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5화 (25/320)

25.

나는 이서호를 경계하면서 유찬 형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날 구해준 대가로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러줘야지. 이서호는 언제쯤 나한테 형 취급받으려나.

“방으로 들어가자. 거실에서 재우려고 데려온 거 아니야. 이서호, 너도 지금 네가 억지 부린다는 거 알고 있지? 빨리 받아들여.”

“……몰라. 난 그래도 재혁 형 포기 못 해.”

유찬 형이 날 잡아끌었다. 몇 걸음 채 옮기기 전에 이서호가 신경 쓰여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울적한 얼굴이 눈앞에서 간식을 빼앗긴 대형견 같았다. 축 처진 어깨가 바닥까지 닿겠어.

손을 흔들어서 시선을 끌었더니 날 바라본다. 나는 상큼한 미소를 한 번 지어준 뒤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너 진짜 짜증 나!”

유치한 도발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빼액 소리친 이서호의 씩씩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꽝!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이 세게 닫혔다.

쟤는 저 정도 텐션이 딱 좋다. 뒤에서 키득거리면서 웃고 있었더니 유찬 형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의외로 너랑 서호 사이 괜찮은 거 같네.”

“사이좋아 보여요?”

예상치 못한 평가에 내 행동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서호를 상당히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사과받은 뒤론 녀석이 아무리 땍땍거려도 체력 요동치는 일도 없었고.

“응. 내 예상이랑 많이 달라.”

“제가 좀 이서호를 귀여워하긴 하죠. 얼굴이랑 성격이랑 둘 다 순딩하니 귀엽잖아요.”

“……그 말 들으면 서호 발작하겠다.”

“말했는데 좋아하던데요.”

황당해하는 유찬 형을 향해 어깨를 으쓱인 뒤 침대 옆에 가방을 내려놨다. 아까부터 불쾌하게 하던 빨랫거리를 집어 들었더니 형이 팔을 뻗어 낚아채듯 가져갔다.

“왜요?”

“내가 갖다 놓을게.”

“아, 고맙습니다.”

유찬 형이 자신의 빨랫거리와 내 걸 합쳐 들고 방을 나섰고, 그사이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거실로 나가니 다용도실에 빨래를 두고 온 유찬 형이 방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왜!”

잔뜩 심통 난 이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찬 형이 안을 들여다봤다.

“이한이는 오늘도 안 올 모양이네. 강현이는?”

“보면 알잖아. 아직 연습실인가 보지.”

셋이 같이 쓰나 보네. 그러고 보니 여기는 투룸이었다. 곰치네가 워낙 바글바글해서 거기가 더 좁아 보였는데 단순히 크기만 놓고 보면 이쪽이 훨씬 작은 평수였다. 유찬 형이 서호네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욕실 문을 열었다.

씻고 나온 뒤 나는 곧장 침대에 올랐다. 유찬 형은 아직 이서호랑 이야기 중인 것 같았다. 우울해 보였던 정이한이 신경 쓰였지만 체력이 간당간당했다. 정이한보다는 내 체력 관리가 중요했다. 상태 이상 사절.

***

연습생을 관리하는 전민수 팀장은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김진수를 보고 있었다. 주말 출근의 짜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멍청한 새끼가……. 당장이라도 입안에 맴도는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김진수 씨. 왜 불렀는지 설명은 했으니 이해하셨죠?”

“……네.”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김진수가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만든 건 박유찬이다. 김혜미 실장은 데뷔 조 멤버들을 살뜰히 챙기며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박유찬의 말을 믿고 있겠지. 거짓말이라고 우겨봤자 제 이미지만 더 나빠질 뿐이다. 실장실에 불려 올 때부터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예상했던 김진수는 최선을 다해 고개 숙였다.

“실장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하지만 실제 마음은 정반대였다.

억울하다. 너무 억울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놈들도 동조했는데, 왜 나만 여기 불려 나온 건데. 왜 나만 처벌받는 건데?

김진수는 머릿속에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면서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김혜미 실장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재, 재혁 형 자리를 빼앗아서, 제가, 추, 충동적으로……. 자, 자, 잘못했어요. 저 진짜 아이돌 되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요. 이렇게 쫓아내지 마세요. 제발, 제발요.”

진하온이 보면 ‘누구세요?’ 하며 낯설어하겠다 싶을 만큼, 지금 김혜미 실장의 얼굴에 온기란 없었다. 서늘한 눈빛에 김진수의 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이 업계는 좁다. 특히 연습생들을 둘러싼 소문은 빠르게 퍼지는 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쫓겨나면 다른 기획사로 옮기기도 어려울 터였다.

무조건 빌고, 빌고, 또 빌었다. 처음이니까 한 번쯤은 봐줄 거야. 불쌍한 척,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면 한 번쯤은 봐주시겠지. 하지만 자존심 내려놓고 빌면 빌수록 화가 울컥울컥 치밀었다.

「네가 데뷔 조에 못 들어갔다고? 새로운 연생이 왔어? 내가 그만둘 때 너 추천했거든. 우리 애들 중에 너만큼 잘 생기고 실력 좋은 애 없잖아. 당장 데뷔해도 될 정도인데 왜 진수가 아닐까. 이상하네.」

‘맞아, 재혁 형의 말이 전부 옳아. 내가 아닌 게 이상하잖아.’

전부 그 재수 없는 낙하산 새끼 때문이다. 더러운 수 써서 들어온 주제에. 원래 내 자리를 빼앗은 거니까 위협해서 쫓아낸들 문제 될 건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당한 행동이었다.

