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정이한이 연습에 합류하고 며칠 후, 우리는 벤에 실려 샵으로 향했다. 매니저는 우리의 첫 데뷔 앨범 컨셉이 청량이라고 알려줬다. 대부분 아이돌 그룹의 데뷔 컨셉과 비슷한 노선이었다. 딱히 모험적이지도 않고, 독특하지도 않은 평범하고 무난한. 하지만 없으면 아쉽고 나이 먹으면 하기 힘든 게 청량이다.
이거 정하는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데뷔니까 청량으로 가죠.’
‘애들 나이 먹거나 이미지 소모되면 청량 컨셉 덜 먹혀요.’
‘그럽시다.’
‘좋네요. 그럼 청량 컨셉으로 가죠.’
뭐 대충 저렇게 끝나지 않았을까? 매우 실례되는 생각이지만 결과를 보니 신빙성 있지 않나?
그렇게 샵에 들려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았다. 서로의 낯선 모습에 어색해하는 시간을 가진 것도 잠시, 다시 벤을 타고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도착하면 웃으면서 인사해야 해. 알았지?”
매니저는 의외로 친화력이 좋았다. 특히 유찬 형과 이서호와 금방 친해졌다. 나를 포함해 낯가리는 멤버 세 명만 매니저를 친숙하게 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찬 형이 ‘저희 다 어리니까 편하게 하세요, 형!’ 하면서 밑밥 깔아주지 않았다면 분위기 이상했을걸.
누구한테는 편하게 하고, 누구한테는 존대하고. 얼마나 이상했겠어.
촬영장에 도착한 우리는 위풍당당하게 앞장서는 매니저를 졸졸 따라갔다. 유찬 형은 우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정신이 없어 보였고, 정이한은 바짝 긴장했으며, 강현 형은 무덤덤해 보였다. 이서호는 잔뜩 설레서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바빴다.
우리의 등장, 정확하게 매니저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강렬한 존재감으로 위압감을 뿜어내는 야생곰 매니저를 보고 순식간에 얼어붙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해치지 않아요. 이래 봬도 사람입니다.
여기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회생활 할 사람은 두 명이었다. 유찬 형이랑 나. 이서호는 사회생활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뿐이고.
이게 바로 겨울과 봄 전략. 살 떨리게 험악한 인상의 매니저를 보다가 뒤에 서서 방긋거리는 애들 보면 친밀감이 생기지 않겠어?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야생곰 매니저 덕분에 양아치 포스 나는 정이한의 첫인상을 조금 누그러트릴 수 있었고, 다소 무뚝뚝한 강현 형의 첫인상도 건방져 보이지 않도록 중화시킬 수 있었다.
“정 작가님, 오랜만입니다.”
매니저가 사진 작가에게 다가가 친밀감 있게 인사했다. 사진 작가가 환하게 웃으면서 “어머! 정곤 씨! SR로 옮기셨구나?” 하면서 반겼다. 인맥이 넓다더니 정말인가? 신기하네.
“작가님이 찍어주시니 우리 애들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나오겠네요. 든든합니다.”
“어휴, 정곤 씨가 그렇게 말하면 부담감이 팍팍 드는데. 잘 찍어 달라는 말을 꼭 그렇게 하더라?”
“하하하.”
“의뭉스럽긴. 애들 예쁘긴 하네. 캐릭터도 안 겹치고. 그리고 이 컨셉, 확실히 저 애랑 어울리겠어. 저 친구 맞지?”
그 말과 동시에 사진 작가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면서 꾸벅 고개 숙였다. 매니저가 잠깐 뒤를 돌아봤다가 “네, 맞아요.”하고 대꾸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새겨졌다. 뭘까?
“너 뭐 들은 거 있어?”
이서호가 내게 속닥거렸다. 그래서 나도 이서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니.”
“으악! 왜 귀에다 소곤거려?”
이서호가 귀를 문지르면서 눈매를 좁혀 날 째려봤다. 작게 대답하려고 그런 건데 뭘. 지난번에 날 열심히 간지럽히길래 간지럼 따위 안 타는 줄 알았지.
“약점이구나?”
눈꼬리를 싹 접어서 웃어줬더니 이서호가 부르르 떨며 내게서 멀어졌다. 정이한의 뒤에 샥 숨고는 “형, 날 지켜줘요…….” 란다. 하필이면 골라도 정이한이냐. 걔는 달라고 하면 순순히 내밀 사람이야.
“자, 얘들아. 놀고 있을 시간 없어. 후딱후딱 움직이자. 빨리 가서 옷부터 갈아입고 와.”
“네.”
매니저가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기다렸다는 듯 스탭 한 분이 다가와 탈의실로 데려갔다. 건네주는 옷을 보니 하늘색 교복이었다. 청량 교복은 무조건 먹히지.
반바지네.
무릎 위에서 기장이 끝나는 반바지와 셔츠, 그리고 자켓에 넥타이까지 풀이었다.
유찬 형은 정석적인 교복 차림이라 지적인 분위기와 어울렸다.
정이한은 넥타이와 자켓 없이 단추 몇 개를 풀었다. 덕분에 양아치 느낌이 더욱 물씬 풍겼다. 섹시한 양아치랄까. 청량인데 분위기가 저래서야 괜찮은지 모르겠다.
강현 형도 비슷했지만, 이쪽은 넥타이를 잡아 늘였고, 자켓의 단추를 채우지 않아서 반항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잘생김이 반항아적인 분위기마저 잡아먹고 있어 그저 감탄하게 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이 반바지에 당첨된 이서호. 셔츠 위에 조끼를 걸쳐서 상큼하고 귀여운 느낌이 더 강조됐다. 코디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멤버 별로 포인트를 참 잘 잡았다.
