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안내받은 장소에는 대표님을 중심으로 다섯 명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아니, 대기 시간도 없이 이렇게 바로 오디션을 본다고? 타이밍이 좋았던 건가?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입꼬리를 올려 표정 관리를 했다. 전생에 연습생 오디션을 몇 번 봤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는 익숙했다.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이야, 정말 대표님 말씀처럼 천재네요. 얼굴 천재.”
“대표님이 직접 캐스팅했다고 하셔서 기대했는데 기대 이상이에요. 비주얼 원탑으로 세워도 되겠는데요? 저 정도 얼굴이면 뚝딱거려도 코어팬 붙죠.”
“와, 취향 위에 진하온 씨 있겠어. 눈을 못 떼게 하네.”
아니다. 익숙하단 말 취소. 전생에 오디션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같은 얼굴인데도 날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분위기가 천지 차이였다.
적응 안 되는 분위기에 어버버 거리고 있자 맨 끝에 앉은 여성분이 얼타는 것도 귀엽다며 웃었다. 매력 올리는 건 신의 한 수였어!
“자자, 긴장하지 말고. 카메라 앞에 서 줄래요? 카메라 테스트부터 봐야 하거든요.”
“네에…….”
나 지금 되게 어색해 보이지 않을까? 팔과 다리가 같이 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어리숙해 보여도 보여도 곤란했으므로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바닥에 테이프로 X자 표시가 붙어 있길래 그 앞에 섰다. 모니터를 보던 사람 중 몇 명이 한숨 쉬었다. 그 덕분에 바짝 긴장한 채 눈치를 살폈다. 카메라 테스트 영 별로인가? 설마 매력 스탯은 실제로 봐야만 적용된다거나 뭐 그런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아, 아쉽네.”
“그러게요. 진짜 아쉽다.”
뭐가요. 뭐가 아쉬운데요.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저도 알려주세요…….
“카메라가 하온 씨 매력을 다 못 담아내네. 실제로 보는 게 훨씬 나아.”
“그래도 외모 어디 안 가요. 웬만한 그룹 비주얼 센터 씹어 먹을 상이야.”
사람 헷갈리게 왜 그러십니까. 진짜.
“아직 18살이라고 했죠? 이제 곧 19살 되네. 나이도 딱이고. 진짜 미래가 기대되네요. 이대로 예쁘게 커 줘도 좋고, 선이 굵어지면 또 그것대로 퇴폐 계열 분위기 날 것 같기도 하고. 아우, 상상만 해도 행복해진다!”
지금까지 묵묵히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던 대표가 입을 열었다.
“하온 씨, 춤이나 노래 괜찮아요? 못해도 가르쳐 줄 생각으로 오라고 한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해도 돼요.”
이거야말로 내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아닌가? 확실한 대표의 푸시였다.
“혼자 영상 보면서 따라 한 게 전부긴 하지만, 원래 춤이랑 노래를 좋아해서 할 수는 있어요. 잘하지는 못하고요…….”
“괜찮아요. 원하는 노래 말하면 틀어 줄게요.”
“아, 그러면 콜드블루의 유앤아이 부탁드립니다.”
유앤아이는 보컬 중심의 이지 댄스곡이었다. 격렬하지 않고 부드럽게 몸을 움직이는 가벼운 댄스였기에 지금 내가 소화하기 좋았다. 무엇보다 이 노래는 주간 미션에서 A-를 받았다.
지금은 노래가 B-까지 올랐으니까 분명 더 잘할 수 있겠지. 게다가 격렬한 건 아니지만 안무가 있는 곡이니, 춤춰보라는 요구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꼼수도 좀 있었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진지하게 날 보는 심사위원들과 한 사람씩 눈을 마주쳤다. 노래 자체가 밝고 희망찬 느낌이라 나도 웃으면서 불렀다. 떨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즐겁고 신나서 저절로 웃을 수 있었다.
노래를 끝낸 뒤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했다. 어느새 날 보는 심사위원들의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대표님, 저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하세요.”
“하온 씨, 노래 진짜 잘 부르네요. 아직 음정 흔들리는 부분도 있고, 비브라토가 어색하긴 한데 감정 전달이 되게 잘 돼요. 나도 막 신나서 들썩이고 싶은 거 참느라 힘들었어요. 이 정도면 거의 재능의 영역이지. 제대로 가르치면 어떻게 될지 너무 기대돼요.”
말하는 걸 보니 보컬 트레이너 같다. 매우 긍정적인 신호였다. 노래 올려놓길 잘했다.
“아, 감사합니다.”
“어디서 배운 적 없죠?”
“네. 그냥 혼자 불렀어요.”
“와, 그런데 이상한 기교가 하나도 없네요? 원곡 가수 따라 하는 것도 없고. 잘 들었어요.”
보컬 트레이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심사평을 마쳤다.
“춤추는 것도 보고 싶은데 혹시 방금 춘 곡 말고 다른 노래도 가능한가요? 좀 더 댄스에 특화된 곡으로.”
이번엔 대표님 왼쪽에 있던 남자분이 물었다. 꼼수는 통하지 않았다. 아쉽다.
“어, 춤은 더 못하는데 한번 해볼게요.”
나는 노래를 선곡했고, 춤을 췄다. 음. 역시 스탯이 낮아서 내가 느끼기에도 별로였다. 전생의 내가 훨씬 잘 춘다. 댄스 트레이너가 중간에 웃으면서 노래를 끊었다. 너무하네.
“잘 봤어요. 춤은 아직 많이 배워야겠네요.”
“하하하…….”
