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51화 (51/320)

51.

내가 한 말을 곱씹다가 원인을 알아차렸다. 설마 나 가족들을 기다린다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어쩌면 멤버들은 내가 가족들과 사이 안 좋다는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휴가 기간에 나 혼자만 숙소에 남아 있었으니까. 가족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고. 분위기 보니 이서호도 눈치챘나 본데?

아, 이거 실수한 것 같다.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망했다. 수습을 좀 해야겠다.

“별 의미 없어요. 그냥 온다길래 찾아본 거예요. 딱 그 정도.”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온아. 가만히 날 부르는 정이한의 목소리가 애틋했다. 아! 왜! 지금 내 이미지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아닌 것 같은데…….

벤에서 도망치고 싶은데 나갈 수 없으니 죽을 것 같다. 괜히 이런저런 말 덧붙여 봤자 오해만 깊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우리 데뷔 쇼케이스 중에 사고 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게 더 이상해. 그냥 입 다물자.

나는 멤버들을 향해 아련하게 웃어 준 뒤 창밖을 봤다. 짧은 침묵 끝에 이서호가 과장 된 어조로 유난스럽게 말했다.

“이제 50분 남았다! 저 사람 중에 우리 보려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겠지?”

“어, 저기 봐봐. 플래카드 들고 있는 사람 있어.”

분위기 풀어주려는 이서호에게 유찬 형이 맞장구치면서 창밖을 가리켰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와! 내 이름도 있어!”

플래카드 중 이서호를 찾으려던 때였다.

[두리야♡하온아♡]

조금 전까지 없던 플래카드였다. 내 이름 뒤에 하트가 붙어 있는 게 너무 신기해서 눈에 콱 들어와 박혔다. 나한테 댓글 남겨주셨던 분들일까. 정말 나한테도 팬이 생겼나 봐. 날 좋게 봐주는 사람이 있나 봐.

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달랐다. 이건 기대와 흥분이었다. 나는 지금 수많은 안티 팬 군단이 생긴대도 웃을 자신 있었다.

뭐야. 나 지금 갖고 싶은 거 다 가진 거 아닌가? 친구도 생겼고 팬도 생겼다. 나 다 가졌네. 세상에서 가장 풍족한 사람이 되었다.

“하온이 이름도 있네.”

“네. 그러게요.”

정이한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팔을 들어 머리를 방어했다.

“아! 형, 안 돼요. 머리 세팅 끝냈잖아요.”

“아, 맞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두 손을 번쩍 들고는 헤실헤실 웃는다. 아주 그냥 웃으면 다 봐주는 줄 알지. 으.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이따 누나한테 혼나겠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원상복구 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뭘 잔뜩 뿌려 놓은 머리는 내가 만지면 만질수록 오히려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어? 그러면 안 되지. 내가 헝클어트렸다고 말할게. 혼나는 건 생각도 못 했네…….”

정이한의 눈썹 끝이 쪼르륵 내려왔다. 괜찮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여줬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서호 머리도 엉망인데요.”

“얌전히 있는 나는 왜!”

“너 머리를 보고 말해.”

창문에 제 머리를 이리저리 비춰 본 이서호가 코웃음을 날린다.

“멋지기만 한데?”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카메라를 켰다. 이서호가 나를 향해 브이를 그리길래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나 말고 반대쪽 봐봐.”

“이렇게?”

“응.”

말은 참 잘 들어. 찰칵. 이서호의 뒤통수 사진을 보여줬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게 빠르지.

“헉! 뭐야? 나 왜 이렇게 납작해졌어!”

“너 여기 올 때까지 기대서 잤잖아.”

“와이씨, 망했다…….”

이서호가 울상을 지으면서 더듬더듬 제 뒤통수를 만졌다. 영 뜻대로 안 되는지 유찬 형한테 도움을 요청한다. 일 잘하는 매니저 형이 헤어 누나 데려오지 않을까.

“어어, 잠시만. 내가 손 좀 볼게.”

유찬 형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별 기대 없이 구경하는데 조물조물 손을 몇 번 움직인 것만으로 뒤통수가 풍성해졌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유찬 형!”

“응?”

“저도요…….”

유찬 형이 웃으면서 내게 손짓했다. 앞 좌석에 팔을 걸친 뒤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많이 안 망가졌네.”

“형 어떻게 이런 것까지 잘해요? 유찬 형 못 하는 게 없네.”

“어쩌다 보니. 평가 때 외모 항목도 들어가니까 스스로 관리해야 했었거든. 그래도 누나들보다는 못 해. 아마 더 손 봐주실 거야.”

형이 몇 번 내 머리를 만져주고는 셀프 카메라 모드로 보여줬다. 와! 이 정도면 완벽해! 관리 소홀로 망가진 게 아니라 시간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일부러 이렇게 하려고 해도 힘들 텐데. 진짜 대단하다.

“와아. 저 진짜 마음에 들어요. 이대로 무대 서고 싶을 정도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너무 오버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 광대가 움찔움찔 올라갔다. 참 솔직한 형이야.

