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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13화 (13/320)

13.

더군다나 반지하라서 쿵쿵 뛰어도 따지러 올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반대편 집이 비어 있어 노래 부르기에도 좋았고. 여길 떠나서 굳이 불편한 곳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데 실장님이 내 마음을 들여다본 듯 말했다.

“너 미행하는 애들이 열린 창틈으로 편지 넣고, 너 잘 때 지켜볼 수 있어. 그것뿐이니? 집 비웠을 때 소형 카메라를 설치해 놓기라도 하면? 그걸 걔들끼리만 볼 것 같아? 너도 모르는 사이 네 일거수일투족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이야.”

아, 그건 좀 소름인데. 연습생한테 그렇게까지 한다고? 그것도 나한테?

“하온아. 며칠만 1군 애들이랑 같이 지내면 안 될까? 며칠 안에 데뷔 조 애들 설득할게. 그러면 숙소 옮기자. 같은 아파트라 적응하기도 쉬울 거고, 무엇보다 회사랑 가까우니까 너도 덜 피곤할 거야.”

이야기를 안 들었으면 모를까, 이미 들은 이상 여기 사는 내내 찝찝할 것 같았다.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니까 저렇게 심각하신 걸 테고. 이런 문제는 나보다 실장님 생각이 맞겠지.

거리가 가까우면 자연히 트레이닝 시간도 늘어난다. 그러면 경험치 올리는 것도 지금보다 낫지 않을까? 낯선 애들이랑 지내는 건 피곤해도 잠만 자러 들어가면 되니까…….

답은 나왔네.

“옮길게요. 언제 이사 갈까요?”

실장님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저렇게 기뻐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옮길 걸 그랬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기뻐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 옮길 수 있니? 옷이랑 중요한 것들만 갖고 오면 돼. 생필품은 숙소에 다 있어.”

“네. 내일 옮길게요. 짐도 별로 없거든요.”

“그러면 내일 데리러 올게. 짐 챙겨서 기다릴래?”

“어……. 하지만.”

“그 김에 나도 겸사겸사 늦출하고.”

실장님이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윙크를 보내오셨다. 늦출이 늦은 출근인가 보다. 내 마음 편하게 해주려는 게 뻔히 보여서 몽글몽글해졌다. 이런 배려는 처음 받아 봤다. 진짜 너무 좋아. 그저 빛! 빛혜미 실장님!

“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10시까지 올 테니까 느긋하게 준비해.”

“넵!”

실장님을 배웅한 뒤 집으로 들어가 곧장 가방의 입을 벌렸다. 짐 챙기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교복을 챙길지 말지 한참 고민했다. 나는 입은 적 없는, 오직 유연이의 과거에만 존재하는 교복이 꼭 그 아이인 것만 같았다. 어떡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같이 챙겨버렸다. 너를 잊지 않기 위해.

***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이 떠져서 일어나자마자 내 상태 창을 들여다봤다. 노래 스탯은 B. B-에서 한 등급 올렸지만 당연히 메인 보컬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최소 A- 이상은 찍어야 ‘너 메인 보컬 하렴.’ 하고 포지션이 확정될 것 같았다.

하지만 포지션 확정만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노래 스탯은 아무리 못해도 S까지 올려야지. S+까지 올리면 더 좋고.

문제는 춤인데……. 나는 여전히 C+에 머물러 있는 춤 스탯을 바라봤다. 포인트 얻으면 춤에 투자해야 하나? 아니지. 춤도 코칭 받으면 쑥쑥 올라갈 테니까 노래에 집중하는 게 맞겠지?

내 변덕스러운 마음을 꽉 붙잡은 뒤 시계를 보니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백팩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로 짐이 단출했기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잠시 기다리자 실장님의 차가 보였다. 얼른 조수석에 올라탄 뒤 가방을 품에 안았다.

“짐이 그게 전부니?”

“네.”

“겨울옷만 챙긴 거야?”

“아뇨. 사계절 다 있는데요. 트레이닝복 두 벌, 셔츠 세 장, 바지 두 개. 외투는 입고 있고요.”

뭐 문제라도 있나? 내가 갸웃거리자 실장님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미소 지었다. 물론 여기에 교복이랑 노트북까지 들어가 있다. 야무지게 잘 싼 나를 칭찬해.

