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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연이 웃자 장경자가 핸드폰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알람 맞춰 놓은 거 그냥 두고.”
“네, 회장님.”
말을 마친 엄지연이 자신의 태블릿으로 스케줄을 확인했다.
장경자는 정확히 한 달 후에 출국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글로벌 펀드 운용을 위해서였다.
그 시작은 당연히 인맥 관리.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려면 일단 사람부터 알아야 했다.
국내를 벗어난 자신은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것을 장경자는 알고 있었다.
뭐, 미라클과 아는 회장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인맥을 구성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장경자는 한 달 뒤에 있을 자신의 행보에 미라클이라는 그룹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 * *
한 달 후 LA 국제공항.
시원한 옷차림의 사내들이 입국 게이트에서 나왔다.
옷차림만 시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외모도 시원스럽게 보였다.
한눈에 봐도 황금 비율이라고 할 만한 체형이었다.
사내들은 하나 같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중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내는 딱 한 명이었다.
그는 마스크 대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쓴 사내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게이트를 나온 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사내는 짙은 색의 선글라스 안쪽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사내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푯말을 확인하고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푯말은 정확히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환영해유. 이도훈 실장〉
푯말에 적힌 것은 표준어가 아닌 구수한 사투리.
푯말을 들고 있는 것은 서글서글하게 생긴 금발의 곱슬머리 사내였다.
푯말을 들고 있는 사내는 애론 머스크.
도훈과 여러 가지 일로 엮인 사내였다.
애론은 진심으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연히 간 한국에서 애론이 마주한 것은 귀인이었다.
사실 모든 것이 뉴 키즈 덕분이었다.
뉴 키즈에 대한 팬심으로 장산시라는 곳의 돌발 콘서트에 갔다가 귀인을 만난 것이다.
자신을 그곳으로 이끌어 준 뉴 키즈도 귀인이었고 콘서트에서 만난 미라클의 회장도 귀인이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이도훈이라는 큰손이 존재했다.
애론이 만사를 제쳐 두고 이렇게 나온 것도 바로 도훈 때문이었다.
사실 한국에 가기 전 몇 달 정도가 애론의 삶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
전기차 사업이라는 것이 한두 푼으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업 초창기에 약속했던 국가 차원의 지원도 아직 멀었고 연구 개발비는 하늘 모르고 치솟았다.
조금 쉽게 상황을 말하면 별을 따기도 전에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었다.
조금의 시간만 준다면 하늘에 걸린 별을 딸 수 있었다.
물론 추상적인 의미의 별이었다.
그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바로 장경자와 도훈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둘이 할머니와 손자 사이면서도 투자에 있어서는 철저히 프라이버시를 지켰다는 점이다.
얼마나 철저한지 서로 얼마를 투자했는지도 모른다.
도훈이나 장경자나 알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사실 기업 차원에서의 투자가 아닌 개인적인 투자였기에 미라클이란 기업 차원에서 공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 둘이 귀인이었던 것이, 그들을 만난 후부터 모든 게 잘 풀렸다.
상하위원들을 향한 로비도 성공적이었으며 개발 쪽도 가속도가 붙었다.
그때 애론의 앞에 도훈이 다가왔다.
뒤쪽에 보이는 친구들은 마스크를 썼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한국에서 감자탕을 같이 먹었던 블랙홀이었다.
애론이 손을 들었다.
도훈이 바로 앞까지 왔기 때문이다.
“저기…….”
순간 애론을 말을 맺지 못했다.
도훈이 애론의 앞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헤이, 미스터 리!”
불러 봤지만, 도훈은 애론을 지나갔다.
애론은 당황한 표정으로 도훈의 뒤를 쫓았다.
도훈은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도훈은 애론과 똑같은 푯말을 든 사내의 앞에 서 있었다.
철자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도훈을 환영하는 문구가 틀림없었다.
미국에 와서도 애론은 한국어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안다.
물론 자신이 사투리를 쓴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애론이 멍하니 있자, 누군가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애론, 반가워요.”
“오, 당신은 블랙홀의 시원 맞지유?”
“사투리는 여전하시네요.”
“그런데 도훈이 왜 날 모른 척…….”
“그러기에 표준어 공부하시라고 했잖아요. 이쪽으로 오세요. 저쪽에 소개시켜 드릴 분이 있어요.”
우시원이 애론을 잡아끌었다.
애론은 일단 우시원에게 끌려갔다.
애론이 오자 도훈이 웃었다.
“애론, 이쪽은 유레카의 미국 담당 장 비서라고 해요. 참, 이름을 말씀드려야…….”
“아닙니다, 대표님. 저는 장 비서가 편합니다.”
장 비서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지금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이도준의 옆에 있을 때는 말이 좋아 비서지, 소위 말하는 따까리의 삶을 살았다.
그는 도훈에게 이도준의 비리가 담긴 파일을 넘기고 사법부의 면책을 받았다.
그러고는 유레카의 미국 지사 책임자로 발령을 받았다.
미국에 있다 보니 이도준의 옆에서 구르던 기억들은 눈이 녹듯 사라졌다.
그때의 삶과 지금의 삶은 한마디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는 지금 제법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다.
물론 도훈이 마련해 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LA 오케스트라의 마이클 윌이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
거기에 까를로스는 어떠한가?
가끔 그가 LA에 있는 유레카 지부에 놀러 올 때면 파파라치들이 같이 몰려왔다.
파파라치들에게 찍힌 사진은 예상외로 효과가 좋았다.
유레카도 엄연한 기획사.
