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32화 (32/320)

32.

“저 소름 돋았어요. 지금 작업하는 건 어떤 건데요? 그것도 들려줄 수 있어요? 형 노래 더 듣고 싶어요!”

“아……. 미안해요……. 최근 작업한 건 부끄러운 수준이라…….”

아. 내가 너무 흥분했나. 하지만 정말 좋았단 말이야. 그래도 안 들려준다는 걸 졸라대서 한 곡 들려줬으니……. 이 정도도 정이한 입장에서는 많이 양보해 준 거려나.

“미안해요. 제가 좀 흥분했어요. 노래도, 형 목소리도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그만…….”

민망함에 뺨을 긁으면서 슬슬 눈을 피했다. 아, 좋은 노래 만나면 흥분하는 버릇 좀 고쳐야 하는데.

“……아, 아니요. 아니에요.”

“솔직히 형 목소리가 진짜 제 취향이에요. 묵직한 저음이 진짜 매력적이에요! 거칠게 긁는 소리도 좋았고요. 다른 노래도 들어보고 싶은 욕심에 부담스럽게 했나 봐요.”

노래도 좋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또 너무 흥분할까 봐 뚝 끊었다. 부담스러워하면 소용없으니까. 이렇게 잘하는데 왜 본인만 잘하는 걸 몰라? 그걸 알려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을 흥분시킬 정도로 당신 잘한다고.

“……정말요?”

날 믿는 눈치길래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네, 진짜! 정말!”

조금 오버하나 싶을 정도로 격하게 고갤 끄덕인 탓에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하지만 내 진심을 전하기 위해서 잠깐의 어지럼증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그, 알겠어요. 고마워요.”

날 향해 뻗은 정이한의 손이 허공에서 애처롭게 흔들거렸다. 그만 끄덕여도 괜찮다는 신호를 주는 듯해 고개를 바로 했다. 목덜미가 조금 뻐근한 것 같아.

“어, 어지러워요…….”

“괜찮아요?”

“네에. 괜찮죠, 그럼.”

정이한이 날 보고 야트막하게 웃었다. 아주 미세하긴 했지만, 입꼬리가 샐쭉 기어 올라갔다. 웃는 거 처음 본다. 되게 희귀한 미소네.

“저, 그럼, 음.”

오랫동안 주저하던 정이한이 다른 폴더의 파일을 건드렸다.

“그, 지난주에 완성한 게, 하나 있긴 한데, 가이드, 녹음 수준으로만 넣은 거라…….”

“듣고 싶어요!”

“그러면, 저, 조금만…….”

“네! 좋아요!”

정이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한참 주저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파일을 클릭했다. 새로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에 들은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음울하고 음침한 도입부였다. 힙합보다는 우울한 재즈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힙합 베이스를 깔고 있어서 안 어울리는 듯, 묘하게 어울렸다.

이 곡에 담긴 정이한의 랩은 지하 깊은 땅굴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콱 막힌 느낌이었다. 바닥을 기어가는 듯한 저음과 외면하고 싶은 불쾌한 것을 건드리는 듯한 가사까지 더해져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군.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5년 전의 정이한과 지금의 정이한은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노래가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역시 별로죠…….”

그건 다른 문제지. 나는 힙합에 취향이 없어서 이쪽 장르 곡을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들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분위기가 우울할 뿐이지 확실히 5년 전보다 훨씬 잘 만들었다. 랩도 마찬가지다. 더욱더 풍부해졌고 딕션도 잘 들렸다.

“형.”

“네, 네?”

정이한이 잔뜩 긴장했다. 나는 살짝 말아 쥔 채 꼼지락거리는 정이한의 두 손을 콱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진짜 대단해요!”

“……네?”

“제가 어휘력이 없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정말 대단해요!”

“어, 이, 이거, 괜찮았어요?”

“괜찮은 게 아니라 엄청 좋았어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곡인데 두 곡 다 이렇게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다는 게 존경스러워요!”

정이한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조금 전보다 분명하게 미소 지으면서 은근슬쩍 나한테 물었다.

“그럼, 저, 다른 곡도 들어볼래요?”

“네! 얼마든지요! 형 오늘 시간 많아요? 저는 시간 많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여기 계속 있어도 돼요? 다 듣고 싶어요!”

“그, 그래요.”

“그리고 말 편하게 해요. 제가 동생인데요!”

정이한의 고개가 미세하게 끄덕여졌다. 그리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다르게 주저하는 기색 없이 노래를 골랐다.

***

왜 정이한이 작업실에 콕 박혀서 숙소에 잘 안 들어오는지 알았다. 여기는 시간과 정신의 방이었다. 중간에 보컬 쌤한테 연락이 와서 오늘 땡땡이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때가 오후 두 시.

그리고 정신 차리니 오후 열한 시였다. 그것도 숙소에 돌아오지 않는 나를 걱정한 유찬 형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계속 여기 박혀 있었을 거다.

편하게 앉아서 퀄리티 좋은 노래만 연달아 듣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 기분이 반영된 모양인지, 늦은 시간까지 활동했음에도 체력이 15나 남아 있었다.

