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33화 (33/320)

33.

나는 정이한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안 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유찬 형이 오랜만에 왔다면서 정이한을 반겼다. 정이한은 ‘응. 그러게.’라고 말한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하루의 먼지를 씻어낸 뒤 침대에 누워 정이한에게 들은 내용을 검색해봤다. 평소엔 바로 잠드는 내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게 이상한지 유찬 형이 궁금해했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문제의 시발점은 선배 그룹인 ‘테오스’가 출연하는 음악 관련 방송이었다. 당시 테오스는 지방 축제에 참여했었는데 하필이면 기상 이변 급 폭설이 내렸다.

그 때문에 촬영이 펑크날 지경에 이르렀다. 4년 전, 테오스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회사는 빠르게 대타를 내보냈다. 그게 이미 완성된 실력의 정이한이었다.

방송 타이틀은 ‘천재 랩퍼! 정이한의 귀환!’. 아주 어릴 때 신동 프로그램에 출연한 전적이 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정이한은 그날 출연한 방송에서 제 실력의 반의반도 발휘하지 못했다.

방송국은 과감한 칼질과 악마의 편집으로 정이한을 깎아내렸다. 패널들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그대로 내보냈다. 회사는 이미 한 번 출연진을 급박하게 교체했으므로 막아 줄 방법이 없었다. 혜성처럼 등장했던 신동의 처참한 추락.

1시간 러닝 타임 중 정이한이 출연한 분량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이한을 마음껏 물고, 뜯고, 씹고, 맛보았다. 그 모든 칼날은 정이한을 들쑤셨고, 자신감을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방은 역시 교주.

‘팀에 민폐가 될 거야.’

그 강박은 정이한을 동굴 속으로 밀어 넣는 기폭제였다.

짧은 클립으로 너튜브에 남아 있는 신동 프로그램 영상 속 어린 정이한은 귀여웠다. ‘저는 아이돌이 될 거예요!’하고 말하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당당했다.

어릴 때부터 아이돌 되고 싶었던 거네. 하기 싫어 보였던 건, 자신이 민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땅 파는 모습만 보고 오해한 내 탓이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했는데도 아이돌이 하고 싶어서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래서 더더욱 작업실에 처박혔다. 악순환이었다.

내가 다 안타까웠다. 지금도 저 때처럼 웃으면 좋을 텐데.

칭찬 세례를 퍼부어 정신 교육을 다시 해 줘야겠어. 어떻게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정이한은 진짜 실력 있는 랩퍼이자 작곡가였다. 느낀 그대로 감상을 전하면 될 일이다.

재능이 랩만 얘기해서 작곡도 잘하는지 몰랐지. 제일 잘하는 거 하나만 알려주는 건가? 그럼 유찬 형은 얼마나 대단한 노래를 뽑는다는 거야? 이 그룹의 미래가 기대됐다.

“하온아, 아직도 안 자? 너 자는 시간 지났잖아. 오늘 이상하네.”

내가 계속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이제 자려고 했다. 알아보고 싶은 건 다 알아봤고 뭘 해야 할지도 결정했다. 아, 그러고 보니.

“형,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이한 형 작업실 보여주는 거 싫어한다고 했던 거요.”

“응응.”

“그거 이한 형이 직접 말한 거예요?”

본인 입으로 말할 스타일이 아닌데 말이야. 분명 교주 놈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아냐. 재혁이가 알려준 거야. 우린 그것도 모르고 자주 가서 방해했었거든.”

“그분은 여기 언제 왔는데요?”

“3년쯤 됐으려나. 우리 중에 제일 늦게 왔는데 순식간에 리더가 됐지.”

“아하.”

3년 만에 이렇게 휘저어 놨다 이거군.

“저 오늘 형 작업실 갔잖아요.”

“응.”

“싫어하지 않던데요. 예전 노래랑 요즘에 작업한 노래랑 다 들려줬어요. 그리고 작곡 프로그램 설명도 한참 해줬어요. 기계 만지는 법도 가르쳐 줬고. 저한텐 조금 어려웠지만, 형.”

“……어, 어?”

“형 작곡해 보고 싶다면서요? 이한 형한테 부탁해 봐요. 되게 기뻐할걸요? 저한테도 그렇게 신나서 설명했는데 친한 형이라면 더 좋아하겠죠.”

“……재혁이가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그분이 언제 말한 건데요?”

“어, 한. 2년? 됐으려나.”

그럼 그동안 사람을 방치한 거야? 교주 말 몇 마디만 믿고? 그 깊은 우울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그동안 이한 형을 쭉 혼자 뒀다고요?”

“응. 재혁이가…….”

말을 하던 유찬 형이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혹시, 아니야? 아니었어?”

“그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아, 그렇지. 시간이 좀 흐르긴 했지…….”

유찬 형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길게 숨을 쉬었다. 저렇게까지 믿고 싶어 하니 실장님이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거다. 광신도란 걸 알아차려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다 뛰쳐나갔을지도 모를걸. 교주님 찾아 삼만리. 뭐 영화 한 편 나와도 좋았겠네.

하지만 그렇게 버리기엔 아까운 패니까 실장님이 꽉 쥐고 싶어 했던 거고. 멤버 전원의 비주얼과 실력이 평균 이상이니 얼마나 아까웠겠어.