미국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지만, 그걸 샅샅이 뒤져 기사화시키는 것은 바로 기자들의 임무가 아니던가.
지금 유레카는 아티스트가 미국 본토에 진출하기도 전에 잡지의 연예계 소식란에 두 번이나 등장했다.
한 번은 까를로스의 전속 계약에 대한 추측성 기사였고 다른 하나는 마리나의 기사였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홍보 효과는 톡톡히 봤다.
그들의 소속사만이 아니라 장 비서도 사정을 밝혀야 했으니 인터뷰는 당연한 일이었다.
유레카의 미국 지부 책임자인 장 비서의 인터뷰가 나간다는 자체가 회사 차원에서는 홍보였다.
물론 미국 문화와 언어에 능숙한 장 비서이기에 더욱 수월한 측면도 있었다.
장 비서는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기분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좋은 대학을 나와 유학까지 다녀와서도 음지에서 일했던 그였다.
지금은 양지로 나와 눈부신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를 눈부시게 만든 인물, 아니 태양이 바로 도훈이었다.
장 비서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애론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장 비서라고 합니다.”
“애론이예유.”
“그냥 영어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장 비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 * *
그들은 애론의 저택으로 향했다.
애론의 저택 앞마당을 둘러보던 블랙홀 멤버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건 뭐예요?”
“오, 보는 눈이 있네유, 찬휘.”
“아니, 이거 배트카잖아요. 이게 왜 여기 있어요? 애론 혹시 신분을 숨긴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유. 찬휘가 알고 있는 대로. 제 진짜 신분은 슈퍼맨이에요.”
“하하, 조크가 우리 삼촌이랑 똑같네요.”
“그게 무슨…….”
애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재 개그라는 말이었는데, 뜻이 잘 소통이 되지 않는 듯했다.
도훈은 조용히 애론의 주차장을 살폈다.
애론은 듣던 대로 자동차 매니아인 것 같았다.
지금 서찬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만져 보는 배트카도 경매를 통해서 낙찰받은 것이라고 들었다.
애론은 전생에는 접점이 없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뉴스를 통해서 하루가 멀다고 기사의 주인공이 된 인물이었다.
대충 기사의 밑에 달린 댓글을 반응은 대부분 ‘형이 하고 싶은 거 다 해!’였다.
그만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다.
코인에서 기업 인수까지.
성공한 사업도 많았지만, 말아먹은 사업도 산더미였다.
물론 지금 그가 매달리는 전기차는 성공한다.
우주 최강의 기업이라 불리는 아마존의 시가총액을 따라잡을 만큼 말이다.
도훈은 그가 성공한 사업에만 철저하게 투자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서찬휘가 배트카에 앉았다.
옆에 있던 우시원이 서찬휘를 잡아끌었다.
“막 앉으면 어떻게 해!”
“애론 아저씨가 앉아도 된다고 하셨어, 그렇죠?”
서찬휘가 애론을 바라봤다.
애론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유.”
애론의 말에 우시원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저도 앉아 봐도 돼요?”
“물론이지유.”
“땡큐요.”
우시원이 앉아 서찬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애론 아저씨, 저 운전해 봐도 돼유?”
애론의 사투리를 흉내 낸 서찬휘.
도훈은 재빨리 서찬휘의 귀를 잡아당겼다.
“너, 빨리 나와.”
“왜, 왜 그러세요, 실장 형?”
“너, 국제 면허는 고사하고 국내 면허도 없잖아.”
“아, 그렇지. 그런데 일단 귀는 좀…….”
“내가 다 봐줘도 음주 운전하고 무면허는 안 봐준다. 나한테 걸리면 죽는 거야!”
도훈의 목소리에 애론이 갑자기 시선을 피했다.
뒤로 물러나던 애론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음주운전 안 했어유, 도훈.”
“왜 괜히 찔려서 그러세요? 혹시…….”
“아니에유. 그보다 제가 바비큐 파티를 준비했는데! 그러니까유…….”
애론은 랩을 구사하듯 설명을 이어 갔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신이 일정을 준비했다고 했다.
일명 마케팅에 필요한 투어!
일단 오늘은 바비큐 파티로 피로를 푼 후.
할리우드에서 아는 인사들을 소개해 준다고 했다.
그리고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예약해 놨다고 했다.
도훈이 고개를 갸웃하자 애론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LA는 스타가 모이는 곳이지만, 뉴욕은 거물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이다.
돈과 권력이 모이는 곳.
마케팅을 위해서는 그곳을 중심으로 공략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물론 애론이 그곳까지 동행해 주기로 했다.
* * *
며칠 후.
뉴욕의 맨해튼 번화가에 높이 솟은 힐튼 호텔의 홀에서는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가 주최하는 자선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트럼프는 현재 서서히 정계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재벌이자 예능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여기서 예능은 2007년까지 진행했던 어프렌티스란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트럼프는 자신과 일할 직원을 뽑은 CEO로서 활동했다.
영국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사이먼이 있었다면, 트럼프는 어프랜티스에서 독설가로 이름을 드높였던 것이다.
덕분에 이번 자선행사에는 정재계 인사뿐 아니라 미국의 영화 배우와 팝 아티스트도 다수 참석했다.
유명인이 참석하자 그가 발행한 자선행사 티켓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정재계 인사와 스포츠와 연예계 스타를 한자리에 볼 수 있는 행사는 드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행사에 다양한 분야의 스타들이 모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대규모로 정재계 거물과 스타들이 참여하는 행사는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지금도 위쪽 전광판에 표시된 금액이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