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31화 (31/320)

31.

“……죄송해요. 안녕하세요. 진하온입니다.”

“하하하. 제 인상 때문에 무서워하는 분들 많아요. 괜찮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에,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차례는 정이한이었다. 나보다 더 낯가리고 겁 많은 정이한이 웅얼거리면서 인사한 뒤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나한테도 저랬는데 내 오해였구나. 살면서 인상 때문에 손해 좀 봤겠어.

우리의 인사가 끝나길 기다린 듯 이서호가 질문을 쏟았다. 어느 부대에 있었는지, 거기서 무슨 훈련 받는 건지, 얼마나 힘든지, 근육은 부대에 몸담았을 적부터 만든 건지 등. 주로 군대에 관한 질문이었다. 어차피 나중에 가야 하는 것을 왜 벌써부터 궁금해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 잠깐.

그러고 보니 군대 또 가야 하는구나……. 전생에서는 진짜 딱 죽고 싶을 만큼 굴렀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 진짜 총 안 맞고 살아 돌아온 게 기적이었지. 벌써 가기 싫다.

군대 생각하니까 우울해진다. 나는 우중충한 감정을 날려 버리기 위해 쓸데없는 이서호의 질문 폭격에 집중했다.

매니저는 미소를 장착해 야생곰에서 동물원 곰이 된 상태로 이서호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해줬다. 유찬 형이 실례라고 말릴 때까지 계속 물었다. 매니저는 괜찮다면서 허허 웃었고.

무서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

자, 그럼.

진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해결할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정이한 떠보기. 지금 상태로는 데뷔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문제가 있는 멤버라면 데뷔 조에서 탈락했을 테니 나름대로 무언가 ‘아이돌다운’ 구석은 갖춘 거라고 봐야겠지만…….

내가 경험한 정이한은 우울하고 우중충한 겁 많은 사람일 뿐이었다. 저런 정이한이 무대 컨셉에 맞춰 표정 연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보다 앞서 컨셉 포토, 뮤비 촬영은 또 어떻게 할 거야?

그걸 통과하더라도 아이돌은 춤추고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본업은 기본으로 잘해야 하고, 팬과 소통도 해야 했으며, 앨범 홍보를 위해 각종 매체에 출연해야 했다.

시종일관 우울한 기색을 드러낸다면 무슨 말이 나와도 나온다. 그건 곧 그룹을 둘러싼 각종 루머가 생산된다는 뜻이고, 순탄하게 망돌을 향해 가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것만은 극구 사절이었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정이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굳은 마음을 먹은 나는 정이한의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워낙 방음이 잘 돼서 안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없는 척하면 답이 없다. 그러면 나올 때까지 이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얼마나 비효율적이야?

지난번에 유찬 형도 그냥 문을 열었었으니까 나도 그렇게 할까? 허락 없이 작업실 문을 여는 것에 대한 달콤한 유혹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문이 빼꼼 열리면서 정이한이 얼굴을 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문이었는지 당혹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가 놀러 간다고 한 걸 빈말이라고 생각했나?

“놀러 온다고 했잖아요.”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한쪽 손을 들여 보였다. 큰마음 먹고 카페에서 공수해 온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선물까지 사 들고 왔는데 쫓아내진 않을 거지? 믿는다. 당신의 소심함.

“아, 들어오세요…….”

다행이다. 무척 불편해 보였지만 쭈뼛쭈뼛 나를 안으로 초대했다. 내부는 상당히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모니터 위쪽 선반에 사기로 만들어진 작은 선인장 모형이 옹기종기 있었고, 벽면에는 꽃다발 몇 개가 듬성듬성 걸려 있었다. 지난번에 힐긋 봤을 땐 생화인 줄 알았는데 전부 조화였구나.

“꽃 좋아해요?”

“……네.”

“숙소에 화분이 하나도 없던데 아쉽겠어요.”

“……아뇨.”

말이 뚝뚝 끊겼다. 하지만 물어보면 대답은 잘해준다. 이게 어디야.

정이한은 나한테 받은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뚜껑을 까득까득 긁어댔다. 엄청나게 불편해하네. 하지만 난 모른 척할 것이다.

“커피는 좋아해요? 무난하게 아메리카노로 사 왔거든요.”

“……네. 좋아해요. 잘 먹을게요.”

“다행이다.”

당연히 유찬 형한테 미리 정보를 얻어 사 온 거지만 시치미 뗐다. 멤버 중에 나한테 호감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건 참 여러모로 좋았다.

“사실 작업실 구경은 핑계고,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왔어요.”

“……저랑요?”

‘왜?’라는 의문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날 본다. 같은 그룹인데 당연히 친해져야지. 내가 말하는 ‘친해진다.’의 기준은 카메라 앞에서 친한 척해주면 되는 거니까 이 사람도 할 수 있겠지.

“네. 형이랑. 같은 멤버잖아요.”

정이한의 동공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개가 또 자꾸 아래로 내려갔다. 신체 구조적으로 가능했다면 자라처럼 껍데기 속으로 숨어버렸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정이한을 그냥 내버려 둔 채 내게는 낯설기 그지없는 기계들을 들여다봤다. 작곡에 쓰는 것들인가 봐. 처음 보는 광경에 흥미를 보였더니 정이한이 더듬더듬 말을 걸어왔다.

