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렇게 찾아간 곳은 서울 하성동에 있는 SR 엔터 사옥 인근의 번화가였다. 여러 군데의 기획사를 놓고 열심히 비교해 본 끝에 선별한 곳이었다.
내 기준은 세 가지였다.
1. 망할 걱정 없는가.
2. 선배 아이돌 그룹의 컨셉이 정상적인가.
3. 언제 데뷔 가능한데?
SR 엔터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금력이 탄탄한 곳이었다. 물론 대형으로 분류하기엔 소속된 아티스트가 몇 없었고, 업력도 10년이 채 안 된 곳이긴 했다. 소문에는 대표가 굉장히 돈 많은 사람이라더라.
그걸 증명하듯 처음부터 번듯한 10층 빌딩 하나를 통으로 썼다. 아무리 신빙성 있어 보여도 소문은 거르는 편이지만 눈에 보이는 실적 또한 확실했다. 선배 보이 그룹인 ‘테오스’가 흥하는 중이고, 소속 솔로 가수 중 차트 줄 세우기 하는 아티스트도 여럿 있었다.
‘도대체 저게 뭐야?’ 싶을 정도로 이상한 컨셉의 앨범도 없었다. 타이틀곡도 전체적으로 좋았고 컨셉이랑 어울렸다. 뮤비도 자금 부어서 잘 만들었고. 전생에 당해본 기억이 있어서 꼭 짚고 가야 할 일이었다.
마지막 조건이자 가장 중요한 것.
5년 전 데뷔한 테오스 이후로 후속 그룹이 없었다. SR에 합격하면 나 하기에 따라 금방 데뷔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자 연습생을 상시 모집하는 걸 봐서는 걸그룹은 생각 없어 보이거든.
나는 추위에 대비해 외투를 꼼꼼하게 여민 대신 얼굴에는 아무것도 안 했다. 비주얼 캐스팅을 노리는 건데 얼굴 가리고 앉아 있으면 소용없잖아.
집에서 충분히 체력을 쓰고 나왔기 때문에 곧바로 카페에 들어가서 핫초코를 시킨 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조건 1층, 입구에서 잘 보이는 자리여야 했다.
그래, 이런 자리.
답답한 겉옷을 벗어 빈 의자에 걸쳐 놓았다. 남은 체력이 고작 10이었다. 대중교통으로 1시간 30분을 넘게 이동한 데다, 추위와 싸우다 보니 확 떨어져 있었다.
핫초코 고르길 잘했다. 피로 회복엔 달달한 거지. 핫초코를 후후 불어가면서 홀짝거릴 때였다.
몇몇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게 느껴져서 부담스러웠다. 속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계란이 날아올 것 같은 기분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번화가 카페에 날계란을 가지고 들어와 앉아 있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나는 방송국 앞에서 맞아본 적 있었다.
비공식 스케줄이었는데…….
그때 일을 떠올리고 나니 갑자기 주변에 대한 경계심이 확 치솟아 주위를 둘러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데…….
‘헐, 미친 존예…….’
‘스알 연생?’
‘이목구비 화려한 것 봐!’
‘잘생쁨이 뭔지 나 드디어 알았어…….’
아무리 내 시야가 협소하더라도 분위기 정도는 읽을 줄 안다. 대놓고 날 칭찬하는 소리에 이번엔 반대로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되었다. 계란 날라 올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나는 핫초코를 마시면서 체력이 슬금슬금 차오르는 걸 바라봤다. 두 시간 정도 앉아 있으면 집에 갈 정도로는 회복될 것 같았다.
이어폰을 꽂고 내가 모르는 곡들을 외우고 있을 때였다. 기웃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한 명이 얼쩡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여학생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저, 저기…….”
“……네?”
“어, 저기, 스알 연습생, 이세요? 아니면, 신인 배우신가요?”
스알은 SR 엔터테인먼트를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 카드 게임에서 SR, SSR 등급을 스알, 쓰알처럼 소리나는 대로 읽는 데서 차용한 건진 모르겠지만, SR 엔터도 스알이라고 부르더라.
“아, 아니에요. 일반인이에요.”
“헉! 진짜요? 으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여학생은 두 손으로 제 뺨을 문지르더니 꾸벅 인사한 뒤 사라졌다. 등 뒤에서 친구들한테 “야! 아니라잖아!” 하면서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긍정 신호라고 봐도 되겠지?
S등급 매력이 좋긴 좋구나. 잘 골랐다.
나는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
체력 50이 되는 대로 집에 가려고 했는데 회복 속도가 영 느렸다.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서 그런지 자리가 불편했다. 덕분에 체력 오르는 속도는 더 느려졌다.
안 되겠다. 집에 가야지.
***
“누나, 저 왔어요.”
“어서 와~ 오늘도 핫초코?”
“네!”
어느새 카페에 얼굴도장을 찍은 지 이 주가 되었다. 알바 누나와 안면을 텄고, 우호적인 친분이 생겼다. 놀라운 일이다. 나를 향해 웃으면서 인사해 주고,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생기다니.
기분 좋은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주간 미션도 승승장구 중이었다. 덕분에 현재 포인트는 120!
노래 경험치가 꽤 차서 120포인트로 노래를 B-까지 올릴 수 있게 됐다. 춤 경험치는 살짝 부족했고.
따라서, 나는 지금 포인트를 써서 노래 스탯 올리고 SR엔터를 두드리느냐, 조금 더 캐스팅 요행을 바라보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왕 스탯 올리는 거 좀 더 효과적인 방식이 좋지 않을까. 그러려면 현재 SR 데뷔 조에서 겹치지 않을 포지션이 뭔지 알면 좋을 텐데. 노래가 부족하면 노래를, 춤이 부족하면 춤을 올리는 식으로.
