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43화 (43/320)

43.

“오래 살았던 곳이라 혼자 있으니까 갑자기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자취방에 가 봤어요. 누워있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일어나니까 시간이 늦어서 허겁지겁 돌아온 거예요.”

이 정도면 그럴듯하다. 생각나는 대로 뱉었는데 쉬었다는 것도, 예정에 없던 일이라는 것도 어필했다.

“후. 전화만 받았어도 우리가 이렇게 걱정 안 했지.”

“……네.”

백 건이 넘는 부재중 기록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강현 형의 지분도 꽤 있었다. 설마 오늘 일찍 돌아온 것도 나 때문인가? 그럼 몇 시에 온 건데?

“형들은 몇 시에 왔어요? 저 때문에 일찍 온 거예요?”

“여섯 시. 점심에 밥 잘 먹고 있나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 잠들었나 싶어서 한 시간 기다리고, 또 한 시간 기다려도 계속 안 받으니까 돌아왔지. 그런데 넌 없지, 연락은 계속 안 되고.”

유찬 형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 도망간 줄 알았나? 이제 와서 내가 도망갈 이유가 없잖아.

“얘가 어디 갔나. 친구 만나러 간 거면 그나마 다행인데 밖에 나갔다가 또 쓰러졌을까 봐. 그래서 연락 안 되는 걸까 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이한이는 너 찾겠다고 병원 뒤지러 갔어. 서호도 기다리다 못해 뛰쳐나가기 직전이었고.”

우와…….

어떻게 상상력이 그렇게 뻗칠 수 있지? 퇴원한 직후에도 쌩쌩했고, 오늘 아침에만 해도 밥 잘 먹고 사과까지 해치웠다. 누가 봐도 건강 그 자체인데 내가 왜 쓰러져?

“……저 그렇게 허약하지 않은데.”

삑삐삑, 삑삐빅. 삐삐삐, 삑.

현관 도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빠르게 누르는지 계속 실패했다. 이윽고 비밀번호를 맞추고 문이 열리자 사색이 된 정이한이 있었다.

“하온아!”

허둥지둥 달려오더니 날 와락 끌어안았다. 봄 냄새가 물씬 나는 바람이 코에 들어왔다. 안도의 한숨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정이한이 고개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걱정했어……. 어디 갔었어…….”

아, 양심이 쑤신다. 죄책감이 가슴을 무자비하게 후벼 파고 있었다.

“자취방에 갔다가 깜박 잠들었대. 휴대폰은 무음이었고. 우리가 걱정한 일은 없었어.”

유찬 형이 나 대신 설명했다. 차가운 손이 내 양 뺨을 보드랍게 감쌌다.

“그랬어?”

확인을 원하는 물음에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네.”

“다행이다. 너 무사하면 됐어.”

부드럽게 휜 눈썹이 왜 이렇게 안쓰럽게 보이는 거지? 차갑게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애정을 전해오듯 내 뺨을 두들겼다.

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허겁지겁 돌아온 티가 역력한 정이한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런데도 타박 하나 없이 다행이라는 소리 따위나 하고 있다니.

정이한의 손등 위로 내 손을 겹쳤다. 떨리는 손을 꽉 잡아줬더니 정직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아니야. 그럴 수 있지. 내가 괜히 호들갑 떨었어. 너 입원했을 때 많이 놀랐거든…….”

정이한이 머쓱하게 웃었다. 바보 같기는.

“아니, 이게 다야? 우리 형들 진하온한테 약해서 큰일이야. 다들 아주 그냥 막내 손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생겼어.”

또 다른 바보가 혀를 찼다. 유찬 형이 “그러게.”하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끼익,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강현 형이 방으로 들어갔다. 저 연습 벌레 형까지 나 때문에 일찍 들어온 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어디서 쓰러졌을 리가 없잖아. 연락 안 된다는 이유로 이 중요한 시기에 연습도 팽개치고 돌아와? 그것도 멤버 전원이?

