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2화 (12/320)

12.

체력이 조금 회복돼서 집에 가도 되겠다, 싶을 때 실장님이 나타났다. 정말 딱 20분이었다.

“안색 많이 좋아졌네. 이제 움직일 수 있어?”

“네!”

벌떡 일어나면서 경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컨디션이 완벽하게 회복되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저녁 안 먹었지?”

시간은 이제 막 오후 6시 10분을 지나고 있었다. 먹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안 먹었다고 했다.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저요?”

“여기 하온이 말고 누가 또 있니?”

“어, 네, 넵.”

나는 실장님과 보폭을 맞춰서 얌전히 따라갔다. 실장님 차를 얻어타고 20여 분쯤 달리니 고급스러운 간판의 숯불 장어집이 날 반겼다.

장어……?

“들어가자.”

“네에.”

장어?

어영부영 따라 들어가 자리에 앉자, 실장님이 척척 주문하셨다. 곧이어 직원이 와서 손수 장어를 구워줬다. 양념 묻은 장어가 치익 소리를 내면서 익어가는 건 금방이었다.

“뭘 그렇게 멀뚱거려? 너 몸보신 좀 시켜 주겠다는데. 싫어도 먹어.”

“아, 아니요. 싫어하는 건 아니고…….”

그냥 놀라서 그렇다. 꼼짝없이 쫓겨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밥 먹여준대서 따라왔더니 비싼 장어로 나 몸보신까지 시켜 주신다. 직원이 알맞게 익은 장어를 잘라서 연장자인 실장님의 접시 위에 먼저 놓으려 했다.

“우리 애 먼저 주세요.”

“네.”

‘우리 애.’

장어가 내 앞으로 왔다. 울컥 올라오는 걸 삼켜내기 바빠 젓가락으로 톡톡 건드리기만 하고 먹지 못했다. 나보고 우리 애래.

“장어 못 먹니? 미리 물어볼 걸 그랬나. 싫어도 먹으란 건 농담이었어. 못 먹으면 다른 거 먹을까? 누룽지 닭백숙? 오리?”

“아뇨! 저 장어 좋아해요. 잘 먹어요.”

재빠르게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린 장어가 자꾸 내 앞에 쌓였다. 인자한 미소의 실장님이 내가 먹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 왜 그렇게 급하니. 먹고 더 시키자.”

“……실장님도 드세요.”

“먹을 거야. 내가 사는 건데 당연히 나도 먹어야지.”

나는 SR 엔터에 뼈를 묻을 거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들이 있는 곳인걸.

열심히 주워 먹다 보니 배가 든든하게 차올랐다. 몸에 좋은 음식이라 그런지 체력도 훨씬 빨리 차는 것 같았다.

“더 시키자.”

“저는 배부른데…….”

“그래? 벌써?”

“네. 많이 먹었어요.”

진짜다. 자꾸 내 앞에 계속 갖다 주시는 바람에 네 마리중 세 마리 이상은 먹은 거 같다.

“그럼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냥 얌전히 주소 불러. 너한테 미안한 게 많기도 하고, 할 이야기도 남았고.”

아. 그런 이유라면야. 나는 얌전히 끄덕였다.

퇴근 시간대라서인지 도로에는 차가 많았고, 우리는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실장님이 틀어놓으신 라디오에서 다정한 목소리의 DJ가 조곤조곤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잔잔한 멜로디가 나지막이 깔릴 무렵 실장님의 이야기도 시작됐다.

“하온아.”

“네.”

시선을 돌려 정면을 응시하고 계신 실장님을 바라봤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애들이 재혁이한테 많이 기대고 있었나 봐. 설명했는데도 자꾸 너한테 못되게 구네.”

“아, 아니에요. 진짜 별일 없었어요.”

“너 체력 관리 잘한다면서. 거짓말이야?”

“아뇨! 저 진짜 잘해요.”

“그럼 오늘 그 일 생긴 거 서호 때문 맞네.”

남은 체력을 싹 털어 간 게 맞긴 하지만, 전부 강아지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긍정이 오답인 건 확실했기에 무작정 아니라고 우기려던 순간 실장님이 말을 이었다.

“하온아, 너 오디션 볼 때 엄청 빛나 보였던 거 아니?”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지만 환영해야 할 화제 전환이었다.

“……그랬어요?”

“응. 유앤아이 부르는데 너무 즐거워 보이더라. 곡 자체도 신나긴 하지만, 네가 유독 행복해 보였어. 노래 부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네 기분이 전염돼서 어느새 나도 웃고 있었고,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어.”

부끄러움이 몰려와서 괜히 시선을 돌려 창밖 여기저기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

“나는 하온이가 우리 애들이랑 같이 데뷔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염치없지만…….”

실장님이 내 눈치를 살폈다.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시간을 좀 더 주지 않을래? 네가 나가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거 아는데, 우리한테 시간을 조금만 더 줘.”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래서 나를 데려와서 먹이고, 데려다주고, 칭찬한 거다. 기다려 달라고. 기뻐해야 할지, 씁쓸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할 만큼 나를 잡고 싶다는 거겠지만, 한편으로는 나보다 다른 멤버가 더 소중하다고 선을 그은 것이기도 했다.

“네. 저는 괜찮아요.”

“내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지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지원해 줄 테니까.”

실장님은 멤버들이 왜 나를 거부하는지, 그렇게 된 이유가 뭔지 안다. 그런데도 이전 연습생을 방출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는 건 그 네 명을 보호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는 의미였다.

