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푹 자고 일어나니 체력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스킬을 확인했다. 오늘이야말로 돌린다. 가챠.
플러스와 마이너스 확률만 놓고 본다면 53:47이었다. 플러스 확률이 6%나 더 높은 혜자였다. 이걸 어떻게 안 하냐고?
돌림판 가자!
<시스템: 돌려돌려 돌림판~ (F)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체력 100과 40포인트가 소모됩니다. Y/N>
가보자고!
돌림판이 팽그르르르 돌아갔다. 손에 배어 나오는 땀을 적당히 문질러 닦으면서 집중했다.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마구잡이로 섞인 돌림판이 마침내 멈춰선 곳은…….
<시스템: 축하합니다! 돌려돌려 돌림판~ (F) 결과로 55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45% 확률인 55포인트에 당첨됐다. 크! 이 맛에 가챠하지! 이걸로 현재 포인트는 135!
<시스템: 상태 이상 발생!>
네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뭔가요?
내 운명을 결정할 상태 이상 룰렛이 또르르륵 굴러갔다. 이번에 당첨된 건 두통. 당첨과 동시에 상태 이상이 발동됐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물밀듯 들어왔다. 근육통은 튜토리얼용 맛보기였나? 머릿속에 대못이 박히는 것 같아…….
나는 꽝꽝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낑낑거렸다. 이거 장난 아니네. 눈물이 고일 정도의 통증이었다. 진통제가 통할까 싶어서 약을 주워 먹어봤는데 소용없었다.
“으…….”
머리가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머릿속이 헤집어지는 듯한 통증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자세를 바꿔도 똑같아서 침대 시트를 꽉 쥔 채 끙끙 앓았다.
15포인트 얻자고 이 고통을 감내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근육통이 참을 만하기에 괜찮을 줄 알았지! 진짜 쉬운 일 하나도 없네.
언제 끝나는 거야.
설마 근육통처럼 하루 동안 계속되는 건 아니겠지? 끔찍한 생각이 들자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거 얕볼 게 아니었어.
가챠는 당분간, 아니 평생 봉인이다. 득보다 실이 더 큰 느낌이야. 차근차근 착실하게 포인트 모으는 게 낫겠어…….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머리를 부여잡고 인고의 시간을 보낸 끝에 겨우겨우 상태 이상이 끝났다. 3시간은 훌쩍 넘긴 것 같은데 고작 30분이 지나 있었다. 그 사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스킬 봉인은 안 되나?
나는 살벌하게 가챠 스킬을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스킬 등급이 F인데 이것도 올릴 수 있나?
<시스템: 포인트 500을 소모하여 돌려돌려 돌림판~ (F) 스킬을 E로 승급하시겠습니까?>
정말 친절하다니까. 일단 아니오. 승급 안 해. 승급할 포인트도 없다.
시스템을 치운 뒤 내 스킬 리스트를 확인했다. 스킬에 (F)라고 등급 표시가 되어 있으면 포인트 투자해서 올릴 수 있다 이거구나?
F+나 E- 얘기는 없으니 얘는 S까지 총 6단계일 확률이 높고. 1렙에 500이면 S까지 얼마나 필요할지 감도 안 오네.
게다가 승급할 때 뭐가 어떻게 변하는지 설명도 없었다. 이건 직접 알아보라는 거겠지? 친절할 땐 한없이 친절하다가도 안 될 땐 맨땅에 헤딩시키는 게 아주 기가 막혔다.
어쨌든 당분간 가챠는 봉인. 나중에 포인트 남으면 등급 좀 올려야지. 뭐가 될지 모르지만, 확률이 좋아지거나 요구 체력이 낮아지거나 뭐 그런 거 아닐까? 내 고통보다 이득이 큰 손익분기점이 오면 그때 고려해 보는 걸로.
어디 보자. 남은 체력이…….
1이다.
나는 기겁한 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무조건 휴식. 자칫 잘못하면 상태 이상 2연타도 가능하겠어…….
체력을 전부 소진했으니 1부터 시작이라는 거네. 근육통 상태 이상이 끝났을 때와 달랐다. 그때는 체력 소진이 아니라 이벤트라서 유지됐었나 봐.
입술이 따끔거려서 휴대폰으로 확인했다. 언제 깨물었는지 붉게 변해서 퉁퉁 부어 있었다. 희게 질린 얼굴에 입술만 빨갛게 부어올라 동동 뜬 걸 보니 한숨 나왔다. 뱀파이어 컨셉 하면 잘 어울리겠네.
체력 좀 회복하고, 오늘부터 내일까지 춤 연습 위주로 하면 경험치 채울 수 있겠지?
나는 하루를 더 써서 춤 경험치를 집중적으로 올렸다. 덕분에 135포인트로 둘 중 하나를 B-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노래를 올리면 15가 남고, 춤을 올리면 전부 다 쓴다. 둘 다 올리면 좋겠지만 포인트도, 시간도 부족하니 일단 내일 오디션 보러 가서 골라보자. 어디에 먼저 투자할지.
***
SR 엔터 사옥 앞에 서서 투명한 문을 바라봤다. 검은 정장을 입은 시큐리티 요원이 힐끔 날 보더니 경계 태세를 풀었다. 사생처럼은 안 보이나 보다. 깊게 심호흡한 뒤 문을 열었다. 긴장된다.
