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재혁이는 다른 소속사의 데뷔 조에 들어갔어. 이게 대답이 됐길 바란다.”
나는 교주의 능력에 내심 감탄했다. 여기서 나간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다른 기획사 데뷔 조에 들어갔다니.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실장님은 여전히 교주를 방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했지만, 이로써 함께 못 한다는 건 확실히 알려주셨다. 충격받은 이서호의 동공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예 연락도 안 받아주던데…….”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양어깨가 축 처졌다. 푹 숙인 고개와 등이 간헐적으로 떨리더니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호야…….”
유찬 형이 안타까워하면서 이서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른 사람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실장님도 묵묵히 지켜만 봤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 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우울한 강아지는 보기 싫어서 내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면 데뷔해.”
“……어?”
이서호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봤다. 커다란 눈에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떠 먹여줘야만 이해하는 바보탱이.
“활동 시기 겹치면 음방에서 만날 거고, 음방 아니더라도 뭐, 예능이나 라디오국에서 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아이돌 활동 영역이야 비슷하잖아. 활동 기간이 아예 안 겹쳐서 못 만난다 쳐도 연말 시상식에서는 보겠네.”
이서호의 눈이 빠르게 끔벅거렸다. 내 말에 귀 기울이는 기색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전에 만나겠다.
“아니지, 시상식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겠다. 추석에 하는 ‘아이돌 추석 대축제’에서 보겠네. 우리도 그쪽도 신인이니까 무조건 참석할 거 아냐.”
그러면서 실장님을 봤다. 프로그램이 있는 건 확인했는데 필수는 아닐지도 모르잖아.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눈치를 살폈다.
전생에서 아이돌 활동을 했을 당시 설과 추석에 하는 아이돌 갈갈이 프로그램 2종은 필수 참석이었다. 음방 PD와 같은 사람이라 참가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기로 유명했다. 그마저도 전생의 내겐 기회가 없었지만.
다행히 실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세계나 다 해 먹는 놈은 똑같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봐, 실장님도 그렇다잖아. 너 연락도 안 받는다면서? 그럼 직접 만나서 물어봐.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나랑 데뷔해야겠네. 난 나갈 생각 없거든.”
“누가 데뷔 안 한대? 나도 데뷔할 거거든? 이건 내 꿈이란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네가 준재혁, 준재혁 노래 부르면서도 붙어 있는 이유가 있겠지. ‘형 따라서 갈 거야!’ 가 아니라 ‘형이 돌아왔으면 좋겠어!’ 따위의 말을 주절거리는 것도.
결국 준재혁도, 지금 이 자리도 놓치기 싫은 것뿐이다. 손에 쥔 건 뭐든지 다 갖고 싶어 하는 어린애의 투정. 이서호가 휴지를 북북 뽑아 들어 코를 풀었다.
“실장님 저 꼭 데뷔할 거예요. 아셨죠?”
“그래. 열심히 하자.”
“네!”
사고 한번 참 단순한 강아지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나중에 만났을 때 괜히 상처받을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그때가 되면 무슨 수를 써서든 같이 만나야겠다. 내 멤버는 내가 지켜야지. 여기 멤버들은 하나같이 연약해서 안심이 안 된다.
난 실패해선 안 되거든. 내 꿈. 그리고 유연이. 낡은 반지하 원룸 벽에 걸려 있던 깨끗한 교복을 떠올렸다. 성공하자!
“자, 그럼 계약해야지? 꼼꼼히 읽어보고, 궁금하거나 협의가 필요한 조항이 있으면 말해.”
실장님이 우리에게 아티스트 계약서를 한 부씩 나눠주셨다. 나는 또다시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씁쓸해졌다. 이건 생각 못 했다.
제일 먼저 유찬 형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읽어보긴 했냐는 물음에 형은 그저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지적인 분위기 풀풀 풍기면서 되게 허술하네. 원래 계약서는 꼼꼼히 읽어봐야 한다.
“서호는 해 바뀌면 직접 사인해도 되고, 부모님 사인받아 와도 돼. 계약 유효 기간은 어차피 내년 3월부터니까.”
“네!”
이서호가 계약서를 품에 안고 환히 웃었다. 저 녀석 엉덩이에 털이 가득하지 않을까.
나는 본인 서명 부분에 또박또박 이름을 적고 유일하게 공란으로 남은 곳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부모님……. 하. 어쩌지. 아무 생각 없이 계약서를 휙 넘겼는데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부모님 뵙기 힘들면 내가 대신 방문해도 돼. 선택지는 두 가지니까 편한 쪽으로 고르렴.]
그걸 본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 실장님을 봤다. 날 지켜보고 계셨는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어주신다. 슬그머니 내밀었더니 조용히 내 계약서를 받아주셨다. 존경하는 갓혜미 실장님께 충성을 다할 거야!
덕분에 다른 멤버들은 어떤지 마음 편히 구경할 수 있었다.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는 듯하던 강현 형은 이내 빼곡하게 적힌 글자가 짜증 난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더니 휘리릭 보는 둥 마는 둥 넘겨보고 사인을 휘갈겼다.
그런데 한 명, 정이한만은 계약서를 넘기지도 않고 계속 첫 장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꼭 금방이라도 ‘저는 못 하겠습니다.’하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정이한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유찬이랑 하온이는 잠깐 남고, 다른 애들은 각자 할 일 하러 가도 돼.”