방출된 연습생이 워낙 이미지가 좋았던 사람인 것 같으니 남은 애들 멘탈 지켜주려는 거다. 스스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때까지 내버려 두는 거지.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격렬했던 감정도 둔화되니까.

남은 멤버 멘탈 터질 만한 일이란 게 뭐겠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닐 때, 그리고 그게 충격적일 경우겠지.

여러모로 유추해 보았을 때 결론은 딱 하나다. 데뷔 조 멤버들한테 이미지 관리를 어떻게 했든 그 사람 인성이 별로라는 거.

그리고 모종의 계기로 회사는 그걸 확인했고, 나중에 문제 될 수 있으니 방출했다는 거다. 방출해야만 했을 정도로 데뷔 후 그룹 이미지에 타격 입힐 일을 저질렀다는 뜻이고.

이해한다. 당연히 계속 데리고 있던 데뷔 조 멤버가 더 예쁘고 귀엽겠지. 나는 아직 사인도 안 한, 엄밀히 따지면 예비 연습생이다.

당연히 네 명을 지키고 한 명을 버리는 게 맞다. 내가 섞이지 못하면 나를 팽 시킬 게 분명했다. 부당한 대우에는 이골이 난 덕에 이런 눈치는 제법 빠른 편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생긋생긋 예쁜 미소를 만들었다. 그래도 실장님이 좋다. 이렇게까지 나 예뻐해 주는 사람 못 만났거든. 뭐든지 도와준다잖아. 할 수 있는 만큼. 나한테 미안하니까.

“그럴게요.”

라디오의 노래가 바뀌었다. 꽤 발랄하고 경쾌한 곡이었다. 가볍게 허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자 실장님이 박자에 맞춰 까딱까딱 고개를 흔드셨다. 기분 좋군요!

***

우리 집까지 가는 길에 나는 보컬 트레이닝이 얼마나 즐거운지 말했다. 실장님은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었고, 앞으로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에 도착했다. 집 앞의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면서 점멸했다. 보조석 문을 닫으면서 인사했는데 실장님이 나를 따라 내리셨다.

“이 근처야?”

“네, 바로 저기예요.”

실장님은 낡은 연립 빌라의 활짝 열린 공동 현관을 살펴보면서 내게 물었다.

“보안이 허술해 보이는데……. 몇 층이니?”

“저기요.”

나는 땅 밑으로 절반 정도 파묻힌 방범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연두색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어서 무릎 꿇고 숙이지 않는 이상 집 안이 보일 염려는 없었다.

이 정도면 보안에 문제없는 거 아닌가.

내 생각과 달리 실장님은 영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대뜸 우리 집 창 앞에 쪼그려 앉아서 안을 들여다보셨다.

“하온아, 여기 창 네가 열어 둔 거니? 겨울인데?”

“네?”

나도 실장님이랑 똑같은 포즈로 쪼그려 앉았다. 고개를 기울여서 가림막 안쪽을 보니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려 있었다. 내가 열었던 기억은 없는데, 유연이가 열었었나? 집에서 지냈을 땐 어땠더라. 딱히 신경 써 본 적 없어서 모르겠다.

춥진 않았던 것 같은데…….

하긴 매일 격렬하게 뛰었는데 추울 리가 있나. 잘 때는 이불 속에 파묻혔고, 아직 영하권으로 내려간 적이 없어서 몰랐구나 싶었다.

“하온아?”

“제가 열었어요.”

내 기억에는 없지만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자꾸 신경 쓰시는 게 마음에 걸려서 나도 모르게 나온 거짓말이었다.

“그러니?”

실장님이 방범창 안으로 손을 넣어 문을 닫아 보셨다. 끽끽하는 싫은 소리가 났다. 뻑뻑한 창은 꽉 닫히지 않았다. 뭔가에 걸린 듯 창틀끼리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안에서도 잠글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장님이 손을 털면서 일어나길래 나도 따라 일어났다.

“하온아. 회사 앞에 사생 있는 거 알지?”

“어, 네. 꽤 많던데요.”

“걔들 중엔 테오스가 아니라 연습생 보려고 모여있는 애들도 많아. 그런데 너는…….”

실장님은 잠시 고민하다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위험한 성향의 사생이 붙기 딱 좋을 것 같거든.”

“아하.”

내 대답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셨는지 실장님이 포옥,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하.’가 아니야. 가볍게 생각하지 마. 사생이 얼마나 무서운데. 여자애들이라고 무시하면 안 돼. 나는 네가 빨리 연습생 숙소로 들어와 줬으면 좋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열심히 실장님의 말을 주워 담았다. 내가 경험해 본 사생은 주로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게 욕하는 애들이었다. 가끔 쓰레기도 투척하고.

나를 오물이라고 표현하며 쓰레기를 던지던 그들에게 참 상처도 많이 받았더랬다. 게다가 다들 어디서 투수하다 왔는지 정확도도 참 좋아.

“하온아, 내 말 듣고 있니?”

“네? 아, 네. 그런데 저 아직…….”

“알아. 아는데 내가 걱정돼서 그래. 연습생 따라붙는 애들도 많다니까? 너 대중교통 타고 다니잖아. 미행하기는 또 얼마나 쉽겠니?”

하지만 그렇게까지 따라와서 쓰레기를 투척할 것 같진 않은데. 물론 실장님이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안다. 쓰레기를 투척하는 애들이 아니라, 집을 비운 사이 나 몰래 우리 집에 들어오는 일을 걱정한다는 걸.

하지만 그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부류의 사생들이었다. 그렇기에 상상할 순 있지만, 그게 내 일이 될 거라고 인식하기는 어려웠다. 지금은 연습생이라 더더욱.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내보이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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