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강현 형은 옷 갈아입으러 들어가면서 동심 커피 믹스를 요구했다. 프림 커피 좋아하나? 햇볕 잘 들어오는 고층 빌딩에서 에스프레소를 즐길 것 같은 이미지인데 말이야.
“하온이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 종류는 신경 안 써요. 시리얼이랑 우유, 그리고 레토르트 식품 몇 개면 돼요.”
“연휴 기간에 회사 식당도 안 여니까 반찬도 좀 살까? 너랑 강현이랑 숙소에서 밥 먹어야 할 거 아냐.”
“저희가 숙소에 들어와서 먹을 것 같진 않은데. 강현 형이 아침 챙기는 타입도 아니고. 어차피 저 혼자 먹을 거니까 많이 살 필요 없어요.”
형은 잠시 고민하다가 즉석 밥과 일회용 국 몇 종류를 추가했다.
“핫도그 같은 거 말고 제대로 밥을 먹어.”
“그런 건 귀찮아요.”
“냄비에 부어서 끓이고, 밥은 렌지에 돌리면 돼.”
설거지하는 게 귀찮은 건데. 그냥 먹고 쓰레기통에 휙 버리는 방식이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날 위해주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기분이 몽글몽글해져서 그냥 알겠다고 했다.
“미안해. 이런 건 리더인 내가 잘 챙겨야 하는데 나는 다이어트 중이라 생각을 못 했어. 이런 건 재혁이가 다 챙겨줬던 거라…….”
“형, 원래 먹을 건 스스로 챙기는 거예요. 못 챙기는 사람이 바보지. 누가 챙겨주는 게 아니에요. 이런 것까지 리더 책임이라고 누가 그래요? 별걸 다 책임지려고 하시네.”
유찬 형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럼 너는 바보인가 보네.’ 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두부 멘탈 보수 좀 해줬더니 이런 취급으로 돌아온다. 참나.
***
19살이 되었다. 한 번 겪어서 그런지 딱히 감흥은 없었다.
연휴 기간에는 노래 경험치 올리려는 생각을 접었다. 혼자 하니까 효율이 너무 별로라서 이틀 하다가 때려치우고 춤에 집중했다. 강현 형은 끈기 있게 나를 돌봐줬다. 내 실력이 나아지니까 은근히 뿌듯해하더라.
연휴가 끝난 뒤 달라진 건 내 일정이 다시 오전에 춤추고, 오후에 보컬 트레이닝 받는 것으로 돌아갔다는 점뿐이었다. 매일 똑같았다.
아. 이서호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여전히 틱틱거리긴 하지만 예전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주로 내가 이기고 있으므로 우리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티격태격할 것 같다. 이것도 나쁘진 않더라.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중간에 생겼던 특별한 일은 곰치네 콩나물 몇 명에게 사과받은 일이었다. 곰치가 무서워서 도와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지나치는 나를 굳이 불러서 사과까지 했다. 그래서 기억에 남았다.
제일 중요한 건 내 스탯 변화다. 포인트 안 쓰고 춤을 B+까지 올렸고, 노래는 아직 A-에 머물러 있긴 했지만 중요한 건 경험치다.
노래: A- (1315/1500)
A까지 얼마 안 남았거든. 그리고 내게는 아직 1,900포인트가 있다. 포인트 안 쓰고 춤 등급을 올렸고, 메인 미션에 3주 치 주간 미션 포인트까지 모두 모은 덕분이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느낌이야.
이따금 가챠 생각이 났지만 금방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체력 120중 100을 써야 한다. 그러면 아침 연습도 못 하는데, 그렇게 얻는 게 높은 확률로 15포인트. 실패하면 마이너스다. 나중에 포인트 남을 때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임 할 때는 1%의 확률에 기대 돌릴 때도 있었는데, 현실이 되니까 참아지는 게 신기했다. 물론 한 번 쓴맛을 보긴 했지만…….
어쨌든 오늘도 열심히 스탯을 올리기 위해 오전 일과로 춤추고 있을 때였다.
“실장님이 모이래.”
유찬 형이 연습실 문을 빼꼼히 열면서 말했다. 이서호와 강현 형이 먼저 나가고, 내가 뒤따라 나갔다. 그런데 유찬 형 혼자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이한 데리러 가나?
“형, 어디 가요?”
“이한이 데리러.”
“개인 작업실이요?”
“응. 휴대폰 잘 안 봐서 데리러 가는 게 빨라. 지난번처럼 이한이만 빼고 모이는 게 좀 그래서.”
그래. 그랬었지. 정이한. 마지막 멤버.
“저 같이 가도 돼요?”
“음. 상관없는데 밖에 있어야 할 거야. 작업실 보여주는 거 싫어하거든.”
“괜찮아요.”
얼굴 보기 힘든 사람 위치 파악이나 해두려는 거니까. 솔직히 정이한은 계약 안 할 줄 알았다. 분위기가 워낙 그랬거든. 하는 거 보니 아이돌에 관심 없어 보이기도 했고. 사람 신경 쓰이게 굴긴 했지만 내 스탯 올리는 거에 정신 팔려서 좀 잊고 있었다.
안 보이니까 잊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안 보면 보고 싶은 사이도 아니고. 데뷔 조에서 빠진들 어차피 잘 안 보이던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을 거다.
어쩌다 보니 광신도들 정신도 돌아와서 새로운 멤버가 추가된들 불화도 없을 것 같고. 그런데 정이한이 계약했다. 실장님이 설득한 게 아닐까 추측했으나 중요한 건 결과다. 계약했다는 것.
앞으로 7년은 우리랑 같이 지내야 하는 멤버니까 서식지가 어딘지는 확인해야지. 숙소에서도 도통 마주칠 일이 없어서 생활 패턴을 모르니 곤란했다.
