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36화 (36/320)

36.

다시 연습이 시작되려던 때였다. 매니저 형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등장했다. 정말이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야.

“얘들아! 데뷔곡이랑 안무 나왔어!”

“드디어…….”

“우와! 듣고 싶어요!”

“안무 먼저 보고 싶은데요.”

제일 먼저 감동한 건 나였고, 오두방정 떤 건 이서호였으며, 안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당연히 강현 형이다. 유찬 형은 입을 벌린 채 벅차오른 마음을 추스르기 바빠 보였고, 정이한은 바짝 긴장해서 마른침을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다.

나는 슬쩍 정이한의 등을 톡톡 두들기면서 속삭였다.

“형,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요.”

“불안한 거 어떻게 알았어…….”

“난 항상 형 보고 있으니까.”

너 요주의 인물이거든. 고개 숙인 채 날 힐끔거리는 정이한의 뺨이 붉었다. 예전 버릇 나오는 걸 보니 여전히 불안한가 보다. 나는 정이한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토닥거렸다.

“나 믿어요. 형 잘하잖아요. 춤은 조금 뚝딱거리지만 뭐 어때. 그런 건 연습하면 다 돼요.”

솔직하게 말해줘야 내 칭찬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 아냐. 누가 봐도 뚝딱이인데 잘한다고 해봐야 소용없다. 내가 잘한다고 한 건 랩이었고, 정이한도 내가 뭘 잘한다고 말한 건지 알고 있었다. 우리만 알면 됐지.

“응. 열심히 할게.”

“도와줄게요.”

“고마워.”

물론 빡세게 가르치는 건 강현 형이 할 거다. 나는 그저 같이 있어 줄 뿐이다. 멘탈 유지보수 정도는 해줄 수 있고. 그 사실은 쏙 숨긴 채 웃어주자 정이한이 내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의지를 다잡는 걸 보니 아주 기특하다.

“둘이 뭘 속닥거려? 안 가?”

이서호가 팔꿈치로 내 허리를 툭툭 건들었다.

“가.”

나는 귀찮은 파리떼 쫓는 것처럼 손을 휘적거리면서 이서호를 치워냈다. 그리고 정이한을 데리고 실장실을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너희 요즘 열심히 하더라. 이제 데뷔라는 생각이 드나 봐?”

유찬 형이 민망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하온이가 워낙 열심이어야죠. 저희 다 하온이 영향받은 것 같아요.”

“맞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정이한이 웬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실장님은 잠깐 놀랐다가 곧 미소를 가장한 포커페이스로 돌아갔다.

“너희 이제 진짜 바빠질 거야. 우리가 곡 선정에 시간을 좀 많이 썼어. 그만큼 좋은 곡 가져왔으니까 너희들 기다리게 만든 점에 대한 사과는 타이틀곡으로 대신할게.”

실장님이 타이틀곡을 재생시켰다. 초반에는 느린 템포로 시작해서 하이라이트로 치달을수록 밝고 경쾌하게 바뀌어 갔다. 통통 튀는 기계음이 여러 겹 깔려서 상큼한 느낌을 줬다. 나도 모르게 박자에 맞춰서 고개를 까딱거릴 정도로 신나는 곡이었다. 이 노래 마음에 들어!

“훅 부분이 꽤 높네요.”

유찬 형이 염려 섞인 어조로 말했다. 가장 높은 음은 내가 맡더라도 그때까지 쌓이는 음도 꽤 높은 편이었다.

우리는 그룹이었고, 나 혼자 고음 파트를 모두 소화할 순 없으니 앞에서 받쳐줄 사람도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유찬 형이 리드 보컬이었기에 걱정되는 마음도 이해가 갔다. 라이브 하면서 흔들리지 않아야 하니까.

“응. 유찬이 너랑 하온이 믿고 선택한 곡이야.”

