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형.”
“으, 응.”
“그냥 대놓고 봐도 돼요. 왜 눈치 보고 있어요?”
나는 팔랑거리는 속눈썹을 연신 깜빡이면서 웃었다. 정이한이 무의식중에 뺨을 긁으려고 하길래 내가 덥석 잡았다.
“메이크업하고 얼굴 만지면 안 돼요.”
“아, 으응. 그렇지. 근데 나 촬영 끝났는데…….”
“우리 단체도 찍어야 하잖아요.”
“아! 알았어.”
정이한은 열심히 고개까지 끄덕였다. 귀엽기는.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머리가 망가질까 쓰다듬어 줄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대신 나는 얼굴을 바쳤다. 자, 마음껏 보세요. 두 명이 좋아하면 기쁨도 두 배지.
날 보는 정이한을 내버려 두고 이서호를 구경했다.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촬영 분위기가 꽤 발랄했다. 사진 작가님도 이서호를 굉장히 귀여워하셨다. 진짜 어딜 가나 사랑받는 인간이었다. 이서호에게도 스탯이 있다면, 분명 매력 등급이 S+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강현 형. 형은 묵묵히 순서를 기다리다가 정말 묵묵히 촬영했다. 활짝 웃으라는 말에 삐거덕거리는 미소를 만들었다. 박장대소하던 이서호가 노려보는 강현 형의 매서운 시선에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촬영 중인 강현 형이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대놓고 깐족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넘어진 순간, 내내 경직되어 있던 강현 형이 그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고소해 보이는 얼굴이다. 셔터가 미친 듯이 눌렸다. 어떻게든 해결됐네.
강현 형까지 끝났으니 나를 부를 줄 알았는데 스텝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촬영장 세팅이 바뀌고 있었다.
먼저 바닥에 러그가 깔리고, 그 위에 검은색 철제 침대가 새로 놓였고, 천장의 레일이 움직이더니 하얀색 천이 하늘하늘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쿠션이 놓였을 때 매니저가 나를 불렀다.
“하온이 들어가.”
폴라로이드 사진이 필요하다면서 카메라는 그대로였다. 역시 사기의 업계. 그럼 그럼. 폴라로이드 사진으로는 사람을 인형처럼 둔갑시키기 어렵겠지. 메이크업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겠어?
“누우면 눈 감고, 서면 뜨는 거야. 표정은 기본적으로 무표정.”
“네.”
침대에 누우라는 말에 누웠다. 발치에서 분주하게 장비를 세팅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쪽 팔을 올리라고 해서 올렸고, 침대에 반만 걸치고 상체를 거꾸로 떨어트리래서 묘기도 선보였다.
이때 눈을 떠야 하는지 감아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래서 반만 떠봤더니 바로 그 표정이라며 좋아하셨다. 좋아하면 된 거지.
헤어와 메이크업 수정을 한 차례 걸친 뒤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이어지는 촬영에서는 거대한 선풍기 한 대가 새롭게 들어왔다.
바람이 마구마구 흩날렸는데, 하필이면 긴 인조 속눈썹 하나가 내 눈을 찌르기 시작했다. 눈이 따가워서 눈물이 줄줄 샜다.
이거 다시 가야겠는데. 눈치 보여서 진땀 빼고 있을 때였다.
“캬! 너무 좋다! 남돌 피, 땀, 눈물 좋아하는 팬들 많잖아? 하온이 우는 거 너무 예쁘다. 이건 나중에 비하인드 컷으로 풀어도 좋겠는데?”
결국 쓸모없는 사진이라는 소리잖아. 나는 촬영이 잠깐 중단된 사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안 빠져. 메이크업 때문에 내 손으로 만질 수도 없어서 괴로웠다. 도와줘요!
“하온아, 눈 아파?”
유찬 형이 내 상태를 긴밀하게 알아차리고 물어왔다. 꽤 큰 목소리였다.
“속눈썹에 찔려서요…….”
곧장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달려왔다. 눈에 인공눈물을 넣어주신 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물으셨다.
“어때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누나!”
“고맙긴.”
괴로움에서 해방된 상쾌함에 방싯방싯 웃었더니 누나가 뺨을 붉히면서 웃었다. 빠르게 메이크업 수정을 마친 뒤 이리저리 날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사이 예쁘다는 말을 몇 번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후에도 내 원맨쇼는 계속됐다. 몇 장이나 찍는 건지, 체감상 컨셉 포토보다 훨씬 많이 찍은 것 같았다. 무표정 버전으로 쭉 찍고, 그다음에는 웃는 얼굴 버전으로도 찍었다. 하얀 천은 왜 저렇게 치렁치렁 내렸나 했더니 나한테 감으려던 거였다.
마지막에 가서는 기어이 천이 엉켜버렸다. 스텝들이 달려와 낑낑거리는 나를 풀어주는 해프닝을 마지막으로, 훈훈한 분위기에서 촬영이 끝났다.
“하온이 너 되게 잘한다. 진짜 인형 같았어.”
메이크업을 바꾸는 내 옆에 와서 유찬 형이 날 칭찬했다.
“형, 그런 소리 하면 민망해요.”
언제 왔는지 정이한도 말을 덧붙였다.
“하온이 멋있었어……. 대단해…….”
“이한 형은 왜 그래요…….”
칭찬 세례라면 이미 작가님한테 충분히 받았다. 계속되는 추켜세우기는 나를 민망하게 할 뿐이었다. 면역력 없다니까.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게 느껴져서 끙끙 앓았다.
메이크업을 지워주던 코디 누나는 그런 우리가 귀엽다면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이한의 기 세 보이는 얼굴이 귀엽게 보인다니, 다행이다.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려야지. 부끄럽다.
