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47화 (47/320)

47.

도무지 고집을 꺾을 수 없어 항복했다. 이렇게 된 거 부지런히 걸어서 빨리 돌려보내는 수밖에. 과보호 받는 것도 부담이다.

이제 곧 4월인데 공기에 습기가 가득해서 조금 서늘했다. 비가 오려나? 덕분에 잠이 확 달아났다. 어깨를 움츠린 채 강현 형 옆에 딱 붙어 걸었다. 솔직히 어둑한 거리가 조금 무섭긴 했다. 왜, 영화 같은 거 보면 딱 이런 상황에서 뒤통수에 각목 꽂히잖아.

뒤에서 발소리가 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새벽부터 출근하는 건지, 아니면 지금 퇴근하는 건지 모를 직장인이 봄 코트를 여민 채 걷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우리랑 비슷했다.

“하온아.”

“……네?”

뒤를 신경 쓰느라 대답이 조금 늦었다. 강현 형의 눈동자가 내 뒤쪽을 힐끔 봤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나 예전에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그랬어요?”

“응.”

“그렇구나.”

직장인이 횡단보도를 건너가자 조금 안심됐다. 혼자 갔으면 더 무서웠을 텐데 그래도 옆에 형이 있다고 덜 무섭다. 다음에는 새벽에 데려다준다고 하면 절대 거절 안 하고 고맙습니다, 해야지.

혼자 갔으면 어쩔 뻔했어. 잔뜩 긴장한 채 걷다가 길거리에서 상태 이상 터질 각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

새로 만난 사람들과 빠르게 친해지고, 사람 많은 곳에서도 별일 없었던 탓에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학습된 것들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걸 여실히 알게 된 순간이었다.

“또 안 물어보네. 뭐였는지 안 궁금해?”

“거짓말한 거요?”

“어.”

“딱히요.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항상 진실만 말하고 살아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심각한 거면 어쩌려고?”

나는 턱을 비스듬히 들어 강현 형을 봤다. 내가 아는 백강현이라는 사람. 감탄스러울 정도로 춤을 좋아하고 잘 춘다. 무뚝뚝하지만 해달라는 건 다 해 주는 자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화내는 것도 본 적 없고.

“형이 무슨 거짓말 했든 적어도 내 안에서 형은 좋은 사람이에요. 어차피 별것도 아닐 텐데 왜 심각한척해요?”

강현 형이 야트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내 뒤통수를 아주 문질문질 잔뜩 헝클어트린다.

“멤버들한테 관심 없다고 했었던 거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아. 네. 기억해요.”

“그거 거짓말이었어.”

“알았는데.”

“어떻게?”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되묻는 강현 형의 목소리 끝이 평소보다 많이 올라갔다.

“저한테 유찬 형 어디 있고, 언제 괜찮아지는지 말해줬잖아요. 관심 없으면 그런 것도 모르죠. 내가 바보인 줄 아나.”

“흠. 그랬어?”

“거짓말했다는 게 그거예요? 생각보다 더 별거 아니었네.”

“아니, 내가 이런 말 꺼내는 건.”

잠시 머뭇거리던 강현 형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지 들리지 않아서 뭐라고요? 하고 되물었더니 “……고마워.” 세 마디가 선명하게 돌아왔다.

“형이 저한테요? 고마워할 사람은 전데. 지겨울 텐데 제 춤 계속 봐줬잖아요.”

“그냥 들어.”

“윽. 네.”

내가 말 많은 사람이었나? 언젠가 이런 경험을 한 적 있던 것 같은데. 강현 형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이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14살에 댄스 크루에 들어갔어. 처음에는 대부분 너랑 비슷했어. ‘춤 좀 가르쳐 주라.’ ‘너 잘 춘다.’ ‘나랑 페어 댄스 해볼래?’ 이러면서 다가오더라고. 춤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았지. 그런데.”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옛 생각을 하면 당시의 상황에 잡혀 버릴 때가 있다. 감정이 끌려 들어간다.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말하지 말고 들으라 했기에 그냥 조용히 강현 형의 손을 잡아줬다. 온기라도 나눠줄게. 나는 이런 거 따뜻해서 좋더라고.

“따뜻하네.”