마치 ‘할 수 있지?’하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실장님은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를 믿는다고. 형도 알아차렸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선 “네,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순두부 멘탈을 일시적으로 두부 멘탈로 승급시켜줘도 될 법한 강한 어조였다.

“저도 자신 있어요.”

“좋아. 우리 보컬들은 문제없고, 곡은 마음에 드니? 하온이는 표정만 봐도 알겠고, 다른 애들은?”

“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는 사이 이서호가 제일 먼저 “좋아요!”하고 대답했다. 정이한은 조금 더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갔고, 나는 한 귀로 흘렸다. 작곡 용어 어려워.

끝도 없이 길어지는 설명에 미소 짓고 있는 실장님의 입꼬리가 살짝 떨려갈 때쯤 정이한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이한이 마음에도 들어서 다행이다. 강현이는?”

“신나네요. 후렴 부분 멜로디가 계속 귀에 맴돌기도 하고요.”

백강현도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노래에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꼽는다면 나는 훅, 즉 후렴구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클라이맥스가 머리에 남아야 ‘아, 이 곡!’하고 기억될 거잖아. 그런 의미에서 우리 데뷔곡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타이틀 곡명은 ‘Dear Friend’야. 친구와 우정의 소중함을 깨닫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친구와 우정. 전생의 나와는 인연이 없던 단어지만 지금은……. 나는 실장님에게 집중하는 멤버들을 슬쩍 둘러봤다. 나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아!

응? 잠깐. 그런데 왜 뮤비에 인형 폴라로이드가 필요했던 거지?

“실장님.”

“응. 하온아.”

“저 컨포 촬영할 때 인형 분장하고 사진 찍었는데 뮤비 때 쓴다고 들었거든요. 뮤비 내용 물어봐도 돼요?”

실장님이 양쪽 입꼬리를 가득 끌어 올렸다.

“자세한 건 비밀이야. 열심히 생각해보렴. 나중에 너희 뮤비 보는 영상 찍을 거거든.”

“아하.”

“그런데 너희 중에 혹시, 컨포 촬영장에서 비하인드 촬영하는 카메라 본 사람?”

우리는 멀뚱멀뚱 서서 서로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일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더니 실장님이 기뻐하셨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진짜 몰랐구나. 어쩐지 자연스럽더라니. 나는 너희가 연기에 재능있는 줄 알았어. 눈치 없어서 다행이다.”

네? 제가 눈치 백 단인데요? 이건 조금 억울하다. 촬영장에서 나는 멤버들 신경 쓰느라 바빴다. 그 탓에 다른 일은 조금 내 관심 밖으로 미뤄뒀을 뿐이다.

예전이었다면 분명 알아차렸을 텐데!

무의식중에 전생과 비교했다는 걸 깨달은 나는 방금 전 떠올린 생각을 빠르게 취소했다. 눈치 없단 소리 들어도 지금이 훨씬 좋다. 돌아갈 거냐고 물으면 절대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너희 일정표도 나왔어. 스케줄 타이트하게 잡았는데…….”

모두의 안색이 흐려졌다. 나와 백강현만 반짝반짝했다. 희비가 명백히 드러나는 우리 얼굴을 보고 실장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너희 하는 것보다는 덜 할 거야. 너희들 열정이 우리 머리 위에 있더라고.”

이번엔 반대였다. 세 명이 반짝였고 나와 강현 형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군. 공식 연습 끝난 뒤에 혼자 하는 수밖에. 강현 형은 같이 해주겠지.

실장님은 우리에게 일정표를 보내주셨다. 중간에 뮤비 촬영 일정이 끼어 있었고, 그때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풀 연습이었다. 무척 만족스럽다.

***

“이한아, 표정!”

정이한이 또 지적받았다. 계속되는 연습에 체력이 날아간 게 원인이었다. 정이한은 헐떡거리면서 손등으로 땀을 훔친 뒤 억지로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표정에 신경 쓰니 이번에는 안무가 무너졌다.

