고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딱 보니 ‘미미한 비타300’나오겠네. 아니면 ‘미미한 박카스’거나. 5,000 포인트부터 시작하는 대형 포인트 상자나 특급 스킬권은 절대 못 먹는 거다. 기대도 하면 안 된다.
체력 회복 아이템을 얻을 길이 생겼다는 것에 만족해야지. 경쾌한 소음과 함께 돌림판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기대감이 없어서 그사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시야 끝에 걸린 돌림판이 멈추는 기색이 보여서 확인했더니 예상대로였다.
<시스템: ‘미미한 비타300’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 사용자가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획득으로 ‘소지품’ 창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체력 20 회복시켜 주는 아이템이었다. 꼭 필요할 때 먹어야지……. 서브 미션 또 안 나오나? 이번에는 좀 쉬운 걸로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시스템! 알려줘!
<시스템: 원하는 아이템을 생각하면서 소지품 창에 손을 넣으면 획득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해봤더니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미미한 비타300’이 내 손에 쥐어졌다. 작고 불투명한 갈색 유리병이었다. 흔들어보니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못 꺼내겠네.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데 미리 꺼내두기는 애매했다. 이것도 결국 화장실에서 먹어야 한다는 소리다. 조금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미미한 비타300을 소지품 창에 보관해 둔 뒤 욕실을 나왔다.
왜 아무도 없지…….
유찬 형 또 잠들었나? 방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보니 침대에 앉아서 연신 하품만 하고 있었다.
“다, 흐아암, 씻었어?”
줄줄 새어 나오는 눈물을 닦으면서 형이 물었다.
“네. 저쪽 방은 전멸이에요?”
“응. 깨우긴 했는데 다들 못 일어나더라……. 씻고 나와서 다시 가봐야지. 아, 정신을 못 차리겠네.”
유찬 형이 두 손으로 제 뺨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소리가 꽤 컸는데 그걸 증명하듯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도 잠이 안 깨는지 비척비척 일어나서 옷을 챙겼다.
나는 어제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체력 관리를 위해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때가 10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잠들기 직전까지 음원 차트 본다고 모여있었다. 언제 잤는지 모르지만 다들 못 일어날 법했다.
어느새 4시였다. 매니저 형이 5시 30분에 데리러 온댔으니 여유 시간은 1시간 30분 밖에 없었다. 욕실이 두 개였으면 나도 조금 더 잘 수 있었을 테지만 하나뿐이니 어쩔 수 없다. 릴레이식으로 씻어야만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세 명……. 아니지. 이서호 빼고 둘 중 한 명이라도 깨워서 유찬 형 나오면 바로 들여보내야겠다.
나는 곧바로 움직여 건넛방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처음 들어오는구나.
2층 침대 하나와 마주 보고 있는 싱글 침대 하나가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알람을 맞춰두지 않은 건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끈 건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어두워서 누가 어디에서 자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깨워야 하니 불을 켜버렸다. 싱글 침대는 이서호의 것이었다. 이불을 발로 찬 채 배를 드러내고 뻗어 있었다. 바닥에 뒹구는 베개를 주워서 올려준 뒤 2층 침대를 살폈다.
위층에는 강현 형이, 아래층에는 정이한이 있었다. 베개를 끌어안고 모로 누워있는 정이한을 살짝 흔들었다.
“으응…….”
꼼지락대던 정이한이 눈을 떴다.
“형, 네 시예요.”
“으으…….”
일어나기 힘든지 끙끙 앓고 있었다. 정이한은 몇 번 뒤척이다가 나를 보고는 대뜸 손을 뻗었다. 뺨에 따듯한 손이 올라왔다. 뭔가를 확인하듯 그 자세로 잠시 멈춰있던 정이한이 눈을 비비고는 꼼지락거렸다. 응? 뭐야?
“형?”
“으응. 일어날게에…….”
나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다가 위층을 봤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현 형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벌써…….”
한 단어에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강현 형은 눈을 감은 채 일어나 꾸벅거렸다. 그사이 꼼지락대던 정이한은 또 잠들었다. 이거 어쩐다. 다들 너무 피곤해하네.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려서 화들짝 놀랐다. 강현 형이 신음하면서 머리를 문질렀다. 이층이라 천장에 머리를 박은 모양이었다.
“아, 또.”
그래도 그 덕에 목소리에 잠기운이 조금 가셔 있었다. 형이 내려오길래 움직여 공간을 만들어 줬다.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슥슥 빗어 넘기면서 옷을 챙겼다.
“몇 시야?”
“네 시요.”
강현 형은 쭈욱 기지개 켜면서 거실로 나갔다. 정이한은 강현 형 다음에 씻으면 되겠네. 조금 더 재울 생각으로 나도 형을 따라갔다.
소파에 주저앉은 강현 형은 옷가지를 끌어안고 늘어졌다.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고, 눈은 느리게 깜박거렸다. 잠 깨려고 노력하는 게 안쓰러웠다.
“하온아.”
“네?”
“머리 안 말려?”
“말려야죠.”
게슴츠레한 눈이 나를 봤다. 강현 형이 손을 휙휙 흔들면서 말했다.
“빨리 말려. 감기 걸린다.”
나는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올려보다가 말했다.
“말리고 올게요.”
“……응.”
***
새벽의 여유로움은 5시가 지나면서 끝났다. 죽어도 깨지 않는 이서호를 유찬 형과 강현 형이 들어 날랐다. 욕실 바닥에 녀석을 내려놓은 유찬 형이 샤워기를 들었다. 그리고 냉수로 바짝 땅긴 뒤 가차 없이 뿌려 버렸다. 이서호가 “으악! 빠져 죽는다!”라면서 허우적거렸다.
이서호는 상황 파악한 뒤 형들한테 너무하다면서 투정 부렸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으므로 둘 다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빨리 씻어. 시간 없어.”
“어엉!”
고생이네. 나는 앞으로도 절대 이서호를 깨우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배를 채울 요량으로 천도복숭아를 아작아작 씹어 먹으면서 새콤한 맛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시다.
그래도 준비 끝내고 쭉 소파에서 쉬었더니 체력이 촘촘히 차올랐다. 옆에 있는 정이한에게 슬쩍 기댔더니 효율이 아주 좋았다.
“이한 형.”
“응?”
“불편하면 말해요.”
“안 불편해.”
“정말요?”
“응. 정말.”
그럼 다행이고. 정이한은 이따금 내 얼굴을 만지면서 체온을 확인했다. 나 지금 혈색 좋을 텐데. 열나서 실려 갔던 일이 그렇게 충격이었나? 체력 관리 잘해야지.
“얘들아, 좋은 아침!”
매니저 형이 쾌활한 목소리로 거실로 들어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정확하게 5시 30분이었다. 문 앞에서 카운트 다운하고 들어온 거 아닐까? 이렇게 정확할 수가 없다.
“악! 형! 미안해요! 저 잠깐!”
이서호가 다급하게 머리를 말리면서 방으로 뛰어갔다.
“이서호! 뛰어다니지 마! 새벽이잖아!”
“알았어, 알았어!”
“으휴.”
우왕좌왕 정신없는 이서호. 한숨 쉬는 유찬 형. 내 옆에 앉아 있는 정이한. 커버 영상 보는 강현 형.
이제는 이런 아침들이 익숙해지겠지? 지금 시간을 아침이라고 해도 된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