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45화 (45/320)

45.

“근데 하온아, 너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뭐요?”

“사생, 그거.”

유찬 형은 먹으랴 말하랴 바빴다. 말귀는 알아들었기에 실장님한테 들었었다고 대답했다. 형이 뭔가 깨달은 듯 “아, 그래서.”라고 중얼거렸다. 뭔데? 나도 알려줘.

“왜요?”

“정곤 형. 처음에 소개할 때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하셨잖아. 보통 매니저 소개할 때 할 만한 말은 아니라서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네. 그런데요?”

“너 사생 많이 붙을 상이라 일부러 특수부대 출신으로 뽑으셨구나, 싶어서.”

“에이, 저 때문에 그랬을 리가요?”

유찬 형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 말이 맞을걸?”

“고작 저 때문에 특수부대 출신 매니저를 고용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우리 막내야. 당연히 중요한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가끔 이상한 말을 한다니까. 스스로 네 가치를 낮춰보지 마.”

나는 조금 놀라서 유찬 형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내가 중요한 이유가 막내라서라니? 그런 하찮은 이유로? 차라리 메인 보컬이라 그렇다고 하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 런가요.”

“그래. 우리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건 의심하지 마. 넌 중요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널 소중히 여겨. 너 잘못되면 눈물 질질 짤 사람 많아.”

“형도?”

“어.”

그렇구나.

유찬 형은 민망한 말을 잔뜩 하면서도 뻔뻔했다. 그 당당한 태도에 도리어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기분만은 둥실둥실 떠올랐다. 내 가슴 속에 작은 나비가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

우리는 함께 아침 식사 뒷정리를 했다. 나는 유찬 형을 배웅한 뒤 짐을 챙겨 나왔다.

텅 빈 연습실을 쭉 둘러본 뒤 가방을 내려놨다. 모처럼 혼자 하는 연습이니 주간 미션이나 좀 해볼까, 는 지난주에 못 해서 이번 주 미션 없구나.

하필이면 쉬는 날이 패널티 있는 주라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는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

대신 메인 미션에 집중했다. 연달아 S 등급이 떴다. 멤버들이랑 할 때랑 다르게 간혹 A+ 등급도 나왔다. 군무 보너스가 여기도 있는 모양이다.

12시가 될 때까지 S+는 받지 못했다. 혼자 하는 게 더 익숙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혼자가 되니 허전했다. 끽, 끽하고 연습실 바닥에 운동화 부딪히는 소리가 하나뿐이었다. 거울 속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날 보니 처음으로 춤추는 게 재미없어졌다.

그래서인지 체력 회복 속도도 평소보다 느린 것 같다. 연습실 바닥에 벌러덩 누웠는데 데굴데굴 굴러오는 물통이 없다. 하온아,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도 없다. 바닥에 눕지 말라면서 챙겨주던 사람도 없다. 진하온, 벌써 힘드냐? 하면서 툭툭 귀찮게 건드리는 사람도 없다.

27년을 혼자 지냈는데 여기 와서 몇 개월 사람들이랑 부대꼈다고 이런 기분이라니. 심지어 다 같이 모여서 연습한 기간은 더 짧았다. 우습네.

사실 지금까지가 꿈이고, 이게 현실 아닐까. 난 여전히 혼자고.

갑자기 우울한 생각이 튀어나와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카페에 가서 브런치나 좀 먹고 돌아다녀 볼까?

***

거리로 나오니 사람들이 가득했다. 수많은 매장에서 쏟아지는 노래가 한데 섞여 있었다. 힐끔힐끔 날 보는 시선을 느끼면서 오랜만에 대표님께 캐스팅되었던 카페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누나를 찾았다. 카운터에 누나는 없었다. 그만둔 건가? 그러고 보니 내가 카페를 찾았을 땐 대부분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였다. 이 시간에는 없나 보다. 아직 날 기억하는지 궁금했는데 아쉽다.

브런치 세트에 아이스 초코는 어울리지 않아서 뭘 먹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딸기 라떼를 골랐다. 얼음 조금만 넣어 달라고 주문한 뒤 진동벨을 받았다.

완벽한 주문에 흡족해졌다. 휴대폰을 꺼내서 다른 아이돌 멤버 이름과 얼굴을 열심히 외우다 보니 진동벨이 울렸다. 커다란 쟁반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조심 들고 왔다.

막 먹으려던 참에 액정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디아스-이서호] (사진)

[디아스-이서호] 으히히히히히히!

고기반찬이 가득한 밥상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나저나 얘는 또 시작이네. 단톡방 지분율 1위는 이서호였다. 무음 사건을 만든 주범 녀석. 형들이 받아주는 걸 보다가 내 점심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나도 올려볼까?

괜히 휴대폰 카메라 렌즈를 문질거리다가 화면에 가득 담아서 찍었다. 조금 낯간지럽고 부끄러운데…….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찍은 사진을 올렸다.

[디아스-정이한] 하온이 밖에서 먹는 거야?^^

[디아스-박유찬] 웬일로 잘 챙겨 먹네. 잘했어.

