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이 년 후.
해가 두 번 바뀌는 동안 도훈은 더욱 바빠졌다.
비행기 좌석에 황수영과 나란히 앉은 도훈은 태블릿을 꺼내 그동안 스크랩해 놓은 기사를 확인했다.
첫 번째 기사는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에 관한 기사였다.
그곳에는 두 명의 한국인이 나란히 오스카상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바로 정여진과 이지유였다.
정여진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이지유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손에 쥐었다.
그해 아카데미에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정여진과 이지유가 가져갔다.
덕분에 유레카뿐만이 아니라 미라클 그룹 전체가 난리 났다.
그룹 주식이 그날 일제히 평균 3% 상승한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도훈이 태블릿화면을 밀자 다음 기사가 나타난다.
바로 에미상 시상식이었다.
아카데미의 전초전이라고 하는 에미상에서는 한민국이 시리즈 부분에서 상을 받았다.
한민국이 출연한 좀비물 덕분이었다.
제목은 러닝 데드.
한민국은 이 시리즈 한 편으로 평생 먹을 것을 다 벌었다고 자랑하고 다닌다.
그런데도 때가 되면 한국에서 도훈의 옆에 붙어 운전기사 노릇을 하는 것은 조금은 의외였다.
그때 저장해 놓은 기사가 바닥을 드러냈는지 도훈의 손가락이 멈췄다.
옆에 있던 황수영이 묘한 웃음을 짓더니 대신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그곳에 나와 있는 것은 바로 토니상 기사였다.
뮤지컬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바로 그 상이었다.
작년 그 상의 주인공도 한국인이었다.
바로 엠리.
기사의 주인공은 바로 도훈이었다.
황수영이 피식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왜 쑥스러워해요?”
“쑥스러워서 그런 거 아닙니다, 수영 씨.”
“그러면요?”
“좋은 건 아껴 가면서 봐야죠.”
도훈이 활짝 웃었다.
도훈이 피아노맨에 출연하면서 브로드웨이의 역사는 바뀌었다.
동양인 주연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며 피아노맨은 토니상 중 네 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남우주연상이었다.
황수영이 도훈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러다가 EGOT 클럽에 드는 거 아니에요?”
“설마요?”
도훈이 고개를 저었다.
EGOT 클럽이란 대중 예술 쪽에서 유명한 네 개의 상을 모두 받은 사람 뜻한다.
소위 말해 할리우드의 그랜드슬램.
보통은 음악가들이 대다수였다.
음악은 모든 대중 예술이 들어가니까.
하지만 황수영 말하는 것은 다른 뜻이었다.
“제 얘기는 유레카라는 회사 이름으로는 가능하다는 얘기에요.”
“흠, 생각해 보니 기대되네요.”
도훈이 태블릿을 만졌다.
이번의 미국행은 바로 그래미상 때문이었다.
바로 블랙홀이 미국 상륙 2년 만에 꽃을 피운 것이다.
빌보드 1위는 거쳐 가는 경로였고.
최종 목적지는 바로 그래미상이었다.
빌보드 1위를 두 번이나 찍었는데 그래미 시상식에서 패스당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이번 그래미상 후보에는 블랙홀뿐이 아니었다.
도훈도 후보에 올라가 있었다.
가수로서가 아닌 작곡가로서 말이다.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낸 도훈을 그래미는 철저히 외면했다.
오죽하면 인종 차별이란 기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제 불판은 달구어졌고 이제 다 익은 고기를 먹기만 하면 될 상황 같았다.
그 정도로 언론은 도훈의 편이었다.
그때였다.
황수영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
“우리 할아버지가 도훈 씨한테 갖다 주라고 했어요. 생일도 지났는데…….”
“이게 뭐예요?”
“저도 몰라요.”
“참, 그러고 보니 우리 할머니도 수영 씨한테 주라면서 맡긴 게 있어요?”
도훈도 가방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둘은 선물 상자 두 개를 교환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들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 각자의 선물을 열어 봤다.
도훈은 황백석 회장의 상자를 열어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곳에는 고가의 시계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때 황수영이 눈을 크게 떴다.
“도훈 씨 이거 봐요.”
“거기에는 뭐가 들어 있어요?”