그런데 보통은 학교 인장이 박혀 있을 곳에 각각의 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내 건 개나리 같기도 하고,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이게 무슨 꽃인지 궁금해할 때 우리는 세트장으로 몰아 넣어졌다.
“하온아, 네가 먼저 찍자. 너는 스튜디오에서 더 찍을 게 있어서 헤메코 바꿔야 하거든.”
“아하.”
“정 작가님, 하온이 먼저 부탁드립니다.”
“네네.”
어쩌다 보니 첫 번째다. 이렇게 된 거 내가 제대로 보여줘야지. 초짜인 멤버들과 다르게 나는 경험자였다. 내게는 전생에서 노력으로 축적한 노하우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을 내려놓기.
아이덴티티 따위 버리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사진은 잘 나오게 되어 있다. 전생에는 나 때문에 시간이 쓰이면 쓰일수록 촬영장 분위기만 나빠졌었다. 감독이든 사진 작가든 대놓고 짜증 냈고, 스텝의 은근한 괴롭힘은 덤이었다.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이 된다고 할까.
그렇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잘 해내야 했다. 내가 빨리 끝내고 빠져줘야 모두가 편할 테니까. 혼자 있을 때 틈틈이 표정과 포즈 연습을 한 것은 물론, 화보 자료 스크랩까지 게을리하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지금의 내겐 전생에서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청량 컨셉이니까 맑게 웃으면 되겠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자기 암시를 열심히 하면서 웃었다.
“아유, 카메라가 인물을 다 못 담네. 하온이 너무 예쁘다. 어디서 모델 하다가 왔어? 표정이며 자세가 엄청 자연스럽네.”
그럼요. 전생에 해 봤죠. 물론,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 그냥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 “고맙습니다.”하고 대꾸했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작가님이 감탄했다.
“전부 A컷이라 뭐 버릴 게 없네. 피사체가 너무 좋아.”
이런 분위기, 이런 칭찬은 너무 달콤합니다. 제가 개미핥기가 돼서 작가님 핥으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부끄러워하는 것도 귀엽고.”
아, 걸렸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어색하게 쭈뼛댔더니 그것도 좋다면서 열심히 찍어주셨다.
<시스템: 연기 등급이 F로 변경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이것도 연기라고 쳐주는 거냐? 되게 너그러운 시스템이네. F까지 필요한 경험치는 1이니까 그냥 달게 받았다. 참고로 F+도 1이다. 오늘 컨포 스케줄 끝날 무렵엔 F 졸업할지도.
“좋아! 다 됐어. 잘했네. 다음은 어떤 친구 할래?”
작가님이 최종 오케이 사인을 내리셨다. 나도 내 사진이 보고 싶었는데 데뷔 전인 우리에게 그럴 권한은 없나 보다.
나는 곧바로 매니저 손에 이끌려 다른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카라가 있는 흰 반팔 블라우스, 검은색 멜빵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양말이랑 검은 광택이 나는 구두, 폭이 좁은 넥타이까지 착용했다.
잠시 대기하라는 말에 구석 자리에 마련된 의자로 가 앉았다. 곧 헤어 디자이너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누나들이 왔다.
눈동자를 열심히 힐끔거리며 촬영하는 멤버들을 먼발치에서 구경했다. 다음 차례로 유찬 형이 당첨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얼굴도 굳고, 포즈도 딱딱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걱정되는 건 정이한이었는데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잘 움직이지 않는 안면근육을 움직여서 어떻게든 웃어 보였다. 하지만 어색함이 영 사라지지 않아서 촬영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사이 내 헤어와 메이크업 수정이 끝났고 나는 다시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날 보자마자 유찬 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애를 인형으로 만들어 놨네.”
“미친, 진하온. 너 좀 징그럽다.”
이서호가 날 내버려 둘 리 없지. 하지만 난 펄럭거리는 속눈썹이 신경 쓰여서 가볍게 이서호를 무시했다. 도대체 날 이렇게 만든 이유가 뭘까.
“구체관절인형 같다.”
유찬 형은 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자꾸 요리조리 얼굴 틀어가면서 나를 감상했다. 나는 왜 날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놨는지가 제일 궁금한데 형은 아닌가 보다. 형이라도 좋으면 됐지.
“어, 하온이. 헤메 수정 끝났구나.”
“매니저 형, 저만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
“아, 뮤비에 들어갈 폴라로이드 인형 사진이 필요하거든. 진짜 인형으로 찍을까 하다가 하온이 널 분장시키기로 했어. 이스터에그로 심자고.”
그렇군. 매니저의 말대로 진짜 분장 수준이긴 했다. 내 눈은 이렇게 크지 않고, 피부 역시 이 정도로 하얗진 않다. 그냥 백설기 같잖아. 손까지 새하얗게 칠해놔서 뭐 만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청량입니다! 하고 끝날 컨셉이 왜 늦게 나왔나 했더니 뮤비 기획까지 끝낸 모양이었다. 그럼 곡이랑 가사가 나온 건가? 아니면 뮤비 컨셉만 정한 걸까?
때마침 촬영을 끝내고 기진맥진하게 돌아온 정이한이 날 보고 멈칫했다. 내 사고가 그쪽으로 옮겨갔다.
“……진하온?”
“네, 제가 하온이에요.”
“아…….”
정이한도 내가 신기한가 보다. 유찬 형처럼 대놓고는 아니지만 자꾸 힐끔힐끔 쳐다봤다. 솔직히 메이크업을 받고 나서 거울을 본 내 첫 감상은 징그럽다였다. 그래서 이서호의 반응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형들 눈에는 징그러움보다 신기함이 더 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