[디아스-박유찬] (토실토끼가 쓰다듬는 이모티콘)

[디아스-이서호] 거기 회사 앞 카페 아니냐

[디아스-이서호] 친구없냐

[디아스-이서호]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흐느끼는 강아지 이모티콘)

[디아스-이서호] 잠깐

[디아스-이서호] 쉬는 날인데 연습하러 간거냐

[디아스-이서호] 독한늠

[디아스-이서호] (질린 얼굴로 기겁하는 강아지 이모티콘)

[나] 너가 안 하는 거야. 연습 좀 열심히 해.

[디아스-이서호] 열심히 하는데? 완죤 열심히 하는데?

[나] ㅎㅎ

[디아스-이서호] 와! 너 쫌 잘한다고 나 무시하냐?

[나] 조금?

[디아스-이서호] (분노해서 발 구르는 강아지 이모티콘)

[디아스-박유찬] 또 시작이네ㅋㅋㅋ

[디아스-박유찬] 너희 싸우는 거 보니까 옆에 있는 것 같다ㅋㅋ

[디아스-이서호] 형들! 막내가 나 괴롭혀ㅠㅠ

[디아스-이서호] (바닥에 눌어붙어 펑펑 우는 강아지 이모티콘)

[디아스-정이한] 하온이랑 서호 맛있게 먹어^^

[디아스-백강현] (사진)

[디아스-백강현] 나도 식당 왔어. 맛있게 먹어라.

[나] 형들도 점심 맛있게 드세요~

[디아스-박유찬] 응. ㅎㅎ

[디아스-정이한] 고마워. 너도^^

[디아스-이서호] 형들? 쟤가 나 괴롭힌다니까?

[나] 평소에 잘했어야지.

[디아스-이서호] (벽 부수는 강아지 이모티콘)

[디아스-박유찬] ㅋㅋㅋㅋㅋ

휴대폰 들여다보면서 혼자 피식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깨닫자 뻘쭘함이 몰려왔다. 괜히 얼굴에 열이 모이는 것 같아서 휴대폰을 뒤집어 놨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 내용이 궁금해서 결국 얼마 못 가 집어 들었다. 멤버들과 함께 점심 먹는 기분이었다.

***

카페에서 나와 다시 연습실로 향하려다가 주저했다. 혼자라는 기분을 또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나 원래 혼자서도 괜찮았는데.

북적북적 붐비는 거리에서 지나다니는 인파에 휩쓸리듯 그냥 걸었다. 사람 많은 곳 싫어했는데 이젠 혼자 있는 게 싫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변해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계속 걸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귀를 파고드는 익숙한 멜로디가 나를 잡아끌었다. 겨울 바다의 도입부였다. 기타 선율과 함께 첫 가사가 들렸다.

“짙은 겨울의 끝, 밀려드는 차가운 파도.”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곧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앞 사거리에 기타를 동여맨 남자가 높게 솟은 화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권세화!

이 세계에도 있었구나! 데뷔 전이었구나!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어린 얼굴의 권세화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달음에 달려가 맨 앞줄에 자리 잡았다. 겨울 바다는 겨울마다 차트에 올라가는 노래였다. 그런 만큼, 귀를 잡아끄는 매력적인 선율에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이 많았다.

잘 부른다, 노래 좋다. 목소리 너무 감미롭다, 같은 칭찬이 가득했다. 나를 칭찬하는 것마냥 괜히 내가 다 뿌듯했다.

겨울 바다 이외에 내가 기억하는 솔로 히트곡을 연달아 불렀다. 두 번 다시 못 들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들을 줄이야. 그것도 라이브로. 콘서트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었는데!

즐거운 시간은 빨리 끝나는 게 국룰이다. 어느새 준비한 노래가 끝난 듯 권세화는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열정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아, 좋았다. 또 듣고 싶다.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나는 혼자 자리에 남아 뒷정리하는 걸 바라봤다.

“아!”

영상 찍어 둘걸…….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아쉬움이 철철 넘쳤다. 괜한 입맛만 다시면서 권세화를 눈으로 좇았다. 그러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깜짝 놀라서 움찔하자 권세화가 날 보고 사르륵 웃는다.

“뭐 아쉬운 거 있었어요?”

“네?”

“그런 표정이길래요. 아까부터 제 노래 되게 좋은 표정으로 들어주셔서 눈에 띄었거든요. 다른 이유로도 눈에 띄지만.”

하긴. 표정 관리 못 하고 나도 모르게 헤벌쭉했을 테니까. 민망함에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하지만 내 최애곡 가수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뒷정리까지 미루면서.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어!

“아……. 처음에 부르신 노래, 혹시 제목이 어떻게 되나요?”

“겨울 바다예요. 자작곡이고요. 마음에 들었어요?”

제목도 똑같다. 전생의 날 위로해줬던 노래였다.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잔뜩 풀어진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무척. 멜로디도, 가사도 좋았어요. 처음에는 잔잔하고 차갑던 멜로디가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넓게 펼쳐지면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느낌이에요. ‘차가운 겨울 바다가 나를 지켜줘.’라는 가사랑 너무 잘 어울려요. 고립된 사람에게 손 내밀어주는 것 같은 그런 노래 같아요. 특히 마지막에 ‘겨울이 끝날 때까지 곁에.’ 부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는……. 아.”

열정적으로 감상을 전하다가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심지어 가사를 얘기할 땐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권세화가 눈썹을 들썩거리면서 벅차오른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채근했다. 계속 말해보세요. 아니,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정신이 돌아왔거든요. 이거 되게 민망한 상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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