“저한테는 반지에요.”
“반지요?”
“여기 편지도 있는데요.”
황수영은 상자에 담긴 쪽지를 꺼냈다.
편지를 확인하는 황수영의 볼이 벌게졌다.
그러고는 할 말을 잃은 듯 황수영은 입을 벌린 채 석상이 되었다.
도훈은 재빨리 편지를 낚아챘다.
[도훈아, 수영아. 너희들이 미적대서 늙은이들이 신경 좀 썼다. 이건 너희 예물이고…….]
순간 도훈도 입을 크게 벌렸다.
장경자와 황백석이 준 상자는 결혼 예물이 담긴 상자였다.
둘이 사귄다고 한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비즈니스 관계 이외에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 비즈니스라는 것 때문에 24시간 붙어 있을 때도 많았다.
그렇게 같이 다니면서 진도가 안 나가자 장경자와 황백석이 손을 쓴 것이다.
편지의 말미에는 이번 미국행을 신혼여행 삼으라고 재촉하는 글귀까지 있었다.
도훈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 옆에서 황수영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훈 씨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약간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에 도훈이 그녀를 바라봤다.
느낌상 그런 게 아니라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도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 * *
황수영은 비행기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기가 죽어 있었다.
그녀는 도훈에 대한 마음이 확고했다.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앞으로의 동반자로 찍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도훈은 너무 멀리 있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묘하게 간격이 느껴졌다.
재력으로 보나, 유명세로 보나.
모든 면에서 도훈은 한국이 아닌 세계가 배경이었다.
이제는 도움이 필요 없는 도훈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황수영의 판단이었다.
그녀는 기가 죽은 채 그래미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그녀의 표정이 살아난 것은 그룹 부문 앨범 시상식에서 블랙홀이 수상하면서였다.
회사 차원에서 EGOT를 달성한 것이다.
그래미상 시상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수상 부문이 많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상을 받고 무대에서 내려가야 했다.
거기에 중간중간에 광고 타임이 삽입되었다.
광고 타임에는 무대 뒤 스크린에서 TV 광고와 동일한 영상이 흘러나온다.
모든 것이 비즈니스라는 할리우드 방식이었다.
그때였다.
작곡 부문에서 도훈의 이름이 나왔다.
물론 엠리라는 미국식 이름이었다.
도훈은 조용히 걸어 나왔다.
상을 받은 도훈은 마이크를 잡고 간단한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 인사와 함께 무대 감독 케서린이 손을 흔들었다.
바로 뒤에 TV 광고가 이어진다는 신호였다.
그때였다.
스크린에서는 묘한 TV 광고가 흘러나왔다.
바로 블랙홀의 뮤직비디오였다.
다섯 남자는 춤을 추며 누군가에게 구애하고 있었다.
노래 가사도 결혼해 달라는 구혼가였다.
무대 감독은 그 광고를 넋을 잃고 바라봤다.
이것은 무모한 마케팅이었다.
그래미상 중간 광고료가 대체 얼마인데 3분이 넘는 뮤직비디오를 튼다는 말인가!
그는 속으로 욕을 하는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바로 우아한 선율과 가사 때문이었다.
이 노래를 듣고 청혼을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케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 이입해서 영상에 빠져들었다.
미혼이라면 누구든 반할 수밖에 없는 뮤직비디오였다.
그때였다.
블랙홀 멤버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마치 원래 멤버였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블랙홀의 안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사내는 천천히 앞쪽으로 나왔다.
카메라를 잡아먹을 것처럼 걸어왔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사내는 카메라의 앞에서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낸 후 열었다.
카메라가 상자 속을 비춘다.
상자 속에는 평범하게 생긴 반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자막.
<결혼해 줘!>
청혼가에 딱 어울리는 자막이었다.
그때였다.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듯한 사내가 누군가에게 반지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뮤직비디오와 이어지는 장면이었다.
사내의 모습도 뮤직비디오 속 사내였다.
객석에서 누군가 외쳤다.
“와, 엠리다!”
“그럼, 저건 광고가 아니라…….”
“엠리의 프러포즈 영상이잖아.”
“와아!”
객석에서 쏟아지는 박수 소리.
그에 이어지는 함성.