정이한의 개인 작업실은 2층 가장 끝에 있는 작곡실이었다. 유찬 형이 몇 번 두들기더니 불쑥 문을 열었다. 얼굴만 빼꼼 들이밀길래 열린 틈으로 슬쩍 훔쳐봤다. 작은 화분과 언뜻 봐도 여러 해 쓴 듯한 담요가 보였다. 여기서 먹고 자고 하는 거 아냐? 그래서 숙소 안 들어온 거고?
“이한아. 실장님이 오래.”
“……네.”
느릿하고 음울한 어조인데 낮은 목소리가 참 좋다. 그나저나 저 사람은 아직도 우울하네. 새로운 고민 때문인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같은 상태인지 모르겠다. 전자고 후자고 둘 다 거지 같은 건 마찬가지다.
아이돌 할 만한 성격이 아닌 것 같은데.
체력 여유가 있는 걸 확인해 뒀기 때문에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보기 힘든 사람이니까 봤을 때 써야지.
[정이한]
재능: 백 년에 한 번 나올까요? 박자의 신! 그야말로 천재 랩퍼!
개화 조건: 자신감이 중요하죠!
백 년에 한 명 나오는 천재란다. 정이한이 랩 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 시스템이 그렇다니 믿어야지. 언제쯤 랩 하는 거 한 번 들려줄 건지.
그러고 보니 남들은 다 빼어난 장기가 하나씩 있는데 이서호만 애매했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소질 있다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평균 능력치가 좋았다.
춤도 곧잘 추고, 노래도 잘 불렀다. 메인 보컬은 아니어도 유찬 형이 없었다면 리드 보컬도 가능한 정도. 심지어 얼굴은 덕후몰이 하기 좋은 두부상에 강아지상이다.
그런데 왜 이도 저도 다 못한다고 말한 걸까. 오히려 이것도 저것도 평균치 이상이던데. 자기 능력으로 데뷔 조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문제투성이네. 제대로 된 놈이 하나도 없어. 제대로 된 놈이. 정이한도 개화 조건과 상태를 딱 보니 자존감 떡락 상태인 것 같은데.
내가 정이한을 힐끔힐끔 바라볼 때마다 그놈의 고개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몇 번 만나지도, 대화도 거의 나눠 본 적 없는데 왜 저럴까. 익어가는 벼가 따로 없다.
“이한 형.”
“……네.”
“저 작곡실 오늘 처음 가본 건데 나중에 놀러 가도 되죠?”
“…….”
비상계단은 조용했고, 한 층 올라가는 우리의 발소리만 남았다. 일부러 확답형으로 물었는데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무조건 쳐들어갈 궁리였기에 나는 모르는 척 맑게 웃었다.
“허락하시는 거죠? 조만간 놀러 갈게요!”
일부러 정이한의 손을 꽉 잡아 봤다. 낯선 동성에게 손 잡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정이한의 손이 내 안에서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을 빼내지도 않았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채로 서 있을 뿐이다.
진짜 눈치 많이 보는 사람 맞나 봐. 이런 사람이 어떻게 랩퍼를 했지?
나의 편향된 상식으로 봤을 때 랩퍼라는 사람은 죄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디스 랩으로 서로 까면서 노는 걸 즐길 줄 아는.
실제로는 타격받았을지언정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는 단단한 느낌. 정이한의 첫인상은 랩퍼로 찰떡이었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상대방이 공격하면 입 꾹 다물고 바들바들 떨기만 할 것 같다.
하긴, 재능이 성격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이럴 수도 있겠지. 계속 불편해하길래 손을 놓아줬다. 알아내고 싶은 건 알았으니 됐다. 쳐들어가도 거절 안 할 거라는 거.
우호도 미션도 깼으니까 정이한과 어떻게 지낼지 파악하기 위해 강제로 쳐들어갈 생각이다. 아니면 언제 만나냐고.
실장실에 도착했을 때 우리 세 명은 그 자리에 딱 굳어 버렸다. 실장님이 환하게 웃으면서 “얘들아, 들어와도 돼!”라고 말하자 유찬 형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그 뒤를 내가 따랐고 정이한도 주춤거리면서 날 쫓아왔다. 우리가 단체로 고장 난 원인은 하나였다.
우리 중 가장 인상이 사나운 정이한보다 훨씬 더 매섭게 생긴 낯선 남자가 있었다.
곰치네 곰돌이는 테디베어 인형을 떠올리게 했다면, 이 사람은 야생곰 그 자체. 업무용 미소를 지으니 야생곰에서 동물원 곰 정도는 되어 보인다. 그래도 실사인 건 변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박정곤입니다. 여러분의 매니저를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매니저……라고?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숨을 쉴 때마다 재킷이 떡 벌어졌다. 억지로 잠그면 단추가 뜯겨 나갈 것 같은 핏이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매가 위압감을 자랑했다. 실장님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랑하듯 말했다.
“특수부대 출신이셔. 이쪽 업계에서 꽤 오래 일하셔서 발도 넓은 유능한 분이니까 너희도 잘 돌봐 주실 거야.”
이 순간 나는 정이한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우리만 심리적 거리가 5만 킬로는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머지 멤버들은 의외로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나누었다. 내 차례가 되었는데…….
조금 굳어 있었더니 실장님이 날 보고 웃으시면서 손짓하셨다.
“하온이 눈 똥그래진 것 봐. 너무 귀엽다. 여러모로 너희 지켜줄 분이야. 안심해도 돼.”
뒤늦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서 실장실로 들어서며 매니저에게 꾸벅 인사했다. 아니, 너무 놀라서 말이야. 나 낯가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