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화해 볼 테니까 같이 계셔 주시면 안 돼요? 바꿔 달라고 하면 바꿔 드리려고…….”
안 된다. 일진이라는 오명을 쓰고 합격 취소당할 순 없다. 부모님과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내가 얼마나 설설 기는 지. 받을지 안 받을지 감도 안 오지만 그래도 해보긴 해야지.
“그래요. 그렇게 해요.”
김혜미 실장님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나는 곧바로 ‘아버지’라고 저장된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진짜 아버지한테 거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저 나를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들었다.
이 집도 우리 집이랑 똑같으려나. 그래도 용돈은 보내주는 걸 보면 아직 완전히 버림받진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미자라서 보내준 걸까. 우리 집도 나 미자 때 생활비 정도는 넣어줬던 것 같고.
안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사이 통화가 연결됐다. 숨을 헉 들이켠 채 바짝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축였다. 따지고 보면 부모님께 이런 연락 드리는 건 처음이었다.
전생에서는 20살이었기에 혼자 결정할 수 있었을 뿐, 날 싫어하는 가족이 무서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하고 불편한 게 아니라 무서웠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꽉 막혀서 답답했다.
나는 조용히, 상대에게 들리지 않게 심호흡한 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 …….
상대는 조용했다.
“저, 제가 오디션에 합격해서, 그러니까, 계약해야 하는데요…….”
─ 무슨 오디션.
무뚝뚝한 목소리가 꽤 익숙했다. 너무 우리 아버지랑 똑같아. 잔뜩 긴장한 나머지 머리가 죄어 왔다. 숨이 턱턱 막혀서 밭은 숨을 몇 번이나 내 쉬고 나서야 말 문을 열 수 있었다.
“아이돌 연습생이요. 부모님 허락이 필요하다고…….”
─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떡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김혜미 실장님을 봤다. 도와 달라는 간절한 내 눈빛에 갓혜미님이 손을 내밀었다. 잽싸게 휴대폰을 넘겼다.
“안녕하세요. SR 엔터테인먼트 총괄 실장 김혜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자녀분께서 저희…….”
실장님이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허공으로 가출해 버렸다. 아, 힘들다. 상태 창을 불러보니 체력이 50밖에 없었다. 분명 집에서 출발할 때 꽉 차 있었는데 기력이 쪽쪽 빨렸네. 한 일에 비해 너무 많이 떨어졌다. 정신 상태도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했다.
목소리만 비슷하지 않았어도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앞으로 아버지랑 통화할 일은 영영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자, 받아요.”
가출한 영혼을 되돌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휴대폰을 돌려받은 뒤 실장님의 표정을 살폈다.
“……어떻게 됐어요?”
설마 허락 안 해준 건 아니겠지. 가슴 졸이면서 실장님의 말을 기다렸다.
“1월 초에 시간 내실 수 있대요. 그때 오신다고 하셨어요.”
“아…….”
1월 초면 앞으로 이 주 남았나. 양호하네. 그럼 그때까지 난 뭐 하고 있으면 되려나.
“아버지가 어려워요?”
“가족은 다 어려워요. 절 싫어하거든요.”
“왜 싫어해요?”
“저도 알고 싶어요.”
나는 헤헤, 실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눈치를 보니 일진이라는 오명은 벗은 것 같다. 다행이다. 세상 살기 팍팍하네. 인생 2회차라고 해서 딱히 편한 것도 없어.
“나는 하온 씨가 참 마음에 들어요. 우리랑 오래 같이했으면 좋겠다.”
“!”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와, 와아. 나 이런 소리 들은 거 처음이야. 가슴이 벅차올라서 뜨끈한 것이 왈칵왈칵 치밀었다. 이거 눈으로 가면 곤란하다. 웃자, 웃자.
필사적으로 안면 근육을 움직이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잘 웃고 있겠지. 날 안쓰럽게 보는 것 같지만 별말 없으니 괜찮은가보다 하고 넘겼다.
“집에서 여기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가까워요?”
“아니요. 1시간 30분 정도요.”
“가족이랑 같이 살아요?”
“저 혼자 살아요.”
“그럼 연습생 숙소 들어올래요? 지방에서 올라오는 애들도 있어서 숙소 있거든요. 와글와글 모여서 지내야 하긴 하지만.”
음. 낯선 아이들과 함께 한집에서 와글와글 복작복작 생활하는 건 무리다. 그건 내가 미움받지 않는 일에 좀 익숙해진 뒤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제가 낯을 가려서……. 친해지면 그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상냥한 분. 실장님은 그저 빛!
“그럼 전 언제 오면 되나요?”
“아버님께서 암묵적으로 허락하신 거니까 지금 바로 인사하러 갈래요? 오늘은 인사만 하고 내일부터 연습하러 나오시면 될 것 같아요.”
“아, 네. 그럴게요.”
실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김혜미 실장님의 뒤를 또 쫄쫄거리면서 따라갔다. 가면서 대충 몇 층에 뭐가 있는지 설명해주시는 걸 머리에 열심히 욱여넣었다.
실장님은 3번 연습실 문을 두들겼다. 방음이 잘 되어 있어서 음악 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얘들아, 전부 모여있니?”
문을 열자 그제야 둥둥거리는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실장님의 등장에 음악이 뚝 끊겼다. 남자애들이 흘린 땀내가 훅 끼쳤다.