시상식장이 떠나갈 것 같았다.
카메라는 프러포즈하는 도훈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물론 도훈의 모습만은 아니었다.
눈시울을 붉히며 어쩔 줄 모르는 황수영의 모습도 담겨 있었다.
* * *
7년 후.
서울 강동구의 어느 유치원.
이곳은 미라클 직원을 위해 설립한 사설 유치원이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바로 크리스마스 행사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산타할아버지가 와서 선물을 나눠 주는 행사였다.
보통 산타할아버지 역할을 맡는 것은 학부모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봉사 차원에서 대행한다.
그런데 오늘은 산타가 조금 많이 왔다.
산타 복장이 모자랄 정도였다.
물론 그들이 넋이 빠져 있는 것은 산타 복장만이 아니었다.
바로 산타 역할을 하기 위해 자원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햇님반 선생님 박하연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국내 탑티어 그룹, 아니 세계적으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룹인 블랙홀이 서로 산타 복장을 하겠다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도 황당한데, 그 옆에는 가필드의 리더 장혁까지 가세해서 침을 튀기고 있었다.
물론 미스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가장자리에 피해 있었다.
그때였다.
옆 반 선생님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박 선생님.”
“왜 그러세요?”
“아니, 외국에서 산타가 왔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반에 누리라고 있죠?”
“이누리요?”
“네, 그 아이 대부와 대모라고 하면서 외국인들이 산타 복장을 하고 왔어요.”
“대체…….”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왠지 낯이 익어요.”
“아는 분이라는 말씀이에요?”
“아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낯이 익어요. 저, 저기 오네요.”
옆 반 선생님이 외국인들을 가리켰다.
순간 박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옆 반 선생님이 말대로였다.
기억을 더듬던 박하연은 눈을 크게 떴다.
팝의 여제라 불리는 마리나부터 팝의 황제라 불리는 카이클까지.
거기에 더해서 뉴 키즈까지 뭉텅이로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LA교향악단의 지휘자인 마이클 윌까지 있었다.
거기에 세계 3대 테너로 추앙받는 까를로스까지 모두가 산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박하연 선생님은 이곳이 시상식장인지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리는 교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박하연은 자신이 맡고 있는 누리를 떠올렸다.
엄마 아빠가 미라클의 직원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둘이 맞벌이를 해서 아직 학부모 상담도 못 한 상태였다.
누리는 엄마 아빠가 바쁜 것도 이해하는 착한 아이였다.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아이.
누리가 사랑스럽고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하긴 했어도 이렇게 유명인들과 연결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외국인 뒤로 할머니 하나가 나타났다.
그 할머니는 고개를 흔들며 뉴 키즈의 제이든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아니, 여기 오지 말라고 했더니 왜 와서 선생님을 놀라게 해!”
“아니, 조카는 봐야죠. 그랜드마덜!”
“또 말대꾸야!”
할머니가 일침을 내지를 때였다.
뒤쪽에서 누리가 달려 나왔다.
한참을 달려온 누리는 할머니의 품에 안겼다.
박하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할머니도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 * *
정신없는 크리스마스 행사가 끝나고 햇님반 아이들의 무대가 이어졌다.
고생한 산타들에 대한 보답이었다.
누리가 앞으로 나왔다.
다른 아이들이 따라 하기가 버거운 곡을 골랐기에 누리는 솔로 무대를 소화해야 했다.
뒤쪽에서 누리의 아빠인 도훈은 흐뭇한 표정으로 누리를 바라봤다.
도훈의 눈에는 누리의 주변에 떠다니는 알파벳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재능이었다.
도훈이 심어 주지 않아도 누리는 타고난 것이다.
그때 황수영이 도훈의 팔짱을 꼈다.
그녀는 배가 살짝 나와 있었다.
얼마 전 누리 동생을 가졌기 때문이다.
도훈의 황수영을 감싸며 조용히 모두를 바라봤다.
전생과 이어진 인연도 있었고.
현생에서 새롭게 만난 인연도 있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지금이 도훈을 만들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에 인생에 도훈이 관여하기도 했었다.
세상은 이런 걸 시너지 효과라고 한다.
도훈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매니저의 비밀 수첩이 아직도 빛나고 있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는 듯이…….
《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