“내가 이한이한테도 소홀했구나. 이젠 내가 리더인데, 더는 재혁이가 없다는 걸 자꾸 잊어버려. 내가 챙겨야 하는데…….”

“차근차근해요. 누구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응. 그렇겠지…….”

정이한 신경 쓰느라 잠깐 소홀했던 사이 두부 멘탈이 또 흔들린다. 콕 찌르면 찌르는 대로 푹푹 들어가네. 그냥 두부도 아니고 순두부였어.

“형, 나는 형이 리더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나 같은 게?”

“네. 형한테는 책임감이 있잖아요. 부담 느끼는 것 자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거니까. 부족한 건 배우면 되는데 책임감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럴까.”

“그럼요. 그리고 저는 형이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돼요. 그러니까 좋은 리더죠.”

“옆에 있어 주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장난에 맞춰줬다.

“아, 그런가?”

“너무하다.”

“히히.”

“빨리 자기나 해. 이미 늦었어.”

“네네. 잘 자요, 형.”

“응. 너도 잘 자.”

***

다음 날 오전. 변화가 일어났다. 정이한이 작업실에서 벗어나 제 발로 연습실에 나온 것이다. 빼꼼 열린 문 사이로 들어와도 되는지 망설이는 것처럼 우릴 보고 있었다.

“형! 이리 와요!”

내가 먼저 발견해 손짓하자 유찬 형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한아!”

“형, 나…….”

유찬 형이 정이한의 팔을 잡고 중앙으로 데려왔다.

“잘 왔어. 같이 연습하자.”

“……같이 해도 돼?”

“당연하지. 우리 멤버잖아.”

눈이 마주친 순간, 내가 신나서 웃어주자 정이한의 얼굴에도 말간 미소가 번졌다. 아이돌이 되고 싶다면서 또랑또랑하게 말하던 어린 정이한이 언뜻 겹쳐 보였다.

뭐야. 예쁘게 잘만 웃네.

“이한 형! 형도 나랑 같이 강현 형한테 배우자! 나 혼자 힘들었어…….”

이서호가 냅다 질렀다. 강현 형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 녀석 저거 혼자 구박받기 싫다고 정이한 끌어들이는 거다.

“어? 그래?”

“……이한 형도 가르쳐 줘?”

“으, 으응! 부탁할게!”

“그럼 이리 와.”

“응!”

맹수에게 잡아 먹히러 가는 여린 토끼를 보는 기분이다. 정이한 바스라지면 주섬주섬 모아서 다시 조립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유찬 형이 잘해주겠지? 아무래도 나보다 유찬 형이 훨씬 케어 잘해줄 것 같았다.

“유찬 형.”

“응?”

“형도 이한 형한테 작곡 가르쳐 달라고 해요. 되게 좋아할 거라니까요?”

“어, 맞다. 알았어. 이따 부탁해 볼게.”

“네네!”

좋아. 둘이 같이 도란도란 작곡 이야기꽃 피우면 분위기가 훨씬 좋아지겠지. 뿌듯하다. 마치 내가 뭔가 큰일을 해낸 것 같은 느낌이야.

가만. 둘이 같이 땅파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갈 수도 있잖아? 그러면 안 되는데. 혹시 모르니 잘 지켜봐야겠어.

하지만 지금은.

나는 가장 믿음직한 강현 형 옆으로 쪼르륵 달려갔다. 나도 춤 가르쳐 줘! 내 경험치!

***

“대표님, 애들 컨셉 포토 촬영 시작할게요. 컨셉은 중간에 멤버 교체되어도 문제없도록 청량으로 잡았고, 뮤비 이스터에그는 하온이로 결정했어요. 컨셉이랑 제일 잘 어울리기도 하고, 확실하게 데려갈 아이라서요.”

“네. 지금 데뷔 조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김혜미의 얼굴에 활짝 웃음기가 드리웠다. 그 표정만 봐도 답을 짐작게 했다.

“이한이가 같이 연습 시작했어요. 표정도 다들 밝아졌고. 서호도 적대감이 안 느껴진대요. 둘이 투닥거리기는 하는데 박정곤 매니저님 말로는 개냥이들 싸움 같다네요.”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다시 문제 될 일은 없을 것 같습니까?”

“지금은 좀 예상이 안 되긴 해요. 하지만 멤버 간에 불화가 생기진 않을 것 같아요. 하온이가 중심이 된 것 같거든요.”

“흠.”

대표가 아래턱을 매만지면서 눈을 감았다. 김혜미는 마른침을 삼킨 채 대표의 말을 기다렸다. 성격상 한번 결재한 걸 번복하진 않겠지만, 괜히 긴장됐다.

솔직히 모험이긴 하니까. 그것도 실패한다면 손해액이 어마어마한 모험이다.

“데뷔 후에는 바꿀 수 없어요. 뮤비 촬영 전까지 지켜보고 진행할지 최종적으로 판단하죠. 그편이 최소한의 손실로 끝나니까.”

“네. 알겠습니다.”

“김혜미 실장님.”

“네.”

“저는 실장님을 믿습니다. 이후 판단은 실장님께 일임하도록 하죠. 가까이에서 멤버들을 지켜보는 건 실장님이니까요.”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한 상급자가 보내는 신뢰에 김혜미가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맡겨 두세요. 실망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네. 제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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