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더 듣고 싶은데 왜요.”
“……저 지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아요.”
시선을 피해 아예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도망쳐 버리자. 응. 그게 좋겠어. 냅다 달려가려고 했는데 팔이 잡혔다. 차마 최애곡 가수를 뿌리칠 수 없어서 주춤거렸다.
“아, 미안해요. 하지만 제 노래 이렇게 좋아해 주시는 분을 처음 만나서……. 부끄럽다고 도망치지 마세요. 저도 되게 부끄러워요, 지금.”
“……네에.”
“정말 좋게 들으셨나 봐요. 한 번 들은 곡 가사와 음까지 기억하시네요.”
“아하하…….”
여러 번 들었다. 수백 번, 어쩌면 천 번 단위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전생에서. 그저 웃는 수밖에.
“뭔가 보답하고 싶은데 가진 게 별로 없어서 혹시 원하시는 거 있어요?”
“왜 보답해요?”
“열정적으로 제 노래 칭찬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요. 음악을 시작한 뒤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앞으로 이런 칭찬 많이 들으실 텐데요, 뭘.”
권세화가 “네?” 하고 되물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권세화의 미래를 알고 있었고, 겨울 바다를 들으니 이변이 없는 이상 같은 결과를 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말했다.
“무조건 성공할 거예요. 위로가 필요할 때 사람들이 찾는 노래가 될 거니까요.”
“그렇게 좋았어요? 저 성공할 거라고 확신할 만큼?”
“네! 그럼요!”
“그렇군요…….”
권세화는 손끝으로 기타 줄을 튕기면서 물끄러미 내려봤다. 주변 소음에 파묻힐 정도로 희미한 소리였다. 말 걸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내 권세화가 손바닥을 쫙 펴서 기타 줄을 누르면서 날 봤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저랑 사진 한 장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저랑요?”
권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나는 흔쾌히 허락하면서 “저한테도 보내주세요!”하고 말했다. 이 정도면 성덕 아니냐.
아이돌 판에 ‘덕계못’이라는 공식이 있지 않나. 덕후는 계를 못 탄다. 바꿔 말하자면 나처럼 계타는 덕후는 많지 않다는 거다.
나란히 서서 렌즈를 보고 생글생글 웃었다. 우리는 어깨만 딱 붙인 채 사진을 찍었고, 조금 어색함이 감도는 사진이 탄생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싶어졌다.
“좋네요. 전 마음에 드는데, 그쪽은요?”
“저도 좋아요!”
“사진 보내 드릴게요. 계정 알려 주실래요?”
“그럼요!”
와아! 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사진을 고이고이 앨범에 저장했다. 이제 딱 하나. 음원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언제 데뷔하세요?”
“네? 저 벌써 데뷔 확정이에요?”
“어? 아니에요? 설마 가수 안 하시려고요? 왜요?”
내 얼굴을 안 봐도 머리에 그려졌다. 나는 잔뜩 울상 지은 채 권세화를 올망졸망 바라봤다. 고장 난 사람처럼 잠시 굳어 있던 권세화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해야겠네. 해야겠어요. 좋아요. 가수 할게요. 사실 고민 중이었는데 방금 결심했어요.”
왜 고민했지? 중요한 건 겨울 바다가 음원으로 나오는 거다. 마음 바뀌기 전에 밀어붙이자.
“기획사 추천해 드릴까요? 솔로 가수 서포트 잘해주는 회사 알아요.”
“그쪽은 어디 소속인데요?”
“저 SR이요. 응? 어라? 제가 말했나요?”
“아니요. 찍었는데 맞췄네요.”
나는 우리 대표님과 실장님을 떠올리면서 SR도 좋은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대형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어? 내 가수는 떵떵거리면서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열심히 설명해줬다. 오디션 볼 기획사 찾느라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자세한 설명 고마워요. 참고할게요. 그런데 그쪽 이름이 ‘진하온’ 맞아요? 톡 프로필에 뜨길래.”
