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옆 동이라면서 왜 지하로 가요?”
“입구에 사생 있어서 그래.”
“아! 맞다. 형.”
“응?”
나는 오늘 아침저녁으로 만났던 여학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데뷔하면 사생이랑 말 섞지 말라고 하긴 하는데, 지금은 연생이라 딱히 정해진 규칙은 없어. 선 넘는 애들이 다시 생기면 조치해줄 텐데 지금 모인 애들은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편이라.”
“최소한의 선이요?”
오물투척 같은 거?
“응. 따라 들어오거나 몸을 만지려고 하는 애들. 예전에 그런 적 있어서 법적으로 조치한 적 있대. 그 뒤로 뭐 어쩌다 다시 모였는진 모르겠지만 고소하기 애매하다더라. 공동 현관 입구에 몇 명씩 뭉쳐 있는 게 전부라서.”
“아하.”
‘선’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아까 날 따라 들어올 수 있었음에도 유리문 밖에서 얌전히 손만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선을 지킨 거였구나.
“어쨌든 사생이랑은 되도록 엮이지 않는 게 제일 좋아. 대화하게 되면 기억에 남을 수 있잖아. 그러다 실수로 아는 척이라도 해 봐. 그러면 사생이랑 친목한다는 인식 심어질 수 있거든. 좋을 게 없어.”
“그렇구나.”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았다. 이 녀석 도움 되네.
“원래라면 우리랑 같은 숙소 썼어야 하는데 괜히 괴로운 경험만 했네. 하온아. 진짜 여러 가지로 미안한 게 너무 많아.”
“뭐 딱히 괴롭진 않았어요.”
“넌 또…….”
또? 뭐가 또? 박유찬의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되게 울컥해 보이는 표정인데 무슨 생각 하는 거냐. 박유찬이 서글픈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괜찮은 척하는 거 아니고? 나도, 서호도 너 상처 줬잖아.”
척이 아니라 진짜 괜찮다. 곰치같이 유치한 애들은 인내심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며칠 무시하면 잠만 자러 왔다 갔다 하는 날 내버려 뒀을 거다. 이 세계는 확실히 내게 너그러우니까.
“힘든 것도, 실망도 기대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애초에 아무것도 없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어요.”
박유찬이 입을 다물었다. 너무 진지하게 말했나. 나는 한껏 입꼬리와 눈을 접어 웃으면서 팔꿈치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뭘 또 그렇게 심각해요? 고, 아니, 그 숙소 애들한테 하는 소리인데.”
곰치 소리가 입으로 나올 뻔했다. 빠르게 수습했으니 눈치 못 챘겠지?
“나도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겠지?”
“당연하죠. 처음부터 특별해지는 관계가 어딨어요? 전부 서서히 변해가는 거지.”
“나한테 너는 이미 특별한 사람이야.”
“제가 형한테요?”
“그럼. 우리 막내잖아.”
이게 우호도 좋아함의 위엄인가. 역시 사람 쉽게 좋아하는 타입인 것 같다. 아마 박유찬의 인간관계를 우호도로 분류해 보면 대부분 ‘좋아함’과 ‘매우 좋아함’으로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럼 저한테도 형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할게요.”
“그렇게 가볍게?”
“형은 뭐 얼마나 무겁다고.”
박유찬이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나한테 신뢰받기 위해 노력하겠단다. 노력할 건 없는데. 그저 지금처럼 친근하게 날 봐주면 된다. 내가 갖고 싶었던 건 이런 거니까. 친구.
***
데뷔 조 숙소에 들어가니 거실 소파에 이서호가 앉아 있었다. 나와 눈 마주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입을 뻐끔거렸다. 막 토해내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삼키느라 곤욕스러워 보였다.
“……왜. 왜 데려와? 유찬 형,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했잖아!”
꾹 참았던 말이 터지자 화르륵 불붙는 건 순식간이었다.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더니 나름 치열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교주의 승리.
“도대체 서호는 왜 안 믿는지 모르겠어. 아까 진수한테 설명한 거랑 똑같이 말했는데.”