“……궁금해요?”

“어? 네! 처음 보는 거라서요.”

정이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거 전에도 본 적 있다. 유찬 형이 강현 형한테 작은 안무 동작 차이에 관해 궁금해했을 때랑 비슷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이한의 뺨에 살짝 홍조가 깃들었다. 그러더니 열심히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흥미로웠지만, 초급자에서 단숨에 고급자 코스로 넘어가니 재미없어졌다. 이 자리엔 내가 아니라 유찬 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스템: 작곡 등급이 F로 변경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으응? 작곡을 한 것도 아니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그저 기계와 프로그램 설명을 들었을 뿐인데 등급이 올랐다. 경험치 요구량 1의 위업은 어마어마했다.

작사와 작곡에는 뜻이 없으므로 나는 그저 열심히 들었을 뿐이다. 물론 머릿속에 남는 건 하나도 없다. 그저 ‘목소리 진짜 좋네.’가 내 감상의 끝이었다. 지루한 얘기를 하는데 저음이 매력적이라서 들어줄 맛이 있었다.

“어때요? 신기하죠?”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네? 네에…….”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요.”

정이한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리곤 곧장 죄송해요, 역시 재미없었죠. 같은 말을 하면서 땅굴 파기 시작했다.

“미안할 거 없어요. 형 목소리가 좋아서 듣고 있었던 거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저 형 노래 들어보고 싶은데 안 돼요?”

“……노래요?”

“네. 이렇게 어려운 기계로 작업한 곡이 궁금해요!”

“어……. 아직 그렇게 잘하진 못하는데…….”

갑자기 자신감이 뚝 떨어진 정이한이 우물쭈물했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이 사람이 이렇게 자존감 폭락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 정이한은 계속 내 눈치를 살피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본인이 들려주고 싶어야 들을 수 있기에 그냥 기다렸다. 그러다가 작은 선인장 모형의 잎 끄트머리가 깨져 있는 걸 발견했다. 새하얀 사기가 그대로 드러나 눈에 띄었다.

방향을 돌려두면 더 예쁠 것 같은데……. 고개만 들면 보이는데 망가진 면보다는 예쁜 면을 보는 게 좋잖아. 고쳐주려고 일어나는 데 갑자기 팔을 덥석 붙잡아왔다.

“그, 잠시만요. 그럼, 이거로…….”

“어? 들려주시려고요?”

“……네, 네에. 조금만 더, 같이 이야기…….”

“좋아요! 좋아요! 들을래요! 아, 그보다 잠시만요. 이거 이렇게 돌리면 어때요? 깨진 부분 안 보이게요.”

정이한이 물끄러미 내 손끝을 봤다. 흔들리는 동공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싫다는 건가? 일부러 이렇게 놓은 걸 수도 있으니까…….

“제가 너무 참견했나요? 미안해요.”

“아, 아뇨! 아니요. 그건 아니고, 선인장은 어떻게 놔도 괜찮아요…….”

정이한은 뺨을 조금 붉힌 채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왜 부끄러워하는 거지? 어쨌든 허락도 받았으니 선인장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이러면 예쁜 것만 보이겠지?

“됐어요. 어때요? 깨진 곳 안 보이죠?”

물끄러미 고개를 올린 정이한이 끄덕이는 걸 보니 만족스러웠다. 나는 곧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고민하던 정이한이 선택한 파일은 무려 5년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것이었다.

날짜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부끄러워하지 않나? 나도 너튜버로 전향하고 맨 처음 올렸던 영상 다시 봤을 때 책상에 머리 박았는데? 그런데 5년 전 거라고? 정이한이 생각했을 때 5년 전이 훨씬 잘했다는 뜻이잖아?

사람은 뭐든 반복하면 늘게 되어 있다. 창작의 영역도 다르진 않다. 당연히 지금 작업물의 퀄리티가 훨씬 좋을 텐데?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정이한이 틀어 주는 노래를 들었다. 전통 힙합곡으로 상당히 파워풀하고 거친 멜로디였다. 정이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업물을 들려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귀를 사로잡는 매력적인 음색이 단단하게 선율을 붙잡았다. 훅 부분에서 목을 긁어가며 거칠고 빠르게 뱉어내는 랩은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였다.

딕션이 얼마나 좋은지 상당히 빠른 비트임에도 귀에 콕콕 들어와 박혔다. 나는 존재감을 과시하듯 서 삐죽 선 목덜미의 솜털을 문질러 눕히면서 노래를 들었다. 백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천재라더니 진짜네.

“……부, 부끄럽지만, 제가 만든 거예요…….”

이런 기만자. 이 사람은 지금 세상의 모든 랩퍼를 기만한 거다. 5년 전 실력이 이 정도라면 지금은 어떻겠어? 완전 대박이네. 이래서 실장님이 이 사람 꽉 잡고 있는 거구나.

예능은 안 내보내면 되고, 라디오는 병풍만 하다가 돌아와도 된다. 인터뷰야 뭐 정해진 질문에 준비된 대답을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본업 존잘 실력파 멤버 한 명쯤 있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랩을 듣자마자 정이한에 대한 평가가 싹 바뀌어버렸다. 미쳤다. 이 사람 천재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수준이었으니까.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