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41화 (41/320)

41.

팔에 꽂혀 있는 링겔, 하얀 침대, 어떻게 봐도 숙소가 아닌 천장. 병원이다. 백 퍼센트 들켰다. 다들 새벽에 잠든 데다가 오후부터 연습 시작이니 늦게 일어났을 텐데…….

어제 스킬 종료된 게 4시경이었으니까 못해도 10시나 11시 즈음까지 상태 이상이었다는 소리다. 최소 6~7시간인가? 지금 몇 시인지 확인부터 해야겠다.

“……지금, 콜록, 콜록.”

목소리를 낸 순간 목이 따가워서 기침이 튀어 나왔다. 정이한이 물 잔을 내밀었고, 유찬 형이 침대 옆 버튼을 누르자 작은 소음과 함께 헤드가 올라갔다. 이거 편하고 좋네. 하나 가져가고 싶다.

“이한 형, 고마워요.”

“아니야. 정신 차려서 다행이다.”

“진하온.”

성까지 붙여서 부르는 사람은 이서호뿐인데, 지금은 아니었다. 유찬 형이 심각한 얼굴로 날 불렀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혼자 앓고 있으면 어떡해? 우리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너 또 이럴 거야?”

이제는 말하기도 지치지만, 아픈 게 아니라 상태 이상이다…….

포기하자. 포기하면 편해. 어차피 설명해 줄 수도 없는 거 그냥 변명이나 떠드는 게 낫지.

“일부러 숨긴 거 아니에요. 저도 눈 뜨니까 병원이라 당황스러운데 지금 몇 시예요?”

유찬 형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손은 내 이마 위로 올라왔다. 손이 아주 차가웠다. 항상 따뜻했는데 왜 이렇게 차?

“두 시 좀 넘었어. 너 꼬박 하루 내내 앓았던 거 전혀 기억에 없어? 중간에 잠깐씩 눈 뜨는 것 같았는데?”

내가 눈을 떴다고? 전혀 기억에 없다. 상태 이상으로 정신 놓고 눈 뜨니 지금인걸. 그런데 하루 내내……?

“형, 오늘 토요일……맞죠?”

“일요일이야.”

“헐.”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금요일 새벽 4시부터 일요일 오후 2시까지라고? 이렇게 길게, 그리고 심각하게 상태 이상이 지속된 적은 없었다.

시스템 밸런스를 고려해 보면 스킬 쓸 때마다 이럴 것 같진 않고, 강제 종료 패널티라고 봐야겠네. 그럼 발열 증상이 심각했던 것도 패널티의 일종이었을까?

“그래도 열은 내려서 다행이야. 의사도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그러지, 약물 처치해도 안 듣지, 너는 정신 못 차리지. 우리가 어땠을 것 같아?”

“어……. 걱정?”

“그걸 왜 의문형으로 말해. 당연히 걱정했지.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꼭 먼저 말해줬으면 좋겠어.”

유찬 형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내 침대를 둘러싼 멤버들의 얼굴이 자꾸 시야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다들 초췌해 보인다.

설마 나 때문에 계속 병실을 지켰던 걸까? 꾀병이나 마찬가지인데. 시간 지나면 멀쩡해지는 건데…….

“……다들 여기 계속 있었어요?”

“당연하지.”

“저 깰 때까지?”

“그럼 우리가 어디가?”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말에 할 말이 뚝 끊겼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목이 막힌 것처럼 말들이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야, 진하온.”

이서호가 불퉁한 어조로 날 불렀다. 눈동자만 굴려서 쳐다봤더니 잔뜩 충혈된 눈이 보였다.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고 말해.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 라고도.”

“……너도 나 걱정했어?”

“그걸 말이라고 해? 잔뜩 물 먹은 종이처럼 흐느적거리는데 걱정 안 했겠냐? 너 숨넘어갈까 봐 무서워서 내가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또 울었어?”

이서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투명한 유리병에 채워지는 토마토 주스처럼 목부터 빨갛게 익어갔다.

“아씨이, 저거 다 나았네. 나았어!”

이서호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신경질 부리더니 파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야, 나 너한테 정들긴 했나 봐. 조잘대는 거 보니까 안심되네.”

“나는 이미 잔뜩 들었는데, 그 정이란 거. 이제 이서호 없으면 심심해.”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지.”

틱틱거리는 말투와 다르게 입꼬리는 올라가 있다. 정들었다니까 좋은가 봐. 나도 좋더라.

“그렇게 동생 이기고 싶어요? 형아?”

“아, 이럴 때만 동생이지! 됐어! 형들한테 사과나 해.”

“아.”

그래. 그렇지. 사과해야지. 그런데 이런 식으로 판이 깔리니까 좀, 너무, 민망한데…….

“형들…….”

내가 우물쭈물하자 유찬 형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전염되듯 이서호도 웃었고, 강현 형마저 바람 소리를 냈다.

“됐어, 하온아. 너 얼굴 빨개. 또 아플까 봐 겁난다.”

놀리는 어조가 다분히 섞인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형이 내 이마를 짚었다. 아까는 차가웠는데 이젠 따듯했다.

“응. 열은 안 나고. 부끄러워하는 거 맞네.”

이 형, 의외로 성격 나빠.

“아. 그걸 꼭 말해야 해요? 수치사할 것 같은데…….”

“사과는 됐고, 약속은 해 줘. 몸 상태 안 좋으면 꼭 말하겠다고.”

“네, 말할게요. 그리고……. 걱정 끼쳐서 죄송했어요…….”

뒤에 말은 아주 작게 웅얼거리듯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저절로 내 목소리 크기가 줄어들었다. 아주 온몸이 홧홧한 게 발열 상태 이상 급이다.