“아! 맞아요. 진하온이에요.”
“전 권세화예요. 가끔 톡 해도 돼요?”
“네! 물론이죠! 저 아직 열아홉이니까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형이죠?”
“그럴까?”
“네!”
“그럼 그럴게.”
와아, 와아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환호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정말 너무 가고 싶었지만, 전생엔 차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이번에야말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형 콘서트 하면 꼭 갈게요.”
“아직 데뷔하기도 전인데?”
“성대하게 여실걸요. 티켓팅 힘낼게요!”
“아하하!”
좀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강현 형이다. 왜 전화했지?
“잠시만요. 여보세요?”
─ 어디야?
“회사 근처예요. 왜요?”
─ 연습실인데 너 안 보여서.
“어? 왜 벌써 왔어요?”
─ 그냥. 올 거야?
“가요! 갈게요! 기다려요!”
전화를 끊자마자 세화 형을 봤다. 헤어질 시간이다.
“친구?”
“음. 아뇨. 형이에요.”
“친형?”
“친한 형이요. 기다린대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저 겨울 바다 음원 기다리고 있을게요! 빨리 데뷔해 주세요, 형!”
“그래, 알았어. 잘 가.”
세화 형과 기분 좋게 헤어진 뒤 한달음에 연습실로 달려갔다. 울적했던 기분은 지금을 위한 추진력이었을까. 기분 전환 겸 외출한 덕에 오히려 좋은 일이 가득 생겨서 행복한 하루가 됐다.
그리고 그날 밤, 멤버들이 돌아왔다. 지방에 내려간 정이한을 빼고 전부 모였다. 휴가 간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왜들 이렇게 일찍 왔대?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이서호는 도대체 뭔가?
“아이씨, 기껏 왔더니 너 왜 혼자 아닌데?”
라면서 발로 날 툭툭 차댄다. 이제 손버릇이 아니라 발 버릇도 나빠졌네.
“왜 때려!”
“이게 쓰다듬는 거지 때리는 거냐?”
“아, 그래? 그럼 나도 한 번 쓰다듬어 봐?”
다리를 번쩍 들었더니 이서호가 쪼르르 도망갔다. 저 자식을 잡아서 킥을 먹여주리라. 도망가는 이서호를 쫓아 숙소를 한바탕 뛰어다니다가 유찬 형한테 혼났다. 층간소음은 안 된다면서.
이서호 때문에 내 정신연령이 낮아진 것 같아.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 정이한한테 전화가 왔다. 혼자 있냐고 묻는 말에 형 빼고 다 있다고 했더니 다행이라면서 웃는다. 간단히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끊었다.
뭐야. 다들 진짜 이상하네.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이거 너무 간지럽잖아. 내 멤버. 내 사람들.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
최악이었던 사이가 이렇게 바뀔 수도 있구나. 어쩐지 기적 같았다.
***
데뷔 날짜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내 메인 퀘스트는 아직도 완료 못 했고, 주간 미션은 더더욱 손대기 힘들어져 거의 방치되어 버렸다. 사실 우리 타이틀곡을 더 완벽하게 하고 싶은 욕심에 솔직히 주간 미션은 우선순위에서 밀린 지 오래였다.
모든 멤버들이 모여서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새벽 3시쯤 숙소로 복귀해 눈만 붙이고 나와, 새벽 6~7시에 다시 연습실에 도착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런 날이 계속되다 보니 이대로 연습실 바닥에서 잠들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무엇보다 내 체력 관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극한의 피로 누적과 3시간 미만으로 뚝 떨어진 수면 시간이 문제였다. 체력이 10~50 사이를 간당간당하게 오가고 있었다. 틈틈이 열심히 쉬어주는데도 현상 유지가 안 된다. 곤란해.
“하온아.”
“……네.”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현 형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날 내려보고 있었다.
“숙소에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형들이랑 같이 갈래요.”
