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한 명씩 훑었다. 유찬 형은 생글거렸고, 정이한은 살짝 피했으며, 강현 형은 그냥 덤덤했다. 이서호는 찡긋거리면서 윙크해온 탓에 토할 뻔했다.
“왜 윙크해! 기분 나쁘게!”
“뭐? 얼마나 귀한 윙크인데 기분 나쁘대!”
“귀하긴 뭐가 귀해? 내 발치에서 굴러다니는 수준인데.”
“허, 얘가 또 황당하게 하네? 야, 너 안 되겠다. 내가 봐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봐줘.”
이서호가 소매를 걷어 올리면서 씨근덕거렸다. 그러면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 어쩌려고? 나는 무슨 짓이든 하기만 해 봐라, 하는 생각으로 턱을 치켜든 채 맹렬하게 쳐다봤다.
코앞까지 다가온 이서호가 돌연 입꼬리를 스윽 올리더니 개구지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헉! 야, 미쳤, 아하핳! 하지, 마, 억, 도와줘!”
옆구리가 붙잡혔다. 열 개의 손가락이 내 옆구리를 마구잡이로 기어 다녔다.
“너어는 간지럼 형에 처해야 해. 어디 건방지게 형한테?”
이서호의 팔목을 꾹꾹 잡아 눌렀는데 꿈쩍도 안 한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일념으로 나도 똑같이 간지럽혔는데 얘는 어째 아무렇지도 않았다. 전에는 간지럼 탔잖아! 이서호한테 꾹 잡힌 채 나만 발버둥 쳤다.
“하지, 히익, 하지 말라고오! 아, 항복! 항복!”
“형한테 잘못했냐?”
“어! 잘못했어!”
“후, 이제 형의 무서움을 알겠냐?”
“아! 쫌!”
“아직이야?”
멈춰가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저 몹쓸 손은 옆구리만 만족한 게 아니라 내 배까지 간질이기 시작했다. 상체가 확 수그러졌다.
“억, 도와줘요! 형형!”
아무나 도와 달라고 대충 뭉뚱그려서 불렀는데 잠잠했다. 다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우릴 구경할 뿐이었다. 결국 몇 차례나 항복을 선언하고, 이서호에게 형이라고 불러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굴욕적일 수가.
“음하하핫! 종이 인형은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냐?”
“헉, 헉, 아오, 진짜 야만인인가?”
“응? 내가 잘 못 들었나?”
이서호가 손을 다시 번쩍 들고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흔들거렸다. 난 잔뜩 기함한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살면서 폭력에 굴복해 본 적 없는데, 고작 간지럼 따위에 지다니…….
“자자, 서호야. 이제 그만해. 하온이 힘들어한다.”
이제야 말려주냐? 너무하네.
“오늘 연습도 일찍 끝났는데 특별히 맛있는 거 먹을까?”
“치킨! 피자!”
이서호가 손을 번쩍번쩍 들면서 깡충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찬 형이 먹고 싶다면 먹어야지. 다이어트 하느라 항상 풀만 먹는 게 안쓰러웠다.
우리 중에 유일하게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었다. 입이 짧은 정이한은 원래 마른 편이었고, 강현 형은 춤을 오래 춰서인지 몸이 아주 예쁘게 단단했다. 이서호는 성장기라 그런 건지, 체질인지 살이 안 찐다.
그리고 이서호한테 종이 인형이라고 놀림 받을 만큼 말라빠진 나는 살 좀 찌라는 소릴 듣고 있었다. 멤버들 중 유찬 형만 먹으면 먹는 대로 찌는 타입이란 뜻이다. 스트레스를 폭식으로 풀기도 해서 교주 나간 뒤 많이 쪘단다.
그런 유찬 형이 먹고 싶다면 먹어야지.
“저는 유찬 형 먹고 싶은 거에 한 표.”
