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39화 (39/320)

39.

괜찮긴 개뿔. 하나도 안 괜찮았다. 나는 결국 뮤비 촬영 이틀째에 ‘죽어도 고(F)’ 스킬을 사용해야만 했다. 상태 이상이 예약된 덕분에 착잡해졌다. 하지만 반대로 좋은 점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하온이 완전 쌩쌩하네.”

유찬 형이 놀라워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인지 컨디션이 좋아요.”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일단 체력에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집중력이 좋아졌다. 쉬어도 체력 회복되지 않는 것도 확인했으니 그냥 나를 마음껏 굴렸다. 어차피 상태 이상 걸리는 건데 본전은 뽑아야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데 원래 내 체력이 무척 좋다는 거다. 많이 뛰면 숨 차는 건 당연하고, 힘든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스킬 덕분에 제한 없이 뛰었더니 상쾌하고 기분 좋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노멀모드를 선택했다면 누릴 수 있었을 호사였다. 500이면 충분해 보이거든. 하지만 다시 선택하래도 하드모드 할 거다. 아니었으면 아직도 B였을 걸. 게다가 하드모드 군무 특성도 있잖아.

아이돌의 수명은 짧다. 느긋하게 스탯 올리고 있을 시간 따위 없다.

“하온이랑 이한이 씬 들어가자. 준비해.”

“네!”

접이식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겉옷을 벗어 등받이에 걸쳐두었다. 그리고 정이한과 함께 촬영장소로 향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들판에 솟은 풀들이 일제히 움찔거렸다.

2월 말인데 벌써 파릇하게 자라 있어 신기했다. 이거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온 거겠지만.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올 거 바다도 이쪽으로 가면 좀 좋아? 물론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제 정말 추웠거든.

정이한과의 들판 씬, 그리고 들판 촬영을 끝으로 야외 장면은 모두 끝났다. 새벽부터 진행된 덕분에 오후 2시에 모든 촬영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우리에게 쉴 시간은 없다. 곧바로 서울을 향했다. 실내 촬영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실내 촬영은 야외보다 훨씬 쉬었다. 일단 뛰어다니는 게 없었으니까.

멤버들마다 다른 컨셉으로 꾸며진 방이 다섯 개 있었다. 생각보다 세트장 규모가 크길래 조금 놀랐다. 상당히 돈을 많이 쏟아부은 듯했다. 바닥에 뿌려진 꽃까지 생화였다.

이걸 보니 회사가 어떻게든 우릴 띄울 작정이라는 게 새삼스레 와닿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 투자할 리 없으니까.

실내 촬영은 유독 감정 연기를 필요로 하는 장면이 많아서 어려웠다. 그만큼 시간이 질질 끌렸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내긴 해냈다.

모든 촬영이 끝나니 새벽 2시였다. 이제 내게 남은 문제는 상태 이상 하나뿐이다. 어차피 30분이면 끝나니까 새벽에 조용히 스킬 끄고 버텨봐야지. 그리고 바로 자고 일어나면 체력도 가득 차 있겠지?

시간제한 내용이 없어서 이대로 계속 켜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스킬 사용 중에는 경험치가 안 오르더라. 지금은 아쉽지만 끄고, 스탯 다 올리면 그때 쭉 켜놔도 되지 않을까.

어느새 벤은 우리 숙소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매니저 형은 깨어 있는 날 보고 살짝 놀란 뒤 멤버들을 깨웠다. 하나, 둘 꼼지락대면서 일어났다.

“너희 내일 연습은 오후부터니까 푹 쉬어. 일정이 강행군이었으니까 몸살 걸리지 않게 미리미리 약 먹어두고, 데뷔 전에 휴가 한 번 나오도록 이야기 중이니까 조금만 참자.”

“네에, 형……. 으, 진하온 너는 또 새벽에 일어날 거지?”

이서호가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하품 때문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마도?”

“체력이 좋은 건지, 흐아아암, 나쁜 건지 모르겠다니까.”

“얘들아,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자고 내일 이야기하자…….”

유찬 형의 눈꼬리에도 눈물이 맺혔다. 가장 체력 좋은 강현 형조차 연신 하품하느라 바빴다. 정이한은 꾸벅꾸벅 선 채로 졸았다. 일단 멤버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아무리 피곤해도 메이크업은 지우고, 샤워는 해야 했다. 땀 때문에 끈적거렸으니까. 씻을 순서 정하는 사이 유찬 형이 비타민을 가져와 나눠줬다.

비타민을 먹고 화장실 앞에 주르륵 앉아서 조는 멤버들을 구경했다. 나는 스킬 종료 후 예약된 상태 이상 때문에 마지막 순번을 자처했다. 나까지 씻고 나오니 다들 잠들어 있었다.

모든 멤버들이 잠든 걸 확인한 뒤 내 방의 문을 닫은 순간이었다.

<시스템: 사용자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잠시 후 ‘죽어도 고(F)' 스킬이 자동 종료됩니다.>

아, 이거 시간제한 있는 스킬이었네. 대충 50시간 전후로 켜둘 수 있는 건가? 그럼 스탯 다 올리면 자동 종료될 때까지 켰다가, 30분 상태 이상 보내고 또 켜는 식으로 써도 되겠네.

스킬이 종료되기 전에 재빠르게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시스템: ’죽어도 고(F)' 스킬이 종료됩니다.>

남은 체력이 쭉 떨어졌다. 순식간에 온몸이 무거워졌다. 차츰 떨어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탈력감이었다.

<시스템: 상태 이상 발생!>

여섯 가지의 상태 이상 종류가 휙휙 돌아갔다.

