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유찬 형이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저렴한 소파가 푹 꺼지며 그 진동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아침마다 전쟁이야…….”
“형, 이거 먹어요.”
덩치도 커다란 이서호와 씨름하느라 고생한 형을 위해 사과 조각을 내밀었다.
“고마워. 어휴. 하온이 보니까 힐링된다.”
“고맙긴요. 형이 깎아 준 건데.”
포크째로 내밀어서 맨손으로 남은 조각을 먹으려고 했는데, 반짝반짝한 시선 공격이 뺨에 콕콕 와 닿았다.
“……이한 형도 먹고 싶어요?”
“줄 거야?”
마지막 조각은 내 손에 들려 있다. 손은 깨끗하게 씻긴 했지만 찝찝하지 않을까. 물끄러미 내 손에 들린 사과 조각을 내려보고 있자 정이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너 먹어.”
“응? 괜찮아요?”
“응. 괜찮아.”
내 손 더럽다고 피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이건 인정이지. 솔직히 남이 맨손으로 만진 거 먹기 싫은 건 국룰 아닌가. 본인이 괜찮다니 남은 사과를 내 입에 쏙 넣었다.
아삭아삭.
“더 깎아 줄까?”
“갠차나요.”
사과 때문에 발음이 조금 씹혔다. 아침도 먹고 사과까지 하나 해치운 덕에 배가 빵빵했다.
“으……. 지금 몇 시야?”
목에 수건을 건 채 미적미적 욕실에서 걸어 나온 이서호가 하품을 쩍쩍해댔다. 세수까지 했는데 아직도 잠에서 안 깼나 보다. 정신 번쩍 들게 해 줘야지.
“9시.”
“헉? 안 돼! 이한 형! 왜 나 안 깨웠어어어!”
이서호가 뒤늦게 호들갑 떨었다. 멍청이. 형들이 아까부터 깨웠는데 네가 안 일어난 거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정이한이 “여러 번 깨웠어.” 하고 날 도왔다.
“아이씨! 진하온! 아직 8시 30분이잖아!”
“으하하하!”
깔끔하게 속여 넘긴 내가 신나게 웃어 젖혔다. 그래도 잠은 깼잖아. 이 형님한테 고마워하라고.
“서호 단순해서 어떡하냐. 9시인데 우리가 여기 앉아 있겠어?”
유찬 형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형도 말 참 예쁘게 해. 단순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하지만 그게 이서호의 매력이었다.
***
피곤해서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어서 엘리베이터 거울에 머리를 기댔다. 힘들 건 각오 했지만 내 예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피로도였다. 하지만 제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결과를 내려면 날 혹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덕분에 ‘죽어도 고(F)’ 스킬에 관해 몇 가지를 알아냈다. 그래도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었으니 만족스럽다.
끔찍했던 발열은 패널티였다는 걸 확인했고, 스킬 종료 후 떨어지는 체력에 따라 상태 이상 시간도 달라진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 체력 감소라는 건 기본적으로 내 정신적, 육체적 피로도가 반영된다.
그래서 같은 시간을 켜 놔도 내가 더 힘들면 상태 이상 지속 시간이 늘어났다. 이건 딱히 조건을 만들어서 테스트할 필요도 없었다. 상태 이상과 스킬 사용을 반복하는 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으니까.
마지막으로 1시간 테스트했을 때 상태 이상 지속 시간이 3시간이었다. 처음에는 1시간 쓰고 30분이었는데 말이지. 사용 후 결과를 완벽히 예측할 수 없는 이상 위험한 스킬인 건 틀림 없으니 남발할 수 없다.
뮤비 촬영 때는 운이 좋은 거였다. 체력 제한이 사라진 해방감 때문에 내가 무척 신나 있었으니까.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도중에 스킬 종료됐겠지.
“어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 스킬은 진짜 어쩔 수 없을 때 긴급 처방으로 사용해야 했다. 죽어도 현장에서 쓰러지기 싫을 때를 위한 스킬이었다. 즉, 상태 이상 미루기 용.