“진하온 씨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화를 삭이던 김진수는 김혜미 실장의 말을 한 박자 늦게 들었다.

토해내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 해서는 안 되는 것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라는 거지? 뭔가 듣길 원하는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김진수는 평소 자신을 예뻐하던 전민수 팀장을 향해 도움을 구했다. 전민수 팀장이 입 모양으로 ‘사과.’를 만들면서 눈치 줬다. 그걸 김혜미가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사, 사과요! 사과할게요! 진하온한테도 사과할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저 진짜 아이돌이 꿈이에요. 꼭, 꼭 이루고 싶은 꿈이요…….”

“누가 하지 말래요? 아이돌 하고 싶으면 하세요.”

“그, 그럼!”

김진수가 희망을 담아 김혜미 실장을 봤다. 거무죽죽했던 얼굴에 희미하게 빛이 들었다.

“다른 기획사 가서 해요. 우리는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나중에 인성 문제 터져서 골치 아파지고 싶진 않거든요.”

“미, 밀친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애가 생각보다 힘이 없어서……. 그냥 가, 가볍게 살짝 민 건데…….”

“이야기 끝났으니 나가보세요. 연습생 전속 계약 해지는 제 선에서 처리할 테니까.”

전민수 팀장의 속이 타들어 갔다. 저 멍청한 놈이 마지막 기회마저 스스로 날려 먹었다. 사고를 쳐도 이런 대형 사고를 쳤으니 김진수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나마 다른 애들은 손 안 댔다고 하니 다행이지.

SR 엔터가 짧은 기간에 승승장구한 건 전부 대표와 김혜미 실장의 원석 보는 안목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장일치로 ‘쟤는 되겠어.’ 라고 평가한 사람은 무조건 뜬다.

진하온은 그런 대표가 캐스팅했고, 김혜미 실장이 이상할 정도로 예뻐하고 있는 연습생이었다. 오디션도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했으며, 동시에 데뷔 조 멤버들에게 인사시켰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초유의 사태에 회사 내에서는 웅성웅성 말이 돌았다. 하지만 적어도 대표와 실장 두 사람이 모두 진하온을 ‘성공할 재목’으로 평가했다는 걸 모르는 직원은 없었다.

그러니 진하온에게는 무조건 잘해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건만.

“데리고 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

전민수 팀장이 엎드려있는 김진수의 팔을 꿰어 잡아당겼다. 그제야 김진수의 머릿속에 분노가 휘발되었다. 분노 대신 자리 잡은 건 두려움이었다.

이대로 쫓겨나면 앞으로는 뭘 하며 살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17살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해 해가 바뀌면 21살이 된다. 이 길이 아니면 미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실장님, 실장님! 저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실장님!”

“진수야.”

“팀장님, 말 좀 해주세요. 저 진짜, 진짜 아이돌 하고 싶어요……. 진짜로요…….”

전민수 팀장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제 안위가 더 중요했다. 잘못하면 같이 잘릴 판이다. 그러게 왜 애를 팼어. 차라리 없는 애 취급했으면 조용히 넘어갔을걸.

전민수 팀장은 묵묵히 김진수를 끌어냈다.

***

김혜미는 의자에 몸을 묻으면서 생각했다.

원래 준재혁이 포함되었던 디아스는 1월에 데뷔시킬 예정이었다. 작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고, 멤버들의 비공개 사진과 자체 콘텐츠 영상 역시 가득했다.

하지만 준재혁이 왠지 모르게 걸려서, 모든 걸 홀딩시킨 채 그를 주시했었다. 노래와 비주얼, 멤버들에게 신뢰받고 팬덤의 중심을 잡아주는 리더십까지. 흠잡을 데 없는 멤버임에도 그랬다.

그런데 자꾸만 무언가 찝찝했다. 그린 듯한 미소에서 이따금 위화감이 들었다. 이대로 데뷔시키면 안 될 것 같은 예감. 준재혁의 뒷조사를 해봤지만 이렇다 할 결격 사유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찝찝했다.

고등학교 동창생들 사이에서 신망도 두터웠고, 학생회장 출신에 공부도 잘했다. 현재는 명문대 재학생으로 연습생 생활하면서 학업도 잡은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찝찝해도 넘어갔던 건데……. 우연히 준재혁을 본 박태민 대표의 조카를 통해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설명이요? 안 믿을 걸요……. 준재혁 추종자들은 맹목적이에요. 걔를 위해 뭐든 다 해요. 자아라는 게 없나 싶을 정도로.」

준재혁은 박태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미안했다고 전해주세요. 제 친구들이 조금 괴롭힌 것 같더라고요. 저도 나중에 알았는데 미리 알았다면 막았을 거예요. 그쪽의 일방적인 말로 절 오해하신 건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죠.」

연습생 전속 계약 해지를 끝낸 뒤 준재혁이 나가면서 말했다.

「음. 그런데 실장님. 저 없으면 조금 곤란하실지도 몰라요.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너무 늦지 않게 연락해 주시면 도와드릴게요.」

당당한 태도, 자신이 다른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확신. 늦기 전에 연락하는 게 좋을 거라는 은근한 협박까지.

준재혁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처음으로 본성을 드러냈던 그 순간을 김혜미 실장은 좀처럼 잊을 수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 준재혁은 멤버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대표와 김혜미는 SR에서 준재혁을 데뷔시킬 생각이 없었다. 준재혁이 없어서 안 된다면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면 된다. 그걸 위해서는 솎아내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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