“안 되겠다. 5분만 쉬었다가 하자.”

휴식 선언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진 나는 데구르르 굴러오는 물통을 주웠다. 이제는 습관처럼 물통을 굴려주는 강현 형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다.

“혀엉, 나도 물…….”

애벌레처럼 바닥에서 꼼지락거리던 이서호가 팔을 뻗었다. 백강현이 발끝으로 물통 하나를 툭 차서 굴려줬다.

“진하온은 손으로 주고, 나는 발이야?”

하여간 저 투덜이. 투덜 대면서도 뚜껑을 따서 입에 쏟아붓는다. 누워서 마시느라 뺨을 타고 물이 줄줄 흘렀다.

“야, 서호 형. 바닥 미끄러워서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주의 주자 이서호가 옷으로 연습실 바닥을 슥슥 문질러 닦았다.

“야는 왜 붙이냐? 형님한테.”

“철 좀 들어야 내가 형 취급해주지.”

유찬 형이 키득거리면서 내 편을 들었다.

“서호보다 하온이가 더 형 같긴 해.”

“유찬 형! 너무해!”

이서호가 앵앵거리면서 바둥거렸다. 힘이 넘치네. 저거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거 다 거짓말이다. 관심 끌려고 그러는 거다.

나는 정이한을 찾았다. 거울에 기댄 채 주저앉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물도 안 마신다.

슬쩍 옆으로 가서 내 물통을 내밀었다. 날 한 번 보고, 물통을 한 번 본 뒤에야 가져갔다. 꿀꺽꿀꺽 요동치는 목울대를 잠시 감상하다가 다시 물통을 건네받았다.

“고마워.”

이제는 제법 잘 웃게 된 정이한이 날 보고 빙그레 웃었다. 며칠째 지적만 받는 중이라 시무룩해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기색은 없다. 다행이네.

나는 정수기로 이동해 비어버린 물통을 채우고, 꼼꼼하게 뚜껑을 닫았다. 나중에 강현 형이 또 굴려줄 테니까 잘 확인해야 한다. 물통 모아두는 곳에 갖다 뒀더니 짝짝, 박수 소리가 났다.

“자, 얘들아. 이제 일어나자.”

휴식 시간이 끝났다. 칼같이 딱 5분만 지나 있었다. 내내 시계만 본 것 같은 정확함에 매번 놀란다. 진동 알람이라도 맞춰두시나.

우리는 대형을 맞춰 서서 반주에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래도 같이하고 싶은데 정식 트레이닝 시간에는 못 하게 하더라. 그건 다음 스텝이라면서 말이지. 그래서 안무와 표정 연기에 더욱 집중했다.

춤 스탯이 A-로 오른 뒤라서 처음 댄스 쌤이 나를 봤을 때 놀라셨다. 오디션 봤을 때 흐느적대던 애가 맞냐면서. 내내 보컬만 연습한 줄 알았는데 춤은 언제 이렇게 했냐고.

그만큼 거울 속의 내 모습은 꽤 봐줄 만했다. 그런데도 강현 형이랑 비교하면 여전히 난 뚝딱이었다. 강현 형 댄스 스탯이 아마 S+ 정도이지 않을까.

연습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이 순삭된다. 해 질 무렵이 되자 이서호가 배고파하기 시작했다. 쟤는 항상 배고픈 애라서 무시했지만, 다른 멤버들도 동의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밥 먹을 시간 맞구나.

“쌤!”

유찬 형이 댄스 쌤에게 눈치를 보냈다. 저녁 먹고 하자는 뜻이다. 쌤은 우리를 힐끔 보더니 반짝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저 얼굴은 퇴근할 때나 보던 건데? 저녁 먹고 계속하는 거 아닌가?

“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저녁 맛있게 먹고, 내일 보자.”

“네!”

응? 쌤 어디 가세요? 멤버들 반응 보니 나 빼고는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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