형과 눈이 마주쳐서 웃어줬다. 강현 형은 마주 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봤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미움받았어. 누구는 내가 상처를 줬다고 하고, 누구는 잘난 척하는 게 기분 나쁘다더라. 어린 게 주제 파악도 못 한다고. 크루에서 제대로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어. 그래도 춤을 계속 추고 싶어서 포기하지 못했거든. 그러다가 캐스팅됐고, 아이돌은 관심 없었지만 계속 춤출 수 있는 직업이니까 하겠다고 했지.”

컨셉 포토도 그렇고 뮤비 찍을 때도 꽤 열심히 하던데. 그래서 아이돌에 진심인 줄 알았다. 그냥 해야 할 일은 무조건 열심히 하는 타입인가? 기특하네.

“1군으로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데뷔 조를 꾸린다는 이야기가 돌자마자 바로 데뷔 조에 발탁됐어. 네 명의 멤버가 생겼지. 하지만 크루에서 겪은 일이 잊히질 않아서 거리를 뒀어. 그냥 사람들이 싫었어. 전부 배신할 것 같았거든.”

자발적 왕따가 되었다는 고백이었다. 아! 그래서 ‘관심 없다.’라고 했는데 우호도는 싫어함이었구나. 유찬 형이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라고 했던 이유도 알게 됐다. 유찬 형이 처음부터 리더였다면 진작 녹아들었을 걸 교주가 막지 않았을까 싶다.

너무 잘난 데다 멘탈까지 튼튼하니 쥐고 흔들 수 없다는 거 알아봤을 거 아냐. 본인이 거리 두려고 하니 그걸 이용해서 속살거렸겠지.

정이한한테 했던 것처럼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느니, 춤만 좋아하는 애니 자유롭게 내버려 두자느니 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척 배척시켰을 게 뻔하다.

“재혁 형 나가고 데뷔 조 전체가 흔들렸어. 유찬 형은 내내 우울했고, 이한 형은 더욱더 모습을 감췄어. 이서호는 계속 형들과 실장님한테 화를 냈지. 그 분풀이가 전부 너한테 쏟아졌어. 그런데도 넌 의연하더라. 오히려 이서호를 득득 긁어대더니 나한테는 춤 가르쳐 달라질 않나.”

강현 형이 너 진짜 이상했어. 라면서 내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간지러워서 팔을 막 흔들었더니 얌전해졌다.

“솔직히 그때는 조만간 데뷔 조 터질 것 같았어. 그래서 가르쳐 달라니까 가르쳐 줬지. 그런데 넌 변하지 않더라. 오히려 멤버들을 끌어들여서 다 같이 모이게 했어. 어느새 정신 차리니 나도 거기 속해 있더라고.”

어째 결론이 거창해졌다. 지금 다 같이 뭉치게 된 건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뿐이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어서 그런 거죠.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계기는 너야.”

확신을 담은 반박에 할 말을 잃었다.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민망해서 아니라고 우기고 싶기도 했고, 나를 좋게 평가해준 게 고맙기도 했다.

“고맙다고 한 번쯤 말하고 싶었어. 지금은 너를 포함한 멤버들 전부 좋아해.”

강현 형이 내게서 고개를 돌린 채로 작게, 하지만 내 귀에 또렷이 들리도록 말했다.

“……어, 네. 저도 좋아해요. 형들 전부 다.”

“어.”

뻘쭘하다. 잡은 손을 슬그머니 빼내려고 했더니 더 꽉 붙잡는다. 저 부끄러운데요. 우리 이런 말 한 적 없잖아요. 아, 덥다. 날씨 쌀쌀하지 않았나.

“형, 저 되게 뻘쭘한데 손 좀…….”

“……난 아닐 것 같아? 살면서 이런 말한 거 처음이야.”

“그러니까 손 좀 놔줘요. 얼굴 터질 것 같거든요?”

“따듯해서 싫은데.”

“하, 진짜.”

“애들은 체온 높다더니 정말이네.”

“저 열아홉이거든요? 다 컸어요. 애라니. 실례잖아요.”

강현 형이 코웃음 쳤다. 나랑 두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이래 봬도 정신연령은 스물일곱인데? 날 내려보는 시선이 삐딱했다. 지금 나 작다고 저러는 건가?

“열아홉이면 뭐해. 이렇게 작은데.”

“형이 큰 거고, 아직 덜 커서 그래요! 성장기예요!”

“그럼 애 맞네.”

