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하온아, 좀 더 높게 뛰어 봐.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가 너무 둔탁해!”
깃털이 아닌데 어떻게 깃털처럼 가볍게 뛰란 거지? 그것도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에서!
“인상 쓰지 말고, 즐겁게! 행복하단 얼굴로 웃어!”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 체력이 간당간당 하단 말이다. 하지만 촬영장에서 체력 떨어졌다고 쉬는 시간을 요구할 수 없는 법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장면을 찍어야 하니까.
솔직히 방심했다. 전생에서 아이돌로 활동했을 당시 뮤비 속 내 역할은 정말 쥐꼬리만큼이었다. 때문에 그만큼 빨리 끝났고, 힘들지도 않았다. 대부분 시간을 다른 멤버의 촬영을 기다리며 보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 데뷔곡의 뮤비 주인공은 나였다. 어쩐지, 멤버들 중 가장 촬영 장면이 많더라니…….
방심의 원인은 또 있다. 한동안 춤추고 노래하는 고정적인 루틴으로 생활해서 체력이 더디게 빠졌었는데, 그걸 어느 순간 착각한 것이다. 원래 체력 빠지는 속도가 이 정도였다고. 익숙해진다는 건 진짜 무서운 거다.
덕분에 내 춤 등급이 F였을 때 체력이 얼마나 빠르게 빠졌었는지 오랜만에 제대로 체감했다. 그것도 지금에 비하면 느린 편이었다. 체력이 10 이하로 떨어져서 위기감을 느꼈다.
<시스템: 연기 등급이 E로 변경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와중에 연기 스탯이 올라갔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나는 일부러 무릎이 꺾인 척 쇼하면서 모래사장에 엎어졌다.
상태 이상은 절대 안 돼!
일부러 더 크게 숨소리 내면서 헐떡거렸더니 감독님이 혀를 찼다. 꾀병. 꾀병을 부리자. 연기 경험치도 올라가겠지?
“애가 체력이 너무 안 좋네. 하온이 잠깐 쉬고, 다음 애 먼저 찍자. 서호야! 준비해!”
“네!”
멀리서 이서호가 대답했다. 그 사이 정이한이 잽싸게 달려와서는 담요를 덮어줬다. 땀 식으면 체온 떨어져서 안 된다나. 2월 말의 해변은 의외로 추워서 달게 받았다. 물론 계속 뛴 덕분에 지금은 아주 더웠지만.
“괜찮아?”
“힘들어요…….”
“업힐래?”
솔직히 혹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거절했다. 그 정도까지 가면 환자 취급받을 것 같다. 지금 꼴을 보아하니 스텝들 사이에서 저질 체력의 대명사로 불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거기에 환자까지 붙일 순 없다. 아이돌이란 말이야!
“야, 진하온. 괜찮아?”
“응.”
“하 씨, 넌 사람 신경 쓰이게 비실거리냐? 누가 종이 아니랄까 봐.”
“너나 잘해.”
“그럴 거거든!”
이서호가 날 힐끔힐끔 보다가 감독님의 두 번째 부름에 “네에!”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서 내게 던졌다.
“나 돌아올 때까지 입고 있던가. 너는 어떻게 된 게 바다에 오면서 겉옷도 제대로 안 챙기냐?”
한껏 나를 비아냥거린 뒤 이서호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팔을 문지르면서 부르르 떠는 걸 보니 녀석도 추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우리 데뷔일은 4월 6일로 정해졌다. 뮤비 촬영 복장은 그만큼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지. 구박하기는.
정이한이 패딩을 집어 들더니 본인이 덮어준 담요 위에 얹어준다. 내 어깨에 올라온 담요와 패딩을 꼭꼭 여미면서 임시 대기실로 향했다.
임시 대기실은 바람이 슝슝 통하는 천막 하나가 다였다. 그곳에 놓인 불편한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유찬 형이 난방기를 내 쪽으로 돌려주고는 컵을 내밀었다.
“따뜻한 차야. 몸 좀 녹여.”
“지금 추운 건 아니에요.”
“금방 추워질걸. 바닷바람 장난 아니야.”