빵빵한 만큼 푹신한 가방을 품에 안고 있으려니 아주 노곤해졌다. 따뜻한 프라이팬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 설탕이라도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

가방은 실장님의 차에 두고 출근해 언제나처럼 보컬 연습에 매진했다. 한참 연습한 뒤 잠깐 쉬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것도 슬슬 끝나가서 정수기의 물을 담는 데 보컬 쌤이 빼꼼 얼굴을 들이미셨다.

“하온이 좀 쉬었어?”

“네. 물만 마시면 시작해도 돼요!”

미지근하게 온도를 맞춘 생수를 꼴깍꼴깍 마셨다. 체력 회복할 때 뭔가를 먹으면 회복률이 올라간다. 단, 내가 배부름을 느끼거나 먹기 싫을 때는 소용 없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연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습하기 직전 물을 먹으면서 체력 회복하는 게 루틴이 되었다.

“쌤 저 숙소 들어가기로 했어요.”

“벌써? 빠르네? 데뷔곡 받으면 들어갈 줄 알았는데. 낯 가린다면서?”

“네. 근데 제가 반지하 사는 게 걱정된다고 실장님이 다시 설득하시더라고요. 저한테 사생이 많이 붙을 것 같대요.”

“어머, 혜미 실장님이 잘하셨네. 나도 너 사생 많이 붙을 것 같더라.”

“그래요? 어떻게 알아요?”

홀짝홀짝. 두 번째 종이컵을 비웠다.

“본인 매력 있는 걸 너무 모르는 것도 걱정이다.”

저 매력 스탯 높은 거 잘 아는데요?

나만큼 잘 아는 사람 없을 건데?

“저 매력적인 거 저도 알죠~”

농담 섞어 말했더니 까르르, 맑은 웃음이 돌아왔다. 쌤이 기쁘시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그렇게 잘 알면서 어떻게 아냐고 왜 물어봐?”

나는 어깨를 으쓱였지만, 의아한 건 여전했다. 내가 사생 심리를 어떻게 아냔 말이지. 왜 쫓아다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너는 사람 홀리는 경향이 있어.”

“제가요?”

“응. 아이돌 안 했으면 형사나, 프로파일러가 천직이었을걸?”

“엥? 갑자기 형사요?”

“하온이가 눈 마주치면서 ‘사실대로 말해요.’라고 하면 누구라도 떠벌떠벌 불어버릴 것 같거든. 그런 게 바로 홀린다는 거야.”

장난기 가득한 어조와 눈웃음을 보니 진심은 1%도 없었다. 내가 샐쭉거리면서 웃자 쌤이 따라서 깔깔거렸다. 다 마신 종이컵을 통에 넣고 녹음 부스 문을 열었다.

“연습 재개?”

“네!”

씩씩하게 대답하자 쌤이 엄지를 척 들어 올리셨다. 딱 기다리고 있어라. 경험치야!

그렇게 한참 연습에 집중하던 중 손님이 찾아왔다. 실장님이셨다.

“아버님께서 곧 오실 것 같은데…….”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내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이럴 수가…….

“……갑자기요?”

“응. 사실 어제 이 얘기하려고 하온이 찾은 건데…….”

실장님이 머쓱해 하셨다. 용건을 깜박하고 말 못 했다는 건데 잊을 만했지. 이야기 들어보니 갑자기 잡힌 출장 때문에 오늘 오신단다. 그 출장 때문에 오늘 하루가 비게 되었다고. 이렇게까지 성실하게 챙겨줄 줄은 몰랐는데.

조금 당혹스럽지만 잘된 일이다. 그보다…….

떨리네. 순식간에 입안이 말라서 버석버석한 사막의 모래알을 입에 가득 물고 있는 것 같았다. 혀끝으로 입술을 축인 뒤 실장님을 따라나섰다. 실장님이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셨다. 내 긴장을 알아차리신 모양이다.

“내가 다 말할 거니까 너는 옆에 있기만 해.”

“네.”