뭐 어쩌겠어. 웃는 수밖에.
“그런데 아까 유앤아이 부를 땐 춤을 되게 잘 추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기본적인 박자 감각이랑 끼는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쉬운 댄스는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하지만 본격적인 댄스곡에서는 아직 좋은 평가 못 받을 텐데 빡세게 따라올 수 있겠어요? 연습하려면 좀 힘들겠는데?”
“네. 할 수 있어요. 저 춤추고 노래하는 거 좋아해요.”
순진해 보이는 대답을 골라내면서 웃었다. 나이에 맞는 때 묻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제가 물어볼게요.”
대표님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났다. 왠지 곤란한 질문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하온 씨, 여기 왜 왔어요?”
……님이 오라면서요?
꼭 왔으면 좋겠다면서요?
오니까 반갑다고 인사도 해주셨잖아요?
가르쳐 줄 테니 편하게 하라면서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기예요?
바짝 굳은 내가 멀뚱멀뚱 대표님을 바라만 보자, 주변에서 가볍게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이거 대답 잘못하면 잘리겠는데?
“……아이돌이 하고 싶어서요.”
“관심 없어 보였는데 왜 마음이 바뀌었어요?”
관심이 없기는. 관심 없는 사람은 캐스팅 기다리면서 매일 카페에 죽치고 있지 않아! 아무래도 처음 만났을 때 내 이미지를 잘 못 잡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이실직고다.
“관심……,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없었어요. 사실 제 노래랑 춤이 어디 가서 자신감 있게 내보일 수준은 아니잖아요.”
힐끔 옆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댄스 트레이너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맞아, 춤이 좀 부족하긴 하더라.’ 하면서 맞장구도 쳐준다. 보컬 트레이너는 ‘보컬은 괜찮았어요~’ 하고 응원도 보내주셨다.
“좀 더 잘하게 되면 오디션 보려고 했는데, 그러던 중 대표님이 명함을 주셨던 거예요. 저, 춤추고 노래하는 거 정말 좋아해요. 잘할 수 있어요. 하고 싶어요.”
나의 강력한 의지를 담아 대표를 바라봤다. 일부러 노렸다는 말만 쏙 뺐을 뿐 나머진 전부 사실이었다. 내 눈에서 간절함을 읽지 못하면 당신은 대표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메인 미션을 깨고 싶거든! 나만큼 간절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대표의 얼굴에 다시 사람 좋은 미소가 걸렸다. 통과한 건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표가 말했다.
“좋아요. 가벼운 흥미가 아니라는 건 알았습니다. 계약은 여기 김혜미 실장이랑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다가 힘들면 뛰쳐나갈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 본 모양이었다. 다행히 난 통과한 거고. 합격 여부는 일주일에서 이 주 정도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바로 계약이라니!
“이제 우리 식구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민 사람은 아까 복도까지 나를 데리러 나왔던 사람이었다. 실장이라면서 왜 마중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걸까.
“잘 부탁드립니다!”
냉큼 인사하면서 상냥한 얼굴의 실장님을 따라갔다. 이동하는 동안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실장님 말로는 대표님이 나를 되게 기다렸다고 한다.
오늘도 외부 일정이 있으셔서 나가려던 참에 내가 왔다는 소식에 일정을 미루셨다고. 그래서 이렇게 오디션을 빨리 볼 수 있었던 거구나. 내가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미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실장님과 마주 앉았다.
“지금 나이는 18살이고, 고등학교는 자퇴 했다고요? 검정고시 준비 중이에요?”
준비 중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따야지. 나는 원래 준비 중이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왜 자퇴했어요?”
“그건…….”
“곤란한 이유에요?”
“아니요. 공부 머리가 없어서요. 공부 쪽은 아니었던 데다가 춤이랑 노래가 너무 좋아서 학교에 있는 시간이 아까웠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빨리 시작하려고 그만뒀어요.”
거짓말 200% 보태서 주절거렸다.
“아이돌 못 되면 어떡하려고 했는데요?”
생각 없이 학교 때려치웠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또 거짓말했다.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게, 이러다 나중에 눈사태 맞는 건 아니겠지?
“보컬 트레이너가 되려고 했어요.”
“본인이 노래 재능있는 거 알고 있었네.”
김혜미 실장님이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럼요. 없는 재능도 만들 수 있는 사기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거든요.
김헤미 실장님은 마우스를 따각거려 계약서를 출력하면서 물었다.
“SNS 하는 거 있으면 한 번 보여주세요. 그리고 이후에는 사진 올리지 말고, 저희가 삭제 원하면 삭제해 주셔야 해요. 너튜브 같은 채널에 영상 올린 건 있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휴대폰 보여드릴까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려는데 날 보던 김혜미 실장이 웃으면서 계약서를 내밀었다.
“안 보여주셔도 돼요. 믿을게요. 미성년자라 계약하려면 보호자 동의가 필요해요. 사인만 받아 오셔도 되고, 부모님이 원하시면 함께 오셔도 괜찮아요.”
“아. 제가 부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은데…….”
일단 말은 해 놔야겠지. 김혜미 실장의 낯에 조금 곤란해 보이는 기색이 스쳤다. 이해한다.
공부 싫어하고, 춤추고 노래하겠다고 자퇴한 고2가 부모님과 사이 안 좋다면 뭐가 떠오르겠는가. 일진인가 싶겠지.
이래서 당일 합격이 신기한 거다. 보통 과거 한 번 털어보기 마련이거든. 처음 보는 나를 어떻게 믿고? 물론 털어봤자 먼지 나올 과거는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