***

침대에서 편히 쉰 덕분에 어느 정도 체력도 찼겠다, 남은 건 퇴원뿐이었다. 하지만 멤버들의 강한 반발로 인해 침대에 꽉 묶여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얌전히 누워있는 사이 매니저 형이 무서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온이 정신 차렸어?”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썹이 날 찌를 것처럼 매서웠다.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잘못 맞으면 뼈도 못 추려!

“……미안할 게 뭐 있어. 다 내 책임이지.”

매니저 형은 여전히 사람 찌를 것 같은 눈썹을 한 채 서글피 말했다. 저게 지금 화난 표정이 아니라는 건가? 그럼 화났을 땐 얼마나 더 무서울까.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누운 채로 버튼만 눌러 침대 각도를 바꾸자니 영 민망해서 어쩔 수 없었다.

정이한이 재빠르게 나를 잡아서 베개를 받쳐줬다. 지금은 완전 건강하기 때문에 이런 배려는 필요 없다. 하지만 날 걱정하는 티가 너무 나서 그냥 받아들였다. 분위기도 가벼워졌는데 정이한만 계속 심각해서 토 달지 않기로 했다.

“퇴원 허락은 받았는데 조금 더 쉴래? 아니면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 하온이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매니저 형의 굳은살 잔뜩 박인 손이 내 손 등위에 닿았다. 울퉁불퉁하고 단단한 촉감은 처음 느껴봐서 신기했다. 이 손은 날 지켜주는 손이다.

“저 그럼 숙소로 갈게요.”

“응. 가자.”

그렇게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나려던 순간, 정이한이 내 무릎 밑에 팔을 넣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허둥거리던 나는 반사적으로 정이한의 목에 팔을 둘러 균형을 잡았다.

“……이한 형?”

“아직 환자잖아.”

“다 나았는데?”

“그래도 안 돼. 차에 데려다줄게.”

내가 말리니 소용이 없다.

“유찬 형…….”

“이한이 말 들어.”

이쪽도 단호하네.

“강현 형?”

“…….”

내 시선을 피하더니 조용히 병실 문을 열어 준다. 형 원래 안 그랬잖아요?

“이서호?”

“얌전히 굴어, 멍청아!”

나는 약하지 않다. 매우 건강한 사람이다. 체력 제한만 없으면 너희들보다 더 건강하게 뛰어다닐 사람이란 말이지. 억울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품에 안긴다는 게 생각보다 몽글몽글 포근한 느낌이라 입술만 삐죽거렸다.

“괜찮다니까.”

아무도 내 말은 듣지 않았다. 나는 그냥 정이한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몸을 맡겼다. 그래, 뭐 본인이 힘들지 내가 힘든가.

“우리 애들, 이렇게 사이좋고……. 얘들아, 내가 더 잘할게……. 내가 너희 전부 지켜줄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사소한 거라도 다 형한테 말해. 아픈 건 숨기지 말고. 알았지? 응?”

매니저 형은 감수성이 되게 풍부한 것 같다. 전혀 아닌 줄 알았는데 생긴 거랑 달랐다. 매섭게 치켜 오른 눈썹과 달리 속눈썹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반성하자. 겉모습만 보고 사람 판단하는 버릇 좀 버려야지. 전생에는 꽤 높은 정확도를 자랑했는데 말이지.

편견 어린 태도를 반성하기에 바빴던 나는, 그만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장소가 어디든 남한테 안겨 다니면 시선이 집중된다는 걸 말이다. 가뜩이나 비율 좋고 잘생긴 애들이 뭉쳐 있으면 시선 끌기 좋은데…….

정이한의 가슴에 머리를 박은 채 고개를 푹 숙였더니 유찬 형이 호들갑 떨었다.

“하온아? 왜 그래? 혹시 또 아파?”

“……다들 쳐다보잖아요. 부끄러워서 그래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빨리 풀어줬다. 유찬 형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애 취급을 하고 있어.

***

월요일 아침.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유찬 형이 친히 내어준 사과를 아작아작 씹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멤버들과 달리 나 혼자 여유로웠다.

“서호 아직도 안 일어났어?”

유찬 형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면서 나왔다. 거실에 안 보이는 걸 확인하고는 건넛방으로 가서 “이서호!”하고 큰 소리를 냈다.

그 사이 아침 식사 뒷정리를 끝낸 정이한은 내 옆으로 왔다.

“하온아. 오늘까지 푹 쉴 거지?”

“네. 그럴게요.”

“꼭 쉬어야 해.”

“네네.”

실장님이 오늘까지 쉴 것을 명령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우겨봤겠지만 오늘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멤버들은 새벽에나 들어올 테니, 그 사이 스킬 테스트하러 갈 생각이었다.

일단 내가 살던 원룸에 먼저 가봐야지. 실장님이 내 거취를 알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있을 확률이 높다. 이미 방 뺀 상태라면 돌아와서 방문 걸어 잠그고 해야지.

덕분에 멤버들 나가는 걸 지켜보느라 나 혼자 한가롭게 구경 중이다. 유찬 형에게 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 나온 이서호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졸려어…….”

저 게으름뱅이.

“이한아! 욕실 문 좀 열어줘.”

“응.”

정이한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팔을 반만 걸친 채 뒤를 돌아봤다. 유찬 형이 이서호를 욕실에 넣고선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강현 형과 나는 새벽에 일어나 혼자 준비하고 나가는 쪽이다. 가끔 시간 겹칠 때나 같이 움직이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연습실에 나갈 때 어떤 모습인지는 오늘 처음 봤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지켜보는 게 재밌어서 알쏭달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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