적극적으로 형을 지지해준 뒤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뭘 먹을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대부분 이서호의 자아분열이었다. 치킨, 피자, 족발, 국수, 냉면, 삼겹살, 떡볶이 등등. 이 세상 먹거리란 먹거리는 다 부르려나 보다.
“다른 애들은 먹고 싶은 거 없어?”
“응. 난 아무거나. 하온아.”
정이한이 연습실 구석에 놓인 긴 의자 앞에 서서 날 불렀다. 품에 가득 안고 있는 패딩을 쭉 펼쳐서 깔더니 날 향해 손짓했다. 꼭 침낭 같은 게 딱딱한 바닥이랑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신해 보였다.
“하온아, 이리 와. 땀 식으면 추워.”
저게 날 위한 자리라고? 벌떡 일어나서 쪼르륵 달려갔더니 정이한이 의자를 탁탁 두들겼다.
“누울 거면 여기 누워.”
“형은?”
“난 샤워 좀 하고 오려고.”
“아하.”
체력 회복을 위해 일단 냅다 누우면서 물었다. 5분씩 쉬는 거로는 한참 부족해서 점심, 저녁 시간에 꼬박꼬박 채워줘야 했다. 춤 스탯을 A-까지 올렸으니 이마저도 버티는 거지,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 스탯 등급이 오를수록 체력 소모량이 적어져서 다행이다. 아니면 얼마나 빨리 빠졌겠어.
“응. 유찬 형 오기 전까지는 돌아올게. 저녁은 같이 먹어야지.”
“응? 사러 나갔어? 배달시킨 거 아니고?”
“못 들었어? 방금 포장해온다면서 가던데.”
“아, 응. 그랬구나. 알았어. 형 오면 전화할게.”
“고마워.”
정이한까지 사라지니 어느새 연습실에는 나와…….
나와?
나 혼자 남았네?
강현 형은 언제 나간 거야? 짐꾼으로 차출됐나? 정이한과 대화하느라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는 동안 잠깐 눈이나 좀 붙일까.
팔로 시야를 가린 채 조용히 있었더니 내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평소의 시끌벅적함이 거짓말 같았다.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들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연습실 문이 열리더니 소란스러움이 밀고 들어왔다.
“서프라이즈! 하온이 생일 축하해!”
“하온아! 생일 축하해!”
“진하온 생일 축하~”
“축하한다.”
상체만 반쯤 일으켜 멍한 얼굴로 멤버들을 봤다. 오늘이 내 생일이었나? 1월 30일. 나와 유연이의 생일.
케이크를 들고 있는 유찬 형을 필두로 줄줄이 날 향해 다가왔다. 케이크에 꽂혀 있는 초가 빛을 밝혔다. 정이한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나 케이크 앞에 섰다.
유찬 형의 눈짓에 생일 축하 노래가 시작됐다. 쓸데없을 정도로 화음이 기막히게 좋아서 헛웃음을 흘렸다. 나 모르게 연습이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하긴, 저들은 오래 함께 지냈을 테니 합이 안 맞는 게 이상할지도.
누군가에게 생일 축하를 받은 것도, 이런 이벤트도 처음이었다. 부드러운 민들레 씨가 날아 들어와 가슴 속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멤버들과 이렇게 지낼 수도 있구나.
신기하고 기쁘다. 행복하고 기분 좋았다.
벅찬 감정이 밀려 들어와 얼굴 근육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는 웃고 있었다. 일부러 만든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홍색으로 일렁이는 불빛이 그런 내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형들도 나만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야, 뭐해? 불 안 꺼? 소원 빌고 불 꺼.”
이서호가 헤죽거리면서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건방진 손등을 찰싹 내리친 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소원을 빌면서 바람을 뿜었다.
‘지금처럼만 지낼 수 있기를.’
열심히 불었는데 초 두 개가 간당간당 흔들리더니 다시 활활 살아났다. 제대로 안 끄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재빨리 다시 불었다. 생각보다 어려운 거였네.