“실례합니다.”
그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가 내게 접근하는 바람에 상념이 깨졌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원단의 양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고압적인 분위기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캐스팅 매니저는 아닌 것 같은데…….
“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SR 엔터테인먼트 대표 박태민입니다.”
“……네?”
대표님이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검은색 배경에 금박 테두리가 있는 명함에는 ‘SR 엔터테인먼트 대표 박태민’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갑자기 여기서 대표?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건방져 보이지 않고, 잘 낚아채면 낚일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을까? 이 나이대 남자랑 대화해 봤어야 알지!
나는 일단 두 손으로 명함을 받은 채 눈을 끔벅거렸다. 대표가 눈매를 접으면서 웃자 고압적인 분위기가 싹 사라졌다. 순식간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되어서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았다.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아, 네. 시간은 괜찮은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 진하온입니다.”
“반갑습니다. 진하온 씨. 외모가 무척 매력적이라 시선을 잡아끌더군요. 실례인 건 알지만 지금 준비 중인 아이돌 그룹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말을 걸고 말았습니다. 하온 씨가 함께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역시 준비 중이었구나. 연습생 되기가 메인 미션이었는데 갑자기 데뷔하게 되면 메인 미션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얻을 수 있는 포인트를 못 먹고 스킵하는 건 아깝지만, 그게 아까워서 이 기회를 걷어찰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물론 무조건 데뷔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혹시 생각 있으시면 오디션 한 번 보러 오실래요?”
“아, 네, 네에…….”
“이야기해 놓을 테니 편할 때 저희 사옥에 한 번 방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명함 뒤쪽에 주소가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가까워요.”
“네.”
“이왕이면 꼭 오셨으면 좋겠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대표님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볼일 다 끝났으니 떠날 줄 알았건만,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물끄러미 날 바라볼 뿐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당황해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던 중이었다.
“……삼촌.”
덥수룩한 앞머리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등이 굽어서 자신감 없어 보이는 남자가 주춤거리며 대표를 불렀다. 대표가 시선을 돌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뵙죠.”
“네, 안녕히 가세요.”
어정쩡하게 일어나서 인사하자 대표님은 날 향해 정중하게 고개 숙이며 인사를 받아주셨다. 그리고는 남자를 데리고 카운터를 향했다.
나는 멍한 정신을 돌리기 위해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알바 누나가 호들갑 떨면서 내게 다가왔다.
“뭐야, 뭐야? 캐스팅된 거야?”
“어? 네에. SR엔터 대표님이시래요…….”
“헐, 대박! 그럴 줄 알았어! 너 무조건 캐스팅될 줄 알았다니까? 데뷔하면 내가 1호 팬 해줄게!”
“고맙습니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대꾸하자 누나가 맑게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카운터에 있던 다른 알바생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빨리 오라면서 으름장 놓고 돌아갔다.
“어휴. 너 오는 시간에는 항상 손님이 많아져서 잠깐 이야기할 시간도 없네. 미안!”
“힘내세요.”
카운터에서 주문받는 누나를 잠깐 힐끔거린 뒤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종이일 뿐인데도 질감이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
제목: 하성동 XX 카페, 두리 캐스팅 된듯
먼저 오늘 내가 인사드린 낯선분께 죄송함.
자주 봐서 내적친밀감이 많이 쌓여있던터라
너무 놀란 나머지 눈 마주치자 인사해버렸음.
받아줘서 고마웠음...
이제 본론.
두리가 캐스팅된 것같음.
왜냐면 나는 봤음. 봐버렸음. 보고야말았음.
두리에게 접근한 양복남! 그는 바로!
스알 대표임...!
[스알 대표 사진]
기사사진 퍼옴. 초상권 침해 고나리 사절
오늘 온 사람 중 본 사람 있을거라 생각함.
무려 스알대표가 명함을 주고감.
두리야! 제발 데뷔하자ㅠㅠㅠㅠㅠ
당당하게 덕질하고 싶다아아아아아앜!!!
지갑은 준비됐다고오오오오옼!
─ 두리가 누구야?
┗ 매일 오후 두시 쯔음 XX 카페에 나타나는 예쁜애 있음. 17? 18? 쯤 되어 보이는! 오후두시>오둘이>오두리>두리 ㅇㅋ?
─ ㅁㅊㅁㅊㅁㅊ! 나도 봤어!! 스알대표 아냐? 했는데 진짜 맞네
┗ 안녕? 반갑다. 내가 인사한 사람은 아니지?
┗ ㅇㅇ... 난 아냐ㅋㅋ
─ 인사 받은 사람인데... 나도 내적친밀감 때문에 반가운척했어... 과실 5:5로 하자...
┗ 으응.. 각자 이불차자
┗ 그냥 둘이 친구해ㅋㅋㅋㅋ
─ 미자가 매일 오후 2시에 카페에 가? 학교 안 다니나?
┗ 일반인 개인사정임. 신경끄셈. 이유가 있겠지
┗ ㅎㅎㅎ 이런건 일반인이고 두리두리~ 하면서 미자한테 질척거리는 건 괜찮고?ㅎㅎ
┗ 병먹금
─ 너네 그것도 스토킹이야──; 이런 거 올리지마;;
┗ 맞아. 일반인 미자 빠는거 좀 눈살찌푸려짐.
┗ 아니 ㅅㅂ 미행하는 것도 아니고, 사진 찍어서 유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카페에 오는 애 보면서 안구정화 하는 게 무슨 스토킹임?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