그건 그래. 체온 유지를 위해 따뜻한 차를 감사하게 받았다. 뮤비 촬영은 이제 시작이었고, 나는 벌써 죽어가고 있다. 이따가 노을 질 때 모래사장에서 포토 북 촬영도 해야 한다. 큰일이야. 아주 큰 일이라고.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하나. 나도 모르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유찬 형이 내 미간을 검지로 톡 쳤다.
“미간에 주름 생겼다.”
아, 비하인드 카메라. 열심히 표정 관리하면서 아슬아슬한 체력을 몰래 관찰했다. 자리가 불편해서인지, 땀이 휘발되며 추위가 느껴져서인지 체력이 안 올라간다. 언제까지 쉬고 있을 수도 없는데 어떡하지.
체력 떨어지는 속도 줄여주는 스킬은 없나. 지금 가진 것 중에 쓸 수 있는 건 ‘죽어도 고(F)’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스킬, 유지 시간 같은 게 안 나와 있어서 조금 걸린다. 활성화된 이후로 제대로 테스트할 장소와 시간이 없었던 탓에 아직 효과가 미지수인 스킬이었다.
게다가 스킬 끝나면 무조건 상태 이상이라는 게 문제였다. 지금 체력 빠지는 속도로 보면 백 퍼센트거든. 뮤비 촬영 내내 스텝들이랑 단체로 움직이는데, 한 시간 도망쳐 있을 곳이 어딨다고…….
지금처럼 꾀병이 통할 땐 안 쓰는 게 좋다. 하지만 촬영하다가 상태 이상 터지는 것보다는 스킬 쓰는 게 백번 낫긴 해. 일단 킵해두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자.
“하온아, 괜찮아?”
매니저 형이 공수해 온 핫팩을 내게 건네면서 물었다. 얼굴에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 형한테는 해준 것도 없는데 우리한테 지극정성이다.
“형, 저 벤에서 쉬어도 돼요?”
비하인드 촬영 때문에 안 되려나.
“어! 물론이지. 데려다줄까?”
“아뇨. 차 키만 주시면 들어가 있을게요.”
나는 핫팩을 꼼꼼히 챙긴 뒤에 차 키까지 건네받았다. 해변 촬영 씬이 없는 정이한이 따라오겠다면서 일어났다. 혼자 보내는 게 걱정됐다면서 매니저 형도 흔쾌히 허락해줬다.
벤에 들어와 편한 곳에 몸을 뉘었더니 체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예능 촬영할 땐 어떡하지. 예능과 비교하면 뮤비는 나한테 우호적인 환경이다. 여기 있는 스텝들은 최소한 우리가 고용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예능은 얄짤없다. 결국 예능을 대비하려면 죽어도 고 스킬 활용이 관건이다. 스킬 테스트할 시간이 좀 필요한데. 어떻게 시간 낼 수 없으려나.
“하온아,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져요.”
“잠깐이라도 눈 붙일래?”
그래, 일단 자자. 수면만큼 체력 회복에 좋은 게 없다. 애초에 벤에 들어온 것도 자려고 한 거니까. 의자를 뒤로 젖혀 조금 더 편하게 눕자 정이한이 히터 온도를 조절했다.
“패딩은 입고, 담요는 줘봐. 덮어줄게.”
“그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어요.”
등에 깔린 담요를 끄집어내서 잘 덮었다. 나갈 줄 알았던 정이한이 내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형, 나 잘 건데 여기 있을 거예요?”
“응.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아……. 형, 작업실에 혼자 있을 때 외로웠어요?”
“집중할 땐 괜찮았어.”
집중 안 될 땐 외로웠다는 소리네. 그럴 줄 알았지. 혼자서 괜찮은 사람은 별로 없다. 괜찮았던 사람이라도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망가지기 마련이다. 외로움은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롭고 아픈 무기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또 작업실에 있다가 외로워지면 나 불러요. 언제든지 갈 테니까…….”
“……응. 쉬어.”
내 눈가에 따듯한 손이 덮였다. 빛이 차단된 덕분에 스르륵 잠이 몰려왔다.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잠들기 직전 오른손을 덮어오는 체온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게 뭐라고 안심이 되네.