다들 나를 좋게 본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 크기가 내 예상보다 컸던 것 같다. 이제는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가득 쌓인 부재중 통화는 날 걱정하는 마음이 쌓인 거였다.

***

월요일에 있었던 나의 가출 사건은 실장님과 매니저 형의 애정 어린 잔소리로 완전히 끝났다. 우리 일상은 평소로 돌아갔다. 일주일 내내 연습실에 콕 박혀 있었다는 뜻이다.

여전히 주간 미션과 내외 중이고, 메인 미션은 S까지 나왔는데 S+는 아직 못 했다. 그래도 걱정은 안 됐다. 진짜 S+가 코앞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뚝딱이 정이한도 이제는 꽤 그럴듯하게 춤을 췄다. 우리가 완벽하면 완벽해질수록 S급이 잘 나왔다.

“얘들아! 잠깐 모여 봐~”

매니저 형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옹기종기 모였다. 야생곰반 집합!

“정곤 형 무슨 일이에요?”

“짠! 너희 컨포 실물 나왔다!”

“이게 이제야 나왔어요?”

이서호가 눈을 번쩍였다. 매니저 형의 손에는 우리의 컨셉 포토 카드가 들려 있었다.

“오! 차니차니 유찬 형~ 느낌 있넹.”

이서호가 유찬 형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유찬 형이 멋쩍어하면서 부끄러워하자 이서호가 한마디를 더 했다.

“고딩 느낌! 다행이야. 아저씨가 교복 입은……. 악, 형! 형! 우리 형 폭력 안 썼잖아!”

“넌 좀 맞아도 돼.”

“너무해에에에!”

철부지는 맞아야 철이 드는 법. 나는 한걸음 뒤에서 이서호를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매니저 형만 싱글벙글이었다. 사이 좋아 보이십니까…….

“이한 형 진짜 잘 나왔네요.”

나는 사진 중에서 정이한 사진을 골라내면서 감탄했다. 사납게 생긴 얼굴이 사진 속에서는 시크한 비쥬얼로 연출되어 있었다. 보정 기술인가? 아니, 잠깐.

“우리 근데 청량 컨셉 아니었어요?”

“응. 청량…….”

정이한이 다른 사진을 슬쩍 내밀었다. 수줍은 듯 웃는 사진 속 정이한은, 미남이긴 했지만 청량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이거 청량 맞아? 이상하다. 섹시 아니야? 춤출 때 표정 연기하는 거 보면 제법 청량 느낌이 나긴 하던데…….

“아하.”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끄덕였다. 생각을 바꿔보자. 애초에 인상 자체가 매서워서 이 정도면 나름 청량이라고 할 만하기도 하고. 뭐 어때. 청량이라면 청량인 거지. 정이한이 그렇다는데 반박하는 사람 있으면 날 먼저 쓰러트려야 할 거다.

청량 그 자체인 이서호의 사진은 그냥 넘겼다. 아주 개구쟁이가 따로 없다. 본인의 성격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귀여운 미소에 픽 웃고 말았다.

“야, 진하온! 너 뭐냐? 내 사진 보고 왜 그렇게 웃는데?”

“귀엽게 잘 나와서. 너답게 잘 찍었네.”

“내가 한 청량함 하지.”

“그래.”

“영혼 좀 담고 말해라?”

영혼 담았는데. 오해하네.

“난 하온이가 제일 잘 나온 것 같은데.”

유찬 형이 내 사진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 안에는 나 같지 않은 사람이 들어 있었다. 뺨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화사한 미소는 그냥 다른 사람이다. 당연히 뺨은 메이크업이고 미소는 만들어 낸 가짜다. 그러므로 저건 내가 아니다.

“청량보다는 청순 느낌인데.”

이한 형이 또 다른 사진을 보면서 말했다.

“청순이라뇨. 청량인데요……?”