죽어도 고 스킬을 활용할 수 없다는 걸 알아내고 나니, 이번엔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체력 떨어지는 속도를 보니 나중에 일이 터져도 터질 것 같았다.
지금 고려해 볼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연기 또는 죽어도 고 스킬 등급 올리기. 스탯 등급이 높을수록 체력 감소량이 떨어진다. 뮤비 촬영 때 연기를 못 해서 고전하기도 했고, 예능 출연도 어쨌든 연기의 일환이니까. 즐거운 척, 재미있는 척.
진짜로 즐겁고 재미있으면 체력 감소는 낮을 거고,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연기해내야 하니 여러모로 연기 스탯은 도움 될 것 같았다.
또 다른 하나인 스킬 등급 올리는 건 모험이었다. 등급 올렸을 때 효과가 어떨지 모르니까. 하지만 F에서 E로 바뀐다고 다이나믹한 변화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노래랑 춤 더 올리고 싶은데…….
[E급 진하온(19) - 연습생]
체력: 120
매력: S (0/10,000)
노래: A+ (873/5,000)
춤: A (18/2,500)
연기: E- (1/2)
작사: F-
작곡: F
남은 포인트: 2,140
문제는 노래 A+, 춤 A를 달성한 이후 경험치 차는 속도가 무척 느려졌다는 거다. 덕분에 데뷔할 때까지 S- 스탯 올리는 건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여기에 연기까지 올려?
연기, 으. 연기. 상태 이상. 체력.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메인 미션 깰 때까지 생각해보자. 메인 미션 깬 뒤에 어디에 투자할지 골라야지.
그런데 현관까지 딱 한 걸음 남았을 때 갑자기 안에서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기세 좋게 열린 현관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 바람에 앞머리가 흔들거렸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와, 한 발자국 차이. 저거 맞았으면 기절 각이다.
“뭘 기다려! 난 갈 거야!”
범인은 이서호였나. 그리고 나는 숙소 비운 걸 걸렸고? 아니. 아직 11시밖에 안 됐는데 왜 돌아왔지? 새벽이나 돼야 들어오잖아?
뭐라고 말하지. 어디 갔다 왔다고 할까. 머릿속을 팽팽 굴리는 사이 이서호가 바락바락 외치면서 뛰쳐나왔다. 이서호는 안쪽을 노려보면서 달려 나왔고, 나는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억!”
한 걸음만 뒤에 있었어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한 걸음 차이로 현관은 피했으나 또 한 걸음 차이로 이서호와 부딪히는 건 못 피했다.
그 반동에 뒤로 몇 걸음 크게 밀려났다. 그나마 넘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이 딱딱한 바닥에 넘어졌어 봐. 얼마나 아팠겠냐고. 가뜩이나 체력도 부족한데.
“……진하온?”
“고라니야? 왜 앞도 안 보고 뛰어나와. 깜짝 놀랐네.”
“야이씨! 너 어디 갔었어!”
이서호의 목청이 아파트 벽을 때렸다. 분명 앞집에 들렸을 거다. 빨리 얘를 집어넣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유찬 형이 나왔다.
“하온이?”
나와 눈이 마주친 형이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맨발로 뛰쳐나온 형은 두 손으로 내 양쪽 어깨를 붙잡더니 날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폈다. 그러다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갔다 왔어? 할 말 많은데 일단 들어가자.”
이서호가 옆에서 “넌 이제 큰일 났다.”라고 깐죽거렸다. 항상 새벽에 돌아오니까 나름 일찍 온다고 온 건데 하필 오늘따라. 운이 없었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상태 이상이 기절이었고, 정신 차리니 3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뒤에 숙소로 돌아올 체력 회복하느라 못 움직였고. 그래도 11시니까 무조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앉아 봐.”