곧장 인포를 향해 걸어가자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 그래도 커다란 직원의 눈이 더욱 커졌다. 입은 일찍이 동그랗게 벌어진 채였다.
“안녕하세요.”
“아,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연습생 오디션 보러 오라고 캐스팅됐는데요…….”
이야기해 둔다고 했는데 전달해둔 거 맞겠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진하온이요.”
혹시 모르니까 대표님한테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는 삼키고 내 이름만 말했다. 직원은 키보드를 두들겨 보더니 어딘가에 급히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던 분이 오셨습니다. 네네. 네. 맞아요. 네. 네, 알겠습니다.”
괜히 귀가 쫑긋쫑긋 섰다. 직원은 친절함과 상냥함으로 무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방문증을 건네줬다. 첫인상부터 좋은 곳이다.
“3층으로 가시면 돼요.”
“네, 고맙습니다.”
“꼭 저희 소속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왜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일단 고개 숙이면서 웃어 보였다. 왜냐고 물어보면 이상하잖아. 그러자 등 뒤에서 ‘귀여워!’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칭찬은 익숙하지 않은데……. 머쓱함에 못 들은 척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로 시큐리티 게이트를 통과했다.
3층에 도착하니 좁은 복도에 여러 개의 문이 있었다. 그제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다시 물어봐야 하나?
누군가가 마중 나온다면 엇갈릴지도 모르니까 잠깐 기다려 볼까.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빼꼼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싸우는 듯한 분위기였다. 내 위치와 대각선에 있는 곳이었는데, 자칫하면 안에서 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히 엿본다고 오해받기는 싫어서 안 보일 만한 곳으로 슬쩍 옮겨갔다. 하지만 목소리가 워낙 우렁차서 대화 내용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재혁 형이 왜 쫓겨난 건데? 형은 억울하지도 않아? 재혁 형은 우리 리더고 메보잖아! 난 재혁 형 아니면 싫어!”
“메보는 다시 구한다고 하셨어.”
“유찬 형은 재혁 형 없어도 돼? 아니잖아! 형도 재혁 형한테 의지 많이 했잖아! 난 납득 못해! 받아들일 수 없어! 이유도 말 안 해주는데 어떻게 이해하냐고!”
“이서호!”
“형은, 씨이, 형은 이번이 마지막이라서 그렇게 비겁하게 굴어? 그래서 재혁 형이 낙하산 때문에 억울하게 쫓겨나도 괜찮은 거야?”
“너 지금 흥분했어, 선 넘지 마.”
“내가 틀린 말한 거 아니잖아! 형도 재혁 형한테 도움 많이 받았으면서! 배신자! 형도 배신자야!”
“서호야!”
외침과 함께 거칠게 문이 열리더니, 강아지처럼 순둥순둥하게 생긴 귀여운 남자가 뛰쳐나왔다. 잔뜩 신경질 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귀여운 인상이었다.
촉촉하게 젖은 커다란 눈이 나와 마주치자마자 가늘게 쫙 찢어졌다. 명백한 적의에 나도 같이 노려봤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강아지는 이를 으득 갈더니 쏜살같이 뛰어가 버렸다.
강아지 뒤로 난처한 얼굴을 한 남자가 따라 나왔다. 이번에 나온 남자는 날 보고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까딱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강아지를 따라 뛰었다.
메인 보컬이 쫓겨났나 보네.
잘됐다. 내게는 기회다. 그 자리 내가 먹어야지. 누군진 몰라도 입김으로 끼워 넣은 멤버가 잘할 리 없다. 내게는 치트나 다름없는 상태 창이 있으니까 메보 쟁탈전에 참여하겠어!
남은 포인트로 노래를 B- 등급으로 올렸다. 당장 메인 보컬 감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일단 나는 취미로 노래와 춤추던 사람이라는 설정이다. 재능충으로 어필하기엔 충분하겠지.
<시스템: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이 타이밍에?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가 스킬 정보를 확인했다.
엿보기(F): 다른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비열한 당신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다른 사람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용 시 체력 50이 요구됩니다.
엿들었는데 엿보기가 생긴 건 차치하고, 나는 일부러 듣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 들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싸우는 걸 우연히 들었을 뿐인데 비열하다니.
뚱한 기분에 스킬을 노려봤다. 쓸모 있는 걸 줬으면 기분이라도 좋았을 텐데. 새 스킬이 생긴 건 고맙지만 체력이 50이나 필요하고, 다른 사람 정보는 궁금하지 않으므로 이런 건 쓰레기만도 못했다.
다른 사람 정보라고 해봐야 끽해야 스탯 정도 아니겠냐고. 그런 일에 굳이 체력 50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쉬면 채워지는 거지만 그래도 시간 아깝잖아. 그 체력으로 춤이랑 노래 경험치 쌓는 게 낫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을 때,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한 여성분과 마주쳤다. 하얀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진하온 씨?”
“어, 네! 진하온이에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굽신거렸다. 파란 줄로 된 사원증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하온 씨! 에고,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아, 아뇨. 저야말로 죄송해요. 얌전히 기다렸어야 했는데 손이 좀 더러워서 씻었어요.”
“별말씀을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으로.”
심사위원 중 한 명이라기보단 오디션을 보조하는 직원인 것 같았다. 내가 대기할 곳으로 안내해 주시려나 보다. 나는 얌전히 직원의 뒤를 쫄쫄거리면서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