머리 나쁜 광신도라 그렇다. 그러면 곰치 머리가 얘보다 더 좋다는 뜻인가? 곰치……. 의외로 똑똑했군.
“믿고 싶지 않은 거겠죠. 그만큼 좋아했다는 의미니까.”
“유찬 형!”
“서호야, 하온이한테 화풀이하는 거 그만하라고 했지? 하온아, 이쪽으로 와.”
“어디로 데려가려고? 형 방으로? 거기 재혁 형 방이잖아! 난 아직 반대야!”
이서호가 와다다 쏘아붙이듯이 소리 질렀다.
“우리 다 같이 살게 된 거 전부 재혁 형 덕분이잖아. 형이 실장님 설득해서 데뷔 조 돈독해져야 한다고 숙소 하나로 모은 거잖아! 그런데 재혁 형 쫓아낸 쟤가 형 침대를 쓰게 해? 말도 안 되잖아! 난 찬성 못 해!”
서호가 고치지 못한 손버릇으로 내 팔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박유찬이 딱딱한 얼굴로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온이 오해한 거라고 차근차근 알려줬는데 왜 자꾸 이래? 그리고 재혁이가 우리 전화 안 받는 이유 모르겠어?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리야. 우리랑도 연 끊은 거라고.”
“……형은 지금 회사에 화 나서 그런 거야! 억울하게 잘리면 당연히 화나지! 그런데 우리가 형 자리까지 다른 사람한테 줘 버리면, 형이 돌아왔을 때 속상하잖아……. 우리는 형 기다려야 하는 거잖아…….”
시끄럽게 지르던 목소리가 점차 기어들어 가면서 촉촉해졌다. 그게 문제였군. 쟤는 아직도 교주가 부활하길 기다리는 광신도였다. 사이비 교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다. 이성과 상식 따위 통하지 않는 맹목적인 충성.
저런 종교는 한 번 빠지면 못 나온다던데. 새삼 박유찬이 대단해 보였다. 푹 빠졌다가 제힘으로 기어 나온 거잖아. 그러면 곰치도? 아니, 그건 좀. 거기까진 내가 선 넘은 거다.
곰치한테는 박유찬이 대신관 정도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그렇게 설설 기었지. 대신관님이 하시는 말씀이라 이해했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원래 두 사람은 친한 친구였다니까.
반면 서호한테는 멤버 모두가 동등했고, 유일하게 준재혁만 삐죽 솟은 교주였던 거다. 그러니까 박유찬의 설득도 안 통하는 거고. 저건 답이 없다. 골치 아프네.
일단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줘보자. 너의 교주님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만 어필하면 중립으로 바뀔 것 같으니까.
“그럼 난 거실에서 잘게. 어차피 원래 숙소로는 못 돌아가.”
실장님한테 허락받은 일이랬다. 여기서 돌아가면 ‘나는 멤버들과 같이 살기 싫어요.’하고 반항하는 일밖에 더 되겠어? 우리 사이 나쁘다고 유세 떠는 짓이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절대 그럴 순 없지.
“안 돼. 잠은 편하게 자야지.”
“여기 소파도 좋아 보이는데요, 뭐.”
“그냥 너 쓰던 숙소로 돌아가면 되잖아!”
“그건 안 돼.”
박유찬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형한테 배신당한 서호가 억울한 듯 “욱, 윽!”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김진수가 하온이 내동댕이치는 걸 내가 봤는데 어떻게 돌려보내.”
이서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한참 굳어 있다가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게 꽤 놀란 눈치였다. 커다란 눈이 끔뻑끔뻑 빠르게 움직였다.
“……자, 잠깐만. 뭐? 뭐라고 했어?”
박유찬은 자신이 본 걸 이서호에게 설명했다. 날 집어 던지고, 올라타서 때리려고 했다고. 처리 속도가 늦는 건지 강아지는 멍하니 서 있다가 화들짝 정신 차렸다.