***
“하온아, 일어나야 해. 서호 촬영 끝나간대.”
흔들흔들. 몸이 흔들렸다. 다정한 목소리가 날 불렀다. 가뜩이나 무거운 저음인데 나직하게 속삭이니 깨우려는 건지, 더 재우려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용은 분명히 전자였으니 일어나야지.
“으으. 뻐근하다.”
기지개를 쭉 켠 뒤 현재 시간과 체력을 확인했다. 1시간이 지났고, 체력은 50까지 올라 있었다. 생각보다 체력이 더 많이 회복돼서 조금 놀라웠다. 무슨 차이지? 집에서 잘 때보다 많이 찬 것 같은데?
“일어났어? 안색은 좀 좋아졌는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형이 내내 손잡아줬죠?”
“어? 응. 불편했어?”
“아뇨. 따뜻하고 좋았어요. 자세 안 불편했어요?”
“응. 괜찮았어.”
정이한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서두르자는 소리에 다시 촬영장으로 향했다. 이번엔 무조건 오케이 사인을 받고야 말리라. 체력 떨어지기 전에 끝내는 게 중요했다.
촬영장에 도착했더니 때마침 이서호의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빌렸던 패딩을 돌려주니 매서운 바닷바람에 옷이 마구 펄럭였다. 춥다…….
“하온이 준비됐어?”
“네! 이번엔 제대로 끝낼게요.”
“그래. 깃털처럼 가볍게 뛰고, 가볍게 착지해야 해. 알았지?”
“넵!”
발랄하게 대답했지만 여전히 깃털이 될 순 없었기에 걱정됐다. 뮤비 촬영이 딜레이 되는 건 내 연기 스탯이 형편없기 때문일까. 체력 관리를 위해서라도 연기 스탯을 올려야 하나.
나는 상큼하게 웃으면서 모래사장에서 뛰어다녔다. 깃털처럼 가볍게. 깃털. 깃털이다. 나풀나풀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
“지금 너무 흐느적거린다!”
“……넵!”
이거 아닌가 봐. 연기 스탯을 올리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자랐다. 차라리 노래 부르면서 춤추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어? 가만. 노래는 부를 수 있잖아? 어차피 뮤비는 후시녹음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아, 입 모양은 보정 안 되지.
대신 속으로 부르자. 내가 아는 가장 즐겁고 가벼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춘다고 생각했다. 해변에서 달리는 게 아니라 스텝을 밟는 거다. 내 몸이 가벼워 보이는 춤.
<시스템: 연기 등급이 E+로 변경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오케이! 좋았어! 아주 예쁘게 잘 찍혔어! 하면 되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감독님이 무척 기분 좋아 보이셨다. 빠르게 촬영을 끝낸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체력을 지켰고, 요령도 깨달았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기분이다.
“꼭 춤추는 것처럼 뛰네.”
누가 백강현 아니랄까 봐. 춤에는 귀신이다. 어떻게 알았대.
“춤춘다고 생각하면서 뛰었어요. 내가 깃털이 아닌데 어떻게 깃털처럼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어쩐지 움직임이 바뀌더라니.”
“이렇게 하니까 훨씬 낫네요. 형도 잘 안 되면 참고해요.”
“어.”
“야, 이제 우리 둘 찍는대.”
이서호가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아까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연기가 필요한 장면이라 걱정이 컸다. 얘는 연기에 소질 있다고 했으니 나만 잘하면 되겠지…….
과연, 예상대로 내가 계속 어색하게 구는 탓에 촬영이 딜레이되었다. 이것도 춤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이서호 얼굴이 보이니까 쉽지 않았다. 혼자가 훨씬 나았다. 뮤비 촬영 너무 힘들다.
정말 간당간당하게 성공했다.
“얘들아, 움직일 거야! 빨리 모여!”
매니저 형이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다음 촬영 장소는 근처에 있는 숲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또 차를 타고 이동해 강이랑 들판에서 찍는다. 야외 촬영을 끝낸 뒤에는 실내 촬영이 남아 있었다. 내 체력……. 그때까지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