“애는 아니고 청소년이죠.”

따박따박 대꾸하면서 땍땍거렸다. 민망함을 쫓으려는 내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평소라면 침묵했을 강현 형도 자꾸 틱틱거리는 걸 보니 나만큼 부끄러운 거 아니냐고. 그럼 우리 조금 거리를 둬도 좋지 않을까.

“응. 미자. 어린애.”

“형도 스물하나면서.”

“난 술 먹을 수 있고, 넌 없고.”

그때였다. 갑자기 “우와아아악!”하는 외침이 들렸다. 새벽에 들리는 남자의 비명은 소름 돋게 하기 충분했다. 나도 모르게 형의 팔을 덥석 끌어안은 채 소리가 들린 쪽을 경계했다. 뭐야? 누구야? 무슨 일이지?

강현 형이 내 어깨를 감싸면서 소리가 들린 반대편으로 자연스럽게 날 보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비척비척 흐트러진 양복 차림의 아저씨가 나타났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딱 봐도 만취 상태였다.

“……아, 깜짝 놀랐네.”

“이쪽으로 와.”

강현 형이 나를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만취 상태인 사람이랑 엮여서 좋을 게 없으므로 우리는 조용히 거리를 벌렸다.

“으엉? 너히 머야?”

그런데도 눈에 띄었다. 술 먹었으면 얌전히 택시 타고 가시지 왜 이런 데서 돌아다니는 거야. 괜히 새벽에 사람 놀라게.

“가자.”

현명한 판단에 동조하면서 빠르게 걸었다. 뒤에서 만취자가 “야아, 어디가! 나 무시하냐? 어? 무시하냐고오!” 하면서 소리쳤다.

거리가 벌어지자 사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 체력을 확인했다. 아주 처참하군. 빨리 쉬지 않으면 상태 이상 터지겠어.

“이러니까 위험하다는 거야. 다음엔 데려다준다고 하면 그냥 알겠다고 해. 괜찮다고 우기지 말고.”

“형은 괜찮고요?”

“넌 작고, 나는 크고.”

“커도 급소는 똑같거든요?”

“크면 잘 안 덤벼.”

맞는 말이긴 하지. 특히 무표정한 얼굴일 때 강현 형의 분위기는 무척 서늘하다. 표정 변화 없이 눈동자만 굴려서 바라보면 조금 섬찟할 정도로.

나라도 나 같은 애랑 강현 형 같은 사람 있으면 날 공격할걸. 딱 봐도 해치우기 쉽게 생겼잖아.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조금 서글펐다.

“다 왔네. 엘리베이터 타는 거 보고 갈게.”

하지만 막상 혼자 들어가려니 찜찜했다. 만취자를 만나기도 했고. 이 새벽에 혼자 보내려니 영 마음이 안 놓인다. 스물한 살이면 어린애다. 인상 사나워도 밤에는 잘 안 보일 거 아냐.

“형.”

“어.”

“저 숙소에 혼자 있어야 해요?”

“……어.”

“아침까지?”

“숙소는 안전해.”

“……그래도.”

나는 방금 만취자를 만나 매우 놀란 상태입니다, 라는 눈빛을 보냈다. 가지 말고 나랑 있어요. 초롱초롱한 빔을 쏘았다. 과보호 특성을 발휘해줘요! 하는 마음을 담아. 연기 경험치가 오르는 것 같다.

“올라가자…….”

결국 강현 형이 포기했다. 다들 나한테 약하다. 새삼스럽게 깨달을 때마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불쾌감이 아닌 기분 좋은 간지럼이었다. 형들이 날 소중히 여기는 게 너무 잘 느껴졌다.

“저 잔다고 중간에 가고 그러지 마요. 일어났을 때 혼자면 무서울 것 같으니까.”

“알았어.”

“형들이랑 서호도 좀 쉬어야 하잖아요. 아까 보니까 다들 시체던데. 평소에 연습했던 게 있으니까 전 형들 잘할 거라고 생각해요. 강현 형도 그렇죠?”

“그렇지.”

“딱딱한 데서 잠들어서 내일 삭신 쑤신다고 낑낑거릴 것 같긴 하네요.”

강현 형이 ‘그러게.’ 하고 맞장구치면서 웃었다. 다들 웃음도 많아졌어. 나도 마찬가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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