아, 이번에는 정말 곰치 이야기겠구나. 느낌이 팍 왔다. 웬일로 이서호도 눈치챘는지 나머지 두 사람을 끌고 나갔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먼저 하온아, 정말 미안하다.”
갑자기 실장님이 일어나시더니 허리를 숙였다. 화들짝 놀란 내가 당황해서 ‘어, 어!’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놀라서 눈을 깜박거리다가 가까스로 정신 차리고 말했다.
“아니에요. 실장님이 왜…….”
“내가 우겨서 숙소로 옮긴 거잖아.”
실장님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날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뒷덜미가 간질거렸다.
“설마 그런 짓을 할 줄이야. 정말 미안해. 내가 할 말이 없어.”
상냥한 실장님. 나는 끄떡없다고 알려드려야지.
“아니에요. 저 배려해 주신 거 알아요. 데뷔 조 숙소 가면 제가 이전 리더분 침대 쓰는 거였잖아요. 실장님이 넣는 거랑 유찬 형이 저 데리고 들어가는 건 의미가 다르니까요. 그렇죠?”
“네가 왜 날 위로하고 있니.”
실장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피었다. 아, 이거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서 헤실헤실 웃어버렸다. 그러자 날 지그시 보던 실장님도 못 당해내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하온이는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어.”
내가? 의외의 평가였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불쾌감만 주던 사람이었는데. 마주 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발끝이 베베 꼬이는 기분이었다.
“맞아요.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유찬 형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상냥한 반달 눈이 날 보고 있었다. 다정한 시선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날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너희도 연습해야 하니까 본론을 이야기할게. 김진수는 반성의 기미가 없어서 연습생 전속 계약 해지 처리됐어. 같은 숙소의 다른 애들도 패널티로 감점 먹었고.”
예상보다 강한 처벌이었다. 실장님이 내게 사과한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지만……. 이건 나를 괴롭혔던 상대가 제대로 처벌받는 첫 번째 사례였다.
내게 관대한 이곳이 더욱 좋아졌다. 어쩌면 내게도 안티보다 팬이 더 많이 생길지도 모른다. 신이 말한 것처럼 사랑받는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좀 흥분된다.
데뷔곡 음원 녹음 전까지 최대한 노래와 춤 스탯을 많이 올려야겠다. 최소한의 체력만 유지하며 남는 시간은 전부 연습에만 매진할 각오를 했다. 영원히 박제되어서 남는 건데 당연히 올릴 수 있을 만큼 올려야 하지 않겠어?
솔직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상하게 불안하진 않았다.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실장실을 나왔더니 이서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긴 했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눈치 빠른 유찬 형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긴 뒤 자리를 비켜줬다.
“야.”
“왜.”
“아까 고마웠다.”
“뭐가?”
“재혁 형이랑 만날 수 있다고 알려준 거 고마웠다고. 형이 원래 살던 자취방도 찾아갔었는데, 텅텅 비어있었거든. 여기서 기다리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답답했어. 네 덕분이야.”
이서호는 이야기하면서 민망한지 자꾸 벽에 등허리를 툭툭 부딪치고 있었다. 교주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 끊었다는 건 알았는데 집도 이사 갔다고? 그러니 저 광신도가 더 미쳐 날뛰었지.
이것까지 전부 계획에 있었던 거라면 참 대단한 사람이다. 누구도 자신의 자리에 들어와 쉽게 동화되지 못하게, 시간이 해결해 줄 때까지 꽉 쥐고 있을 생각이었다는 거니까.
혹시 모르지. 시간이 해결해 줄 때쯤 연락해서 다시 한번 들쑤실지도. 회사랑 멤버들이 완전히 틀어져서 둘 중 하나가 포기하게끔 말이다.
“그리고…….”
이서호가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몇 번 헛기침 하더니 그 큰 목소리의 볼륨을 낮춰 말했다.
“솔직히 네 노래 좋았어. 오디션 곡은 별로였지만.”
“……나도 알아.”
하, 내 흑역사. 실장님도 너무하시지.
나는 후자를 안다고 한 건데 이서호는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건방지다면서 투덜거렸다. 겸손을 알아야 한단다. 뭐라는 거야.
“오디션 볼 때 못 부른 거 안다고. 날 뭐로 보는 거야?”
“재수 없는 재능충.”
“칭찬이야, 욕이야.”
“칭찬인 동시에 욕이지. 그걸 물어봐야 아냐? 똑똑한 척 혼자 다 하더니 너도 나랑 별 차이 없네.”
“와. 그건 좀 너무 간 거 아냐? 진심 상처받았어.”
“……역시 너 짜증 나.”
왠지 웃음이 비죽 튀어나왔다. 참지 않고 터트렸더니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이서호가 날 노려봤다. 그러다가 저도 똑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밉상인데 희한하게 많이 밉지는 않단 말이야. 연습 열심히 해라. 나는 내 연습하러 갈 테니까.”
“너도 마찬가지야. 진짜 밉상인데 귀여워.”
“내가 형이거든? 귀엽다가 뭐냐? 귀엽다가?”
삐딱한 어조에 적의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멍멍거리는 귀여운 강아지였다. 그것도, 아주 맹하고 순진한 시골 강아지.
“그럼 귀엽게 생기질 말던가.”
“종이 인형 주제에.”
“내가 좀 인형같이 생기긴 했어.”
이서호는 망연한 얼굴로 날 보더니 고개 저었다.
“내가 말을 말지. 간다.”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