아, 벌써 기운 빨린다. 남은 체력 괜찮나? 55네. 이 정도면 간당간당하게 버틸 수 있을지도. 게다가 우리 아버지도 아니고 남의 아버지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똑같다고 내가 긴장할 필요는 없다. 객관적으로는 참 잘 아는데 이게 안 된단 말이지. 불편하게.

***

방문자용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 그중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중년 남자가 눈에 띄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눈썹이 옅고 전체적인 인상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생긴 것만 보면 절대로 제 아이를 방치할 것 같지 않은, 상냥해 보이는 사람.

의외로 넉넉하게 쥐여주던 용돈은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였던 걸까? 우리 아버지보다는 확실히 낫네. 그래봤자 도토리 키재기지만. 이제는 이유를 알기에 원망할 수도 없는 원망스러운 상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닮은 건 목소리뿐이라 정말 다행이다. 나는 무척 어색해하면서 인사했다. 우리는 초면이지만, 저 사람한테는 아닌 거 맞겠지? 너 누구냐? 유연이는 어딨어? 이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

조금 긴장돼서 눈치 보고 있는데 그쪽에서 먼저 날 보면서 “오랜만이다.”하고 인사했다. 진짜 이상한 기분이다. 친아들이 아닌데 못 알아본다는 거. 신이 짠 판이고, 수작질이니 한낱 인간이 뭐 어떻게 알아보겠냐마는.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다. 내가 뻐꾸기 새끼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안녕하십니까. 진승철입니다.”

아버지가 실장님을 향해 인사했다. 실장님은 사무용 미소를 탑재한 채 우아하게 응대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실장실로 유도되었다. 와, 우리 실장님 멋있어. 라고 찬양하면서 실장님만 보고 싶은데…….

왜 자꾸 날 힐끔거리는 거지? 아버지의 시선이 따가워서 미치겠다. 복잡해 보이는 시선을 무시하기엔, 우리는 너무 좁은 공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오는 게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날 볼 때마다 실장님도 날 봤고. 미치겠다. 미치겠다고! 너무 불편해.

체력 걱정된다. 헉! 25밖에 안 되네? 뭐 이렇게 뚝뚝 떨어져. 여기서 발작할 수 없으니 상태 좀 지켜보다가 죽어도 고 스킬을 써야겠다.

회복까지 한 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잠깐 어디 좀 틀어박히면 되겠지. 빈 보컬룸 하나 찾아서 문 잠그고 한숨 자자.

다른 쪽으로 열심히 주의를 돌렸더니 체력 떨어지는 속도가 늦춰졌다.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좋네, 좋아.

“하온아.”

그것도 잠시, 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다시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버렸다. 망했다.

“네.”

부르는 데 대답 안 할 수도 없고. 계약서에 사인해 줄 때까지는 납작 엎드려야 한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냐?”

“네. 하고 싶어요.”

그래도 얼굴을 보니 낯선 남자라 전화할 때만큼 무섭진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날 소름 돋게 하기 충분했다. 앞으로 절대 전화는 하지 말아야지.

“……그래.”

뭐지? 뭔가 다르네. 나에 대해서 궁금해한 건 처음이다. 아, 물론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서 정말 처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유연이도 다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자식이 궁금했다면 그런 집에 처박아 넣고 전화 한 통 없을 리 없잖아. 그러니까 생소한 일인 게 맞을 거다.

“가끔 전화라도 하고 그래라.”

“……네?”

정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제가 왜 전화를 겁니까. 체력 뚝뚝 떨어지는데. 황당하네. 뭐지? 왜 이래?

“그럼 가보마.”

뱉은 말 회수 안 하고 가신다고요? 내키지 않으면 말아라. 뭐 그런 말 정도 해줘야 맞지 않나? 물론 이대로 간다고 전화 걸 건 아니지만. 절대 안 건다. 내 체력은 소중하다. 체력은 곧 경험치다.

“네, 안녕히 가세요.”

나는 실장실을 나가는 아버지께 고개 숙였다. 실장님이 당황하시면서 일어났다. 내게 눈짓을 하는데 이유를 몰라서 멀뚱거렸다. 왜요?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제 실장실에 앉아 있는 건 나 혼자였다. 아버지가 가든 말든 내 신경은 오직 시스템 메시지를 향해 있었다.

잭팟이 터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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