다음은 야외에서 찍는다고 했지? 옷을 또 갈아입어야 하는 건 귀찮지만 어쩔 수 없지. 나 하나 때문에 이동했다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올 순 없잖아.
***
컨셉 포토를 찍고 난 후에도, 우리의 하루는 평소와 똑같이 흘러갔다. 그래도 아주 조금의 변화가 있다면 연습량이었다. 나는 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면서 열심히 경험치를 올렸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다른 멤버들도 조금씩 내 패턴을 따라오고 있었다. 특히 강현 형은 나와 경쟁하듯 새벽 기상을 하고 있었다. 아침잠 많으면서 일어나는 게 대단해 보였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죄다 의외지만 가장 의외의 행보를 보이는 사람은 정이한이었다. 작업실에 틀어박히는 게 아니라 나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유찬 형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지금 우호도를 확인해 보면 분명 ‘좋아함’으로 바뀌어 있지 않을까. 그런 근자감이 저절로 생길 정도로 나를 따랐다.
이따금 정이한은 나를 작곡실로 데리고 가서 작업한 곡을 들려주기도 했다. 곡의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고, 완전히 사라졌던 거친 면도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정이한의 자존감이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라 나는 기쁘게 웃으면서 마구마구 칭찬 세례를 퍼부어 주었다.
강현 형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그래도 멤버들이 모두 모여 댄스 연습하는 게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물론 나처럼 가르침을 청한 멤버들을 곤죽으로 만드는 것도 예사였다.
가장 괴로워한 건 정이한이었다. 그러게 평소에 좀 열심히 해뒀어야지. 우리 팀 대표 뚝딱이 낙점이다.
이서호는 쓸데없이 부지런해서 자기도 열심히 하게 만든다면서 투덜거렸다. 다 같이 열심히 하면 좋은 거지 투덜거릴 일인가.
그래서 솔직하게 그동안 게을렀던 너를 반성하라고 친절히 말해줬다. 이서호는 발작했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남이 기껏 상냥하게 문제점을 짚어줬더니.
제일 신난 건 유찬 형이었다. 연습생 기간이 다 합해서 8년이나 되는 형은 데뷔를 코앞에 둔 상태에서 두 번이나 엎어지고, 소속사를 옮긴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올해 스물셋이라 여기서 엎어지면 데뷔가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아티스트 계약한 후에도 평소랑 똑같았었다. 그저 하던 대로 연습에 연습, 또 연습할 뿐이었다. 나도 그거 무슨 상태인지 안다.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거다.
그런데 컨셉 포토를 찍고 나니 실감이 났나 보다. 거기에 더해서 해보고 싶다던 작곡도 정이한이 조금씩 가르쳐주고 있으니 얼굴에 윤기가 반질거렸다.
나는 떨어진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구석에 앉아 물을 마셨다. 춤을 추느라 바닥과 끽끽거리며 마찰하는 네 사람의 운동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왜인지 내가 다 뿌듯해졌다. 저 속에 내가 설 자리도 있다는 게 신기했고.
다 같이 연습한 덕분에 새로운 특성도 알게 됐다. 요즘 춤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는데 알고 보니 군무 가산점이 있었다. 하드 모드 전용 특성이라면서 알람이 떴을 때 쾌재를 불렀다. 이거 모르고 포인트 썼으면 아까울 뻔했다!
물론 24시간 내내 유지되는 건 아니었고, 완성도에 따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긴 했다. 하지만 이런 버프는 꿀이지. 완전 공짜잖아.
나는 뿌듯하게 그동안 노력한 내 결과를 들여다봤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E급 진하온(19) - 연습생]
체력: 120
매력: S
노래: A (1245/2500)
춤: A- (654/1500)
연기: E-
작사: F-
작곡: F
남은 포인트: 2,020
데뷔 전까지 노래를 S-까지 올리고 싶은데 갈 길이 멀다. 무엇보다 A+에서 S-로 올리기 위해선 자그마치 5,000포인트가 필요했다. 목표를 이루려면 지금보다 더 연습에 매진해야 했다.
가뜩이나 춤 연습 시간이 늘어난 탓에 노래 경험치까지 챙기려면 잠을 포기해야 했다. 어차피 잠은 체력 채울 정도면 충분하니까 더 일찍 일어나면 되겠지.
가자. 할 수 있어.
“야, 진하온. 뭘 혼자 히죽거리면서 웃고 있냐? 아직 체력 딸리냐?”
이서호의 건방진 도발에 무릎을 짚고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아니. 이제 출 거야.”
“체력도 약한 주제에 꾸역꾸역 노래 부르니까 더 빨리 지치지.”
“난 라이브 할 거거든. 미리 연습해 둬야지. 다른 멤버들 깔끔하게 라이브 할 때 너 혼자 헐떡이는 소리 라이브로 들려주기 싫으면 더 노력해야 할걸?”
“내 체력이 너보다 좋거든!”
아니던데. 나는 시스템이 쉬라고 해서 쉬는 거다. 어디까지나 시스템 때문이란 소리다. 체력 제한만 아니었다면 훨훨 날고 있었을 거다.
“하온아, 조금 더 쉬는 게 낫지 않아?”
정이한이 불안한 얼굴로 날 봤다. 난 아주 멀쩡한데 왜.
“다시 할 거예요. 체력 다 찼어요.”
“얼굴 하얀데…….”
“끄떡없어요. 형도 나 보지 말고 연습해요.”
오늘 군무 보너스가 아직 안 나왔다.
“강현 형, 저희 맞춰서 한번 해보죠?”
내 외침에 세 명이 움찔했고 강현 형은 활짝 웃었다.
“노래 처음부터 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