<시스템: 상태 이상 ‘발열’에 걸렸습니다.>

얼굴이 뜨끈해졌다. 동시에 뜨거운 숨이 훅훅 몰아쳤다. 와, 이거 장난 아니네. 열 때문에 현기증까지 동반했다.

현기증은 따로 있지 않냐고. 발열이라고 열만 나는 게 아니었다. 열로 인해 생기는 증상이 동반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난 춥고, 어지럽고, 속까지 메스꺼웠다.

이거 최악이네. 함정 카드였어.

나는 이불을 폭 뒤집어쓴 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와서 유찬 형을 깨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발열로 인한 오한 때문에 오들오들 떨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30분이 지난 것 같은데 상태 이상이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체감 시간이 늘어진다 해도 너무 길잖아?

뜨거운 숨을 헉헉 내쉬다가 어느 순간 기절한 듯 의식이 끊겼다.

***

박유찬은 오늘따라 유독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죽은 듯이 잔 덕분에 피로는 풀렸는데 전날 긴장감이 남은 탓에 전신이 뻐근했다.

한차례 기지개 켜면서 몸을 깨운 뒤 침대에 앉았다. 그제야 맞은편 침대 이불이 아직 동그랗게 솟아 있는 걸 발견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모로 누워있는 것 같았다.

‘하온이가 웬일이지.’

박유찬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늦잠 자는 진하온을 구경했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어서 일어날 때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다.

박유찬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귀여운 덩어리를 관찰했다. 자면서 움직이지도 않네. 원래 저렇게 웅크리고 자는 버릇이 있었나 보다.

진하온은 여러모로 대단한 아이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그만큼 실력이 확확 늘어서 멤버들의 자극제가 되어줬다. 요즘 분위기는 준재혁이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았다.

‘아직도 재혁이를 내보낸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하온을 합류시킨 대표님과 실장님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재혁도 멤버 전원을 하나로 모으지는 못했다. 매번 따로 놀던 정이한과 백강현마저 진하온은 하나로 뭉치게 했다.

박유찬의 눈에 비치는 진하온은 다른 사람의 속내를 기민하게 살필 줄 알았고, 그만큼 눈치도 빨랐다. 그래서인지 진하온이 해준 말은 유독 가슴 깊숙한 곳까지 따듯하게 와닿곤 했다.

자괴감 들어 힘들어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차리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위로해준다. 준재혁도 똑같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준재혁은 경각심을 일깨워 정신 차리게 하는 쪽이었다면, 진하온은 위로를 통해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줬다.

깨끗하고 맑은 눈동자로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그게 스스로 원하는 말인지도 몰랐는데 듣고 나면 ‘아, 나 이런 말을 듣고 싶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종종 틀어박히던 보컬룸에서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자신들의 태도 때문에 상처받았을 텐데도 진하온은 오히려 자신을 위로했다. 욕해도 된다면서 조금 과격하게 말하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도 진하온 나름의 배려였다.

나이에 맞지 않게 배려심 있고, 성숙하다. 하지만 또 순수하게 웃는 걸 보면 제 나이 같기도 해서 그저 예쁘고 귀엽게만 보였다. 이런 애를 왜 싫어했을까.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막내면서 누구보다도 의지가 되는 든든한 멤버였다. 나도 하온이가 의지할 수 있는 형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박유찬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줬다. 정이한이었다.

“형, 점심 먹을 거지? 하온이는? 연습실 갔어?”

“아, 응. 점심 먹어야지. 하온이는 아직 자.”

“진하온 잔다고?”

정이한보다 이서호의 반응이 더 빨랐다. 재밋거리를 찾은 것마냥 눈을 반짝거리면서 소파를 뜀틀처럼 뛰어넘어 왔다.

“웬일로 아직도 자? 깨울 거지? 내가 깨울까?”

뚜둑, 뚜둑.

손가락 관절에서 소리가 났다.

“손가락은 왜 꺾어.”

“간지럽혀서 깨우려고.”

“피곤했을 텐데 좀 더 자게 두자.”

정이한이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채로 진하온을 찾았다. 동그랗게 솟은 작은 덩어리를 보고는 “하온이 저러고 자?” 하고 물었다. 호기심 많은 이서호도 따라서 머리를 집어넣었다.

“되게 답답하게 자네. 하여간 이상한 애야. 야! 진하온!”

이서호가 대뜸 소리 질렀다. 박유찬이 이서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븝! 븝!”

“조용히 해.”

“형, 하온이 밥 먹이고 또 재우자.”

정이한이 일단 깨우는 게 좋겠다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밥은 먹어야겠네. 그래, 자더라도 먹고 자는 게 좋겠지. 박유찬이 동의하자 이서호 혼자 억울해했다.

“하, 원래 내가 막내였는데 형들 이러기야?”

“지금도 서호가 막내 같아.”

“하 씨, 내가 쟤보다 형인데!”

“그래그래.”

“우우.”

박유찬은 입술을 삐죽대는 이서호를 한껏 귀여워해 줬다. 순식간에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아! 형!”

방문 너머에서 정이한이 “하온아.”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깨는 얼굴 보려고 했었지. 박유찬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 이서호가 뒤를 따랐다. 진하온을 몇 번 흔들어대던 정이한이 이불을 들췄다.

진하온은 모로 누운 몸을 웅크린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이 심상치 않았다.

“하온아?”

정이한의 떨리는 손이 진하온의 붉은 뺨에 닿았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형! 하온이 몸이 너무 뜨거워……!”

겁에 질려 소리치는 목소리에 박유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