밖에서 기다리는 데 실장님한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실장님을 따라 들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아까 봤던 강아지랑 강아지 형도 있었다. 강아지는 여전히 날 쏘아보고 있었고. 음.
이거 참 익숙한 시선이라 오히려 안정감이 느껴졌다. 나 의외로 변태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혹독한 세상에서 꿋꿋하게 잘 살았던 걸지도.
“소개할게요. 저쪽부터 유찬이, 이한이, 강현이, 서호. 하온 씨가 막내네요.”
이름 알려주는 게 너무 빠른데요. 성도 없이 이름만 알려주시다니. 생략도 심……. 아니다. 실장님은 그저 빛이므로 내가 열심히 외우는 수밖에. 근데 나 이름 외우는 건 자신 없는데.
강아지 형이 유찬이. 날카로운 인상의 양아치 같은 남자가 이한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잘생긴 남자가 강현이. 강아지가 서호. 오케이. 금방 까먹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입력했다.
“안녕하세요. 진하온입니다. 열여덟이에요.”
소개받았으니 인사는 해야지. 예의 바른 배꼽 인사까지 곁들였다. 반갑다거나 어서 오라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습생 간에 빡빡한 건 어디나 똑같은가 보다. 근데 연습생이 왜 네 명밖에 없을까.
“얘들아?”
실장님이 채근하자 그제야 강아지 형, 그러니까 유찬이가 나섰다.
“안녕하세요. 전 박유찬이에요. 스물둘, 지금 리더고, 포지션은 리드 보컬입니다.”
“안녕하세요.”
첫 만남, 첫인사는 항상 어색한 법이다. 이 짓을 앞으로 세 번 더 해야 한단 말이지. 일단 강아지는 안 할 확률이 높으니 두 번이려나.
“이쪽은 정이한. 스물한 살, 메인 랩퍼 포지션을 맡고 있어요. 이한아, 인사해.”
가늘게 찢어진 눈꼬리 덕에 인상이 매서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정이한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못해 한다는 듯 ‘안녕하세요.’ 하는 작고 딱딱한 인사가 돌아왔다.
“네에, 안녕하세요.”
“그리고 여기는 백강현. 스무 살. 우리 메인 댄서 겸 리드 랩퍼고요. 춤에 진심인 친구예요.”
이 사람은 더했다. 나를 쓱 훑어보더니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가로로 든 거 보니 영상을 보는 것 같은데…….
박유찬은 그런 백강현을 한 번 쳐다봤을 뿐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실장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날 보면서 씩씩대고 있던 강아지를 끌어당겨서 마지막으로 인사시켰다.
“그리고 지금까지 막내였던 이서호. 하온 씨보다 한 살 많고, 서브 보컬이에요.”
강아지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실장님께 소리를 빽 질렀다.
“이딴 놈한테 재혁 형 자리 주겠다는 거예요? 재혁 형이 뭐가 부족해서 쫓겨난 건데요! 이해가 안 된단 말이에요! 형 데려와요! 데려오라고요!”
가뜩이나 체력 떨어지면 터지는 상태 이상 때문에 체력 관리하면서 스탯 올리느라 바빠 죽겠는데, 사이좋게 지내기는 틀린 것 같았다.
“이서호.”
내내 미소 짓고 있던 실장님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굳히니까 카리스마 있으시네요. 그나저나 강아지가 윗사람한테 대들면서 짖어대는데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전부 동의한다는 뜻이렷다.
됐네요. 나도 그쪽들한테 호감 없어. 하지만 그냥 눈치 없는 것처럼 가만히 서서 끔벅거렸다.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실장님을 봐주는 것도 잊지 않았고. 내 편은 갓혜미 실장님 한 명이면 된다.
“낙하산 새끼. 딱 보니 잘난 건 얼굴뿐인 것 같은데 대표님이 꽂아 주니까 좋냐? 너 때문에 밀려난 형은 무슨 죄야? 재수 없어!”
강아지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쏘아붙였다. ‘낙하산’이라는 게 나였어? 그야말로 상상도 못 한 정체인데…….
어쩌다 내가 낙하산이 된 거지? 의아했지만 일단 얌전히 굴었다. 여기에는 실장님이 있었고, 첫날부터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진 않았다.
실장님이 다급하게 다가와 강아지 앞발을 잡아챘다. 낑낑거리는 게 딱 새끼 강아지 같았다. 별별 악독하고 지독한 사람들한테 당해 본 기억이 있어서 이 정도는 애교였다. 에구 귀엽다,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도 있다.
원래 사랑받고 자랐다는 티가 팍팍 났다. 제 딴에는 위협하려고 짖어대는 것마저 귀엽기 짝이 없는 걸 보면. 다른 사람을 겁주고 싶다면 먼저 저 흔들리는 커다란 동공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나를 밀치던 손도 어설프기 그지없어서 시위하는 퍼포먼스 같았다.
“이서호, 그만두지 못해? 너 따라와.”
“실장님, 서호가 재혁이를 워낙 따랐던 거 아시잖아요. 서호뿐 아니라 저희 모두 재혁이를 좋아했고.”
실장님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유찬아, 너까지 이럴래? 충분히 설명했잖아.”
“정확한 이유는 말씀 안 하셨잖아요.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저희로서는 저 애 꽂으려고 재혁이 내보낸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너희,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동안 얼마나 애지중지 데리고 있었으면 실장님 앞에서 저렇게 대드는 걸까. 데뷔 조 잘리지 않을 확신이라도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