“저쪽도 다 뻗었어.”
강현 형이 뒤쪽을 향해 턱짓했다. 멤버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잠든 듯 미동 없는 세 사람은 시체 같았다. 지금 나도 저렇게 보이려나.
“그럼 저도 여기서 잘래요…….”
연달아 하품이 터졌다. 눈물을 슥 닦아냈더니 강현 형이 내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이거 정이한 전매특허인데……. 자리 잡고 누우려던 나는 얼떨결에 두 발로 꼿꼿이 서게 되었다.
“넌 집에 가서 자. 감기 걸려.”
“형들은요.”
“저기는 다 건강해.”
“저도 건강한데요.”
상태 이상만 아니면 건강함은 자신 있다. 체력이 바닥을 기고 있어서 안색이 나빠 보일 뿐이다. 상태 이상 터지기 전에 꼬박꼬박 쉬면서 아주 잘 관리하는 중이다.
“병원 또 가고 싶어?”
“아니요.”
“그럼 얌전히 따라와.”
“그래도 저 혼자…….”
“…….”
조용한 강현 형에게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 ……그래. 건강하지만 체력 관리는 해야지. 연습실 바닥에서 자는 것보다 침대에서 자는 게 훨씬 잘 차니까. 내일을 위한 배신이다.
“그럼 다 깨워서 데려가요. 왜 저만 가요?”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난대. 내가 깨워 주기로 했어.”
“응? 그럼 형 돌아와요?”
“어.”
내 옆에서 속도 맞춰 걷고 있던 강현 형의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저 혼자 갈게요. 형도 피곤할 텐데, 굳이 갔다가 다시 올 필요 없잖아요.”
매니저 형도 없는데 이 새벽에 웬 고생이야.
“지금 몇 신 줄 알아?”
“4시잖아요.”
“그래서 데려다준다는 거야. 너 혼자 못 보내. 형들 난리나.”
“우리 둘만 입 맞추면 되죠. 형이 바래다줬다고 할게요. 형도 쉬어야죠. 강철도 아니면서.”
“됐어. 따라와.”
아무리 돌아가라고 해도 말을 안 들었다. 아, 거참. 멤버들이랑 돈독해진 건 좋은데 과보호한단 말이야. 날 챙겨주는 마음은 무척 고맙지만 이런 건 미안하다.
“형, 내가 미안해서 그래요.”
“너 혼자 보내는 건 나도 불안해.”
“그럼 통화할까요? 저 숙소 가는 동안 계속?”
“아니.”
“그러면 택시 탈게요.”
큰마음 먹고 말했다. 버스 타고 10분 거리니까 택시 타면 과장 좀 보태 1분이면 숙소 앞에 도착할 것이다. 강현 형이 고개 저었다.
“택시 안 잡혀.”
“새벽인데 왜요?”
“거리가 너무 가깝잖아.”
“아.”
그런 문제가. 아니, 그러면 더더욱 같이 못 가지. 걸어가려면 30분은 걸린다. 강현 형은 갔다가 돌아오면 한 시간이다.
“형도 피곤하잖아요.”
그사이 엘리베이터에서 띵 소리가 났다. 나는 강현 형을 못 타게 하려고 문을 등진 채 온몸으로 막았다.
하루살이의 발악을 아는가? 손짓 한 번에 나폴나폴 이리저리 휘날리는 하루살이. 그게 바로 나였다. 질질 밀려서 엘리베이터에 태워졌다.
“아! 힘으로 이러기 있어요?”
“어.”
“불편한 제 마음은 어떡하라고요!”
“괜찮아. 내가 불편한 거 아니니까.”
“헐.”
“내 마음 편하자고 데려다주는 거니까 불만은 넣어둬.”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얌전히 엘리베이터 숫자가 바뀌는 걸 봤다. 1층까지는 금방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더니 먼저 시큐리티 게이트를 통과한 강현 형이 뒤를 돌았다.
“빨리 와.”
“네에,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