유찬 형이 나를 소파로 이끌었다. 분위기가 조금 딱딱해서 열심히 머리를 쥐어짰다. 변명 거리. 변명 거리……. 번뜩 떠오르는 게 없어서 난감하다.
거실을 살펴보니 강현 형은 팔짱 낀 채 벽에 삐뚜름하게 기대 있었고, 정이한은 보이지 않았다. 정이한은 작업실인가? 아니면 혼자 연습 중? 연습실에 남았다면 강현 형이 여기 있을 리 없는데.
“유찬 형, 봐주지 말고 제대로 혼내. 그래야 다음에 또 이런 짓 안 하지. 이한 형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저 녀석이! 이때가 기회라고 나를 사지로 밀어 넣다니. 일단 사과부터 하자. 약속을 어긴 건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속이려면 안 걸렸어야 했는데 걸렸으니 석고대죄다.
막 입을 열려고 했는데 유찬 형이 더 빨랐다. 나는 어정쩡하게 벌린 입을 합죽이처럼 꽉 다물어버렸다. 오늘 여러모로 타이밍 안 좋네.
“하온아. 너 어제 퇴원했어. 또 아플까 봐 오늘 쉬기로 한 거잖아. 그럼 숙소에 얌전히 있어야지. 몸 상태 좋아져서 나간 거면 연락이라도 잘 받던가. 우리가 얼마나 전화했는지 알아?”
전화가 울렸다면 내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기절했을 때 온 건가?
“죄송해요. 전화 온 거 몰랐어요.”
“몰랐어? 점심부터 계속했는데?”
뭐? 그럴 리가?
“안 울렸는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니 정말 부재중 전화가 수두룩하게 찍혀 있었다. 12시에 한 번, 1시에 한 번. 2시에 또 한 번.
3시부터 내가 숙소에 돌아온 지금까지 걸려온 전화만 자그마치 100건이 넘었다. 돌아가면서 골고루 많이도 걸었다. 이 정도면 집착 아닌가?
휴대폰도 멀쩡히 잘 켜져 있는데 왜 전화가 안 울렸지? 열심히 원인을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 시선은 저절로 이서호를 향했다. 저 녀석 때문이잖아!
“제가 이거 무음으로 돌려놔서 몰랐어요…….”
“뭐? 왜?”
“우리 단톡방이 시끄러워서…….”
멤버 단톡방이 생기니 이서호가 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유찬 형도 열심히 대답해주고. 그러다 보니 계속 울려대는 게 신경 쓰여서 무음으로 돌리고 까무룩 잊고 있었다.
“그런데 왜 무음으로 했어? 톡 방만 끄면 되잖아.”
그게 가능한 거야? 몰랐지. 애초에 단톡방에 초대된 게 고등학교 때 이후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땐 대놓고 날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초대한 거라 시도 때도 없이 테러를 받아야 했다, 나가도, 나가도, 나가도 계속 잡혀 들어갔다.
어찌나 부지런하던지. 그래서 휴대폰을 아예 꺼버렸었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생각해서 무음으로 돌린 건데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몰랐어?”
“네. 이런 거랑 안 친해요.”
머쓱해져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진하온 헛똑똑이 맞네. 야, 이리 내놔 봐. 내가 알려 줄 테니까. 또 전화 안 받기만 해 봐라.”
이서호가 끼어들더니 내 휴대폰을 가져갔다. 그리고 내 쪽에서 휴대폰 액정이 잘 보이도록 자세 잡고 어떻게 끄는지 알려줬다. 어이없을 정도로 쉬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잘 봤냐? 이걸 몰라서 우리를 다 뒤집어 놔? 너어는 진짜 혼나야 돼.”
나는 돌려받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뿐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연락 안 받은 이유는 알았으니까 됐어. 그럼 어디 갔었어? 왜 안 쉬고 나간 거야?”
“그……. 자취방에 갔었어요.”
“자취방?”
“네.”
일단 여기까지는 진실. 하지만, 이다음부터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