“먹을 것도 가져왔지!”
이서호가 우다다 뛰어가더니 연습실 문을 엉덩이로 받친 채 허리를 숙였다가 다시 일어섰다. 허리를 세운 이서호의 양손에 먹을 게 가득했다. 복도에 숨겨뒀었구나.
“형들 고마워요. 오늘 내 생일인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유찬 형이 거드름 피웠다. 실장님한테 물어봤겠지. 뻔히 아는 답이었지만 그냥 모르는 척했다.
“배고파! 빨리 먹자!”
바닥에 주저앉은 이서호가 바스락거리면서 음식 비닐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성격 급한 이서호답게 북북 찢어내는 중이었다. 치킨, 피자, 떡볶이, 족발. 많이도 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 다섯이면 저거 다 먹을 수 있다.
“이서호 혼자 다 먹기 전에 형들도 빨리 앉아요.”
이서호 맞은 편에 앉으면서 손을 파닥거렸다. 유찬 형, 정이한, 강현 형이 나란히 앉아 젓가락을 뜯었다. 형들이 먹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에 가득 넣은 이서호가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몰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형이야!’ 같은 말이겠지.
“하온아,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
“네.”
나는 치킨부터 욱여넣으면서 대답했다. 이거 먹고 피자 먹어야지.
***
내 생일로부터 3주가 더 지났다. 주간 미션 포인트로 120점을 더 얻었고, 노래는 A+까지 승급했다. 이쯤 되니까 전생의 내 실력이랑 비슷해졌다. 드디어 내 귀에도 만족스럽게 들린다는 뜻이었다.
“정말 감탄만 나오네……. 우리 하온이 끝이 어디일지 두렵다. 두려운데 너무 행복해! 정말 쑥쑥 크는구나. 하온아, 너 전생에 콩나물이었니? 어쩜 이래?”
보컬 쌤한테 칭찬받았고,
“하온이 엄청 늘었네! 잘한다.”
칭찬에 박한 댄스 쌤한테도 칭찬받았다. 춤 스탯이 A로 올라간 덕분이었다. 이쯤 되니 춤도 전생에 내가 추던 것과 비슷해졌다. 전생의 내 스탯은 노래 A+, 춤 A였구나.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노래와 춤 경험치 상승 폭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지금까지는 한 번 걸었던 길 답습하는 개념이라 더 빨랐던 걸까?
특정 단계에 도달한 다음부터 느려진다고 치면 춤도 A+까지는 승승장구해야 할 텐데 그게 아니라서 이상했다. 뭔지 모르겠어.
시스템한테 물어봐도 답이 없었다. 데우스한테 1:1 문의 넣을 수도 없으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노력하는 거. 경험치 올라가는 속도가 느리면 그만큼 더 열심히 하면 된다.
또 한 가지 변화가 생겼는데 메인 미션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기존 미션을 완료했더니 주간 미션과 똑같이 더블 포인트 도전이 가능했다. 물론, 실패 시 패널티도 두 배였다.
<메인 미션>
─ 데뷔곡 노래와 춤을 같이 해서 S+ 등급 받기 (0/1)
O 성공 시 포인트 1,600 획득
O 실패 시 노래, 댄스 등급 2단계 하락
O 남은 기간: 데뷔 쇼케이스 전까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수락했다. 새로운 미션이 아닌, 기존 미션의 업그레이드 형식이라 거절하면 곧바로 완료, 수락하면 포인트 두 배다. 대신 800포인트는 못 받지만 두 배는 못 참지. 내가 왜 하드모드 하고 있는데.
하드모드 난이도 잘못 잡힌 거 아냐? 뭐가 어렵다는 건지 모르겠네. 라고 생각하면서 벤에 올라탔다. 오늘 일정은 뮤비 촬영이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나는 출발 전에 자만했던 걸 사무치게 후회하며 내 체력에 절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