“진짠데.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지.”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자세를 바로 했다. 유찬 형이 기분 좋을 때 터트리는 웃음소리가 날 따라왔다.

분위기가 다시 몽글몽글 좋아졌다. 어쩐지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돌발 따위 가볍게 제압해 주겠어. 어떤 일이 터지더라도 내가 다 해결해줄 테다.

***

오후 8시가 가까워지자 무대 앞에 꽤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아예 자리 잡고 앉은 사람뿐 아니라 뒤쪽으로도 빼곡하게 서 있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온 걸까? 아니면 그냥 뭔가 하는 것 같으니까 모인 걸까? 후자가 훨씬 더 많겠지?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야 어디서 어떤 돌발이 터질지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계속 창밖을 예의 주시하던 중 벤 문이 열렸다. 내 예상대로 매니저 형은 누나들을 데려왔다.

우리는 한 차례 헤어, 메이크업, 코디를 점검했다. 그 사이 매니저 형한테 주의 사항을 전달받았다. 딱히 별 건 없더라.

나는 이번에도 나와 멤버들의 마이크 팩을 꼼꼼히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인이어 마이크 위치를 살짝 조정한 뒤 다시 창밖을 봤다.

바로 그때, 관객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성인 키보다 조금 높은 조형물에 커다란 대포 카메라를 든 여성분이 올라가 있었다. 조형물은 무릎 꿇고 앉은 거대한 사람의 형상으로 접시 같은 걸 머리 위에 들고 있었다. 관객은 바로 그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접시는 살짝 바깥쪽, 그러니까 폭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미끄러지면 위험하지 않나?

“유찬 형. 저기 저분 위험하지 않아요?”

불길한 예감에 앞 좌석의 헤드를 툭툭 치면서 유찬 형을 불렀다.

“누구?”

내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유찬 형이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 여기서 행사할 때마다 한 명씩 올라가더라. 저기서 무대 영상이나 사진 찍으면 되게 잘 나와서 보통 탑시드 홈마들이 선점 많이 하더라고.”

“……절벽으로 추락하면 어떡해요?”

“아, 여기서 보이는 것보다 폭포 난간이랑 거리가 있어서 추락할 정도는 아니야.”

아, 좀 찝찝한데. 지금까지 괜찮았다고 앞으로도 괜찮으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게다가 지금은 미션이 사전 경고를 해온 상태였다. 역시 신경 쓰여서 매니저 형한테 슬쩍 말했더니 유찬 형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게 음향 테스트 결과를 알려줬다. 이쪽도 문제없다며 엄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매니저 형한테는 무척 고맙다. 원래 나한테 알려줄 의무 따위 없는데도 내가 계속 신경 쓰니까 체크리스트를 보여주는 거잖아.

나는 계속 조형물 위에 올라가 있는 여성분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바라봤다. 유찬 형은 이서호와 이야기 중이었는데 조형물 위에 올라간 여성분의 정체를 추측해보는 듯했다. 우리 홈마가 맞는가, 우리 홈마가 맞다면 누구 홈마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었다.

7시 55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 슬슬 무대에 올라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 쇼케이스 진행을 맡은 MC가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내게는 낯선 얼굴인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걸 봐서는 어느 정도 유명세가 있는 모양이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웃음벨! 화니입니다!”

우렁찬 MC의 인사가 들리자 유찬 형이 우리를 한데 모았다.

“얘들아, 우리 하던 대로만 하자!”

유찬 형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형 무대 체질인가 봐. 기자 쇼케이스는 그렇게 떨더니 아주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응! 하던 대로!”

“흥분해서 실수하지 말고.”

“아, 강현 형!”

강현 형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형의 얼굴도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후우……. 난 할 수 있다.”

정이한이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말한 뒤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는 예고 없이 번쩍 눈을 떴다. 덕분에 정이한을 흘깃거리던 나까지 덩달아 깜짝 놀라 버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이한이 날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할 수 있어!”

“오오!”

리액션 좋은 이서호가 다시금 기합을 불어 넣었다.

8시 정각.

“아주 그냥 화면 너머로도 잘생김이 폴폴 풍기네요. 제가 조금 더 잘생긴 것 같기도 한데?”

“우우우우!”

가차 없는 야유에 MC가 입맛을 다셨다. 콧김을 풀풀 풍기더니 너무 한다면서 앙탈 부린다. 어울리지 않는 과장 된 몸짓이 우스웠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오늘 데뷔하는 따끈따끈, 쫄깃쫄깃, 갓 태어난 신인 그룹! 비주얼! 노래! 퍼포먼스! 모두 잡은 갓! 신인 그룹 디아스를 소개합니다!”

“꺄아아아아아!”

“얘들아! 사랑해!”

유찬 형이 제일 먼저 벤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이한, 강현 형, 이서호. 마지막으로 나.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건 무대 앞쪽에 쪼르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일부 팬들이 보내주는 호응일 뿐이었다. 나머지 관객들은 아직까진 시큰둥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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