그걸 보고 살짝 섬뜩해졌다. 내가 체력 관리를 잊고 있었다니. 레벨업 하지 않았다면 몹시 발랄하고 경쾌한 ‘상태 이상 발동!’ 메시지를 봤을지도 모른다. 실제 어감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느낌표 때문에 난 그렇게 느껴지거든…….

어쨌거나.

“아……. 진짜 좋았다.”

순도 높은 진심이었다. 정이한과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누고, 이 사람과 어떻게 지낼지 떠보려고 했던 건데 그냥 정신 놓고 놀아버렸다.

“신기한 기분이야.”

“뭐가요?”

“……내 곡 가지고 이야기한 게 오랜만이거든.”

“에? 왜요? 다른 사람한테 안 들려줬어요?”

“평가받는 게 무서워서…….”

“아하.”

그럴 수 있지. 본인의 실력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정이한처럼 자존감이 낮으면 더더욱. 주변에서 잔뜩 칭찬해주면 더 잘할 텐데. 지금까지 왜 그냥 내버려 뒀을까. 나보다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의 칭찬이 더 효과적이겠지?

일단 유찬 형을 이 사람한테 보내 보자. 분명히 나보다 훨씬 퀄리티 좋은 칭찬으로 자존감을 쑥쑥 키워줄 거다. 작곡에 재능있으니까 듣는 귀도 좋겠지.

정이한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날 봤다.

“다음에도 들어줄 수 있어?”

“당연하죠! 매일 듣고 싶을 정돈데. 오히려 제가 부탁해야 할 것 같은데요?”

“으, 으응. 고마워.”

“멤버들 중에 정말 아무에게도 안 들려줬어요? 들으면 다들 칭찬 많이 해줬을 것 같은데.”

정이한은 잠깐 말을 아꼈다가 고개를 저었다.

“재혁 형한테 들려줬었어. 그런데, 어…….”

또 저 이름인가.

“형은, 내가 예전 같지 않아서, 빨리 실력을 되찾아야 민폐 끼치지 않을 거라고 했어. 그래서 계속, 노력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아서……. 다들 잘하는데 나만, 나만 퇴보하고 있는 기분 때문에 다른 사람 만나는 게 무서웠어. 특히 실장님이랑 멤버들…….”

정이한은 그래도 아이돌이라는 꿈을 차마 포기할 수가 없어 계약서에 사인해 버렸다면서 자조적으로 웃었다.

나는 ‘실력을 되찾아야 한다.’라는 부분에 주목했다. 어쩌면, 정이한의 자존감이 극도로 떨어진 원인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교주는 그걸 더 자극한 거고. 하지만, 도대체 왜?

잠깐 대화를 나눠 본 나도 정이한은 칭찬을 먹고 자라는 타입인 걸 알았다. 내가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우울한 기색이 조금씩 걷히는 게 느껴졌으니까. 그걸 사람 홀리는 교주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정이한의 힘을 죽인 거면.

매우 높은 확률로 시기, 질투 아닐까?

자기가 제일 잘나야 하고, 모든 사람을 주무를 수 있는 우위에 서야 하는 타입. 그런 사람들의 내면은 대부분 시기와 질투로 이루어져 있다. 삐딱한 우월감을 지녔기에 저보다 잘하는 인간이 보이면 어떻게든 짓밟아야 하는 거다.

그런 교주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 없는 유약한 사람, 즉. 두부 멘탈 박유찬과 순딩한 이서호는 쉽게 주무를 수 있는 먹이였겠고, 실제로 정신 교육도 끝냈다.

반대로 정이한은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견제된 게 아닌가 싶다. 처음부터 내게 중립적인 성향을 보였으니 정신 교육에 실패했던 걸지도 모르고.

강현 형은 타인에게 휘둘리는 타입이 아니다. 춤에 미쳐있는 외골수 타입이기도 했고, 아이돌 그룹에 퍼포먼스 담당할 메인 댄서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니까 교주도 타협했을 수 있다. 어쩌면 서서히 손을 뻗을 생각으로 밑밥만 깔다가 다 못 하고 쫓겨난 걸 수도 있고.

이것도 저것도 전부 추측일 뿐이라서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갖췄으면서도 자신이 민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우울해하는 정이한이 더 중요했다. 날 어디까지 믿어줄지는 모르지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교주 말 듣지 마. 잊어버려.

“힘든 일이라도 있었어요? 왜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해요? 제가 듣기엔 곡의 느낌만 달라졌을 뿐 예전보다 훨씬 좋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아이돌과 어울리지 않는 극악한 우중충함이 있지만, 아이돌을 떠나 음악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훨씬 일취월장한 건 사실이었다. 내 진심이 전해졌으면 좋겠는데.

후우, 길게 숨을 내쉰 정이한이 날 봤다. 내리깐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드리워졌다. 손톱으로 틱틱, 책상 모서리를 긁어대던 정이한이 연달아 한숨 쉬었다. 그 뒤에 아주 느리게 입을 열었다.

“실은 나, 방송 나간 적 있는데…….”

나는 정이한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옛 상처를 다시 꺼내기가 힘든지 정이한은 이야기 중간중간 목을 축이고, 숨도 골랐다. 아주 느릿한 템포로 들려준 이야기는 정이한을 이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준 동시에, 너무나 안타깝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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