“진수 형이 뭘 했다고? 미친 거 아냐? 아니 종잇장 같은 애한테 뭘 해? 야! 너 어디 부러진 거 아냐? 좀 봐봐.”
얘가 왜 이러실까. 나와 박유찬이 황당하게 이서호를 봤다. 우리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서호가 더듬더듬 내 팔과 허리 등을 만졌다.
“아파? 아프냐? 어디 부딪혔어? 왜 말을 안 해? 입 안이라도 터졌어?”
“……아니. 너 하는 짓이 황당해서 그렇지.”
“내가 뭐!”
“나 걱정하고 있잖아, 지금.”
“당연히 걱정되지! 진수 형 덩치가 얼마나 큰데! 너 같은 건 한 입 거리잖아.”
이해를 못 하고 있네. 박유찬이 푸흡, 하고 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호 귀에는 저 소리가 안 들리는 모양이다. 친절한 내가 설명해 줘야지.
“여기서 나 제일 싫어하는 건 넌데 날 걱정하는 게 웃기잖아.”
“너 싫은 건 맞는데 그거랑 이거는 별개잖아! 가뜩이나 약한 애한테…….”
“나 안 약해. 체력이 좀 달릴 뿐이지.”
“그게 약한 거잖아! 야, 누가 또 너한테 못된 짓 하면 나 불러!”
와다다 말을 쏟아내던 이서호가 갑자기 입을 오므렸다. 그리고는 크흠, 커험, 크흐으음. 헛기침한 뒤 말했다.
“그, 그래도 여전히 너 싫어하니까 오해하지 마라?”
왜 저러나 했네.
“오해 안 하고, 나는 내가 알아서 하니까 너는 신경 끄세요.”
몇 번이고 말하지만, 그건 건강 문제가 아니라 상태 이상이었다. 알려줄 방법이 없으니 오해도 풀 길이 없다. 이서호는 콧방귀를 뀐 뒤 박유찬을 쏘아봤다.
“유찬 형. 실장님한테 말할 거지?”
“응. 당연히 말해야지.”
“내일 바로 말해. 그래야 또 안 그러지.”
“그래. 그럴게.”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서호.”
“왜.”
“언제까지 더듬을 거야?”
“좀 벗어 봐. 만져서는 잘 모르겠으니까 제대로 봐야겠다.”
“……미쳤냐?”
소름 돋는 놈이네. 나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불쾌감을 턱턱 내비쳤다. 그런데도 이놈의 급발진 강아지는 자꾸 내 옷을 들추며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려 들었다. 우리 이럴 사이 아니잖아?
“어딜 다쳤는지 봐야 알 거 아냐!”
“됐어. 안 다쳤어. 좀 떨어져. 징그러우니까.”
“나라고 좋은 줄 알아? 나도 징그럽거든!”
“그럼 떨어지라고!”
참지 못한 내가 기어코 소리 질렀다. 갑자기 이서호가 눈을 빛냈다. 내 약점이라도 찾은 것처럼 득의양양한 얼굴이었다. 하, 또 뭔데. 이 녀석 진짜 피곤하게 구네.
하지만 희한하게 체력 감소량은 달라지지 않았다. 평소에 집에 있을 때랑 비슷했다. 나 변태였나? 왜 안정적인데? 내 심리 상태 반영하는 거 아니었어? 진짜 알다가도 모를 체력 시스템 같으니라고.
“너 이런 거 약하구나? 간지럼타나?”
씨익, 웃은 이서호는 급기야 손가락 열 개를 마구잡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진짜 미쳤네!
“야, 헉, 간지럽잖아! 으하하!”
나는 이런 거에 면역력이 없단 말이야. 도와줘! 박유찬! 도와주면 형으로 인정할게! 박유찬을 향해 손을 뻗었더니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졌다.
“진수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테니 장난 그만 쳐.”
“어? 맞다. 야, 괜찮냐? 미안하다. 멀쩡해 보이길래 안심돼서.”
아직도 간지럼 태우기의 여운이 남아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이서호, 요주의 광신도 같으니라고.
“안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