“하온이는 선이 얇아서 그래. 춤출 때도 예쁘잖아.”

강현 형도 날 언급했다. 부끄럽네. 저 때 내가 잘 찍긴 했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려고 할 때였다.

“진하온 얼굴 빨개진다. 부끄럽나 봐. 으하핳.”

“시끄러워!”

“웨에, 웨에~ 진하온 부끄럽냐? 부끄러워? 얘 의외로 쑥맥이라니까.”

“……아니야.”

얼굴에 열이 몰리면 뇌도 함께 정지하는 건가. 이럴 땐 제대로 반박 못 하는 멍청한 두뇌가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다.

“봐요. 강현 형 사진도 잘 나왔잖아요.”

나는 말 돌리기를 선택했다. 강현 형 사진을 집어서 형 얼굴에 막 들이밀었다. 사진 속에는 냉미남인 듯 온미남인 강현 형이 통쾌하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이서호 보고 웃던 그 순간 찍은 거 맞지? 꽤 속 시원했나 봐.

“……치워.”

이 반응 뭐지? 사진을 똑바로 못 보고 시선을 회피한다. 그 앞으로 가져갔더니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목과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설마……. 형, 부끄러워요?”

이서호가 눈을 빛냈다.

“뭐야! 강현 형도 부끄럼타?”

“세상 사람들이 다 너같이 뻔뻔하진 않거든?”

나는 강현 형을 옹호하면서 사진을 치워줬다. 잘 나왔는데 본인이 부끄럽다면 치워줘야지.

“너희 사진 주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해. 필요한 만큼 가져다줄게.”

우릴 흐뭇하게 지켜보던 매니저 형이 말했다. 이서호가 두 손을 번쩍 들고, 깡충깡충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존재감을 발산했다.

“저요! 저! 엄마랑 형이랑 누나한테 갖다 줄래요!”

유찬 형도 슬그머니 부모님께 가져다드리고 싶다며 2종을 요구했다. 정이한도 1종, 백강현도 1종이었다. 나는 딱히 줄 사람이 없어서 거절하려다가 그냥 기념품으로 챙기기로 했다.

“저도 1종 주세요.”

“알았어. 가져다줄게. 이번 주말에는 각자 집에 갔다 와도 돼. 사진 드려야지. 다음 주부터는 쇼 케이스 때까지 쭉 연습해야 하고, 데뷔하면 음방 뛰어야 해서 가족들 만나기 힘들 거야.”

음방 일주일에 몇 번이나 나가려나. 라디오, 예능, 라이브 방송, 너튜브 스케줄도 잡히겠지? 신인이니까 그렇게까지 빡세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인지도가 쌓여야 여기저기 불러줄 테니까. 이번 활동기 보내면서 연기와 스킬 중에 뭐가 더 나을지 골라봐야겠다.

“정곤 형.”

“응? 유찬아 왜?”

“이한이는 지방이라 이틀로는 부족할 거예요. 하루라도 기간 더 줄 수 있어요?”

“아! 그랬지. 그럼 이한이는 금요일부터 휴가 줄게.”

잠시 고민하던 정이한이 고개 저었다.

“아니요. 저 주말 이용해서 다녀올게요. 안 그래도 제 실력이 제일 부족한데 휴가까지 더 받을 순 없어요. 최대한 빨리 다녀와서 연습할래요.”

“괜찮겠어?”

“활동기 끝나면 휴가 주실 거잖아요. 그때 또 보면 돼요.”

“그래, 알았다. 너희가 열심히 하는 만큼 나도 최선을 다해서 좋은 프로그램 많이 따올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우리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한 프로그램에 많이 나가야 인지도를 쌓을 수 있다. 팬덤을 끌어모으는 것도 인지도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정이한이 유찬 형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속삭였다. 유찬 형이 웃으면서 끄덕이는 걸 보니 고맙다고 말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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