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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찬휘의 광고 멘트와도 같은 말에 우시원이 기가 찬다는 듯 외쳤다.
“야, 서찬휘. 우리가 무슨 방역 업체도 아니고 왜 고객을 찾아가?”
“아이돌이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럴 때일수록 이미지 메이킹을 해야 하는 거야.”
서찬휘가 검지와 엄지를 펴서 턱에 붙이며 포즈를 취했다.
“그래야 멋있잖아.”
그들이 다시 서로를 쏘아붙이자 아영과 희재가 뒤쪽으로 물러났다.
아영이 고개를 숙였다.
“사인 감사해요, 가보로 간직할게요.”
“저도요, 그럼…….”
희재도 뒷걸음질 쳤다.
그때 우시원이 다급하게 불렀다.
“잠시만요.”
“네?”
아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아영이 고개를 돌리자 우시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언니 있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아영은 입술만 달싹이며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우시원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물었다.
“친언니가 아니어도 돼요.”
우시원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아영이 그제야 물었다.
“그런데 언니는 왜요?”
아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자 우시원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제가 아는 형 중에 진짜 괜찮은 사람이 있거든요. 잘생기고 성격 좋고 거기에 돈도 많아요…… 그런데 여자 친구만 없어요.”
우시원은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에 서찬휘가 우시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너, 그러다가 실장 형한테 죽을 수도 있어.”
“그래도 확률을 높여야지.”
“그런가?”
서찬휘도 고민하는 듯 턱을 어루만졌다.
아영은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매니저 형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아영은 블랙홀에게 인간미를 느꼈다.
매니저를 저리 챙기는 아이돌이 세상에 있을까?
그 매니저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안달복달하며 소개해 주려는 것으로 봐서 우시원이 설명한 것의 반대일 것이 분명했다.
잘생기고 돈 많은데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 소개팅을 할 수 있다고?
이건 말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예의상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아, 그분 소개해 주시게요?”
“네.”
우시원이 눈을 빛내자 옆에 있던 서찬휘가 나섰다.
서찬휘는 한 손을 휘저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우시원을 잡아끌었다.
“아닙니다.”
그때였다.
우시원을 잡아끌고 뒤쪽으로 물러나려던 서찬휘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뒤쪽을 돌아보니 수많은 사람이 종이와 펜을 들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그것도 질서정연하게 두 줄로 말이다.
서찬휘가 우시원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지?”
말을 마친 서찬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시원도 고민하는 듯 턱을 만졌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블랙홀 멤버들의 모습에 아영과 희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스타를 알아보고 불특정 다수가 몰려든다면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하는 게 상책이다.
불특정 다수가 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금은 경호원도 없고 매니저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한발 다가갔다.
지금 상황은 일단 튀어야 한다고 조언해 주기 위해서였다.
다가가려던 아영은 발길을 멈췄다.
우시원이 고민을 끝낸 듯 활짝 웃었기 때문이다.
“에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힘이 닿는 데까지는 사인해 드려야지. 팬이 있고 나서 우리가 있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허락도 없이 괜찮을까?”
“실장 형은 분명히 허락했을 거야. 실장 형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팬을 무시하는 스타잖아. 누구 덕에 먹고사는 건데! 하면서 고함칠걸.”
“그럼 오랜만에 손 좀 풀까?”
서찬휘가 손가락을 딱딱 꺾었다.
그때 우시원이 옆을 보며 말했다.
“혹시 우리 좀 도와줄래요?”
“어,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아영이 침착하게 물었다.
난데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대화를 들어 보니 뭔가 옆집 오빠처럼 친근한 느낌도 들었다.
일반적인 스타들과는 발상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과연 아이돌 중에 몇이나 진심으로 팬들이 먼저라는 발언을 할 수 있을까.
옆에서 보니 아영의 친구 희재는 몰래 핸드폰으로 지금의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아마도 블랙홀의 안전을 우려해서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증거 영상이라도 내밀어야 하니 말이다.
아영과 희재는 자신도 모르게 블랙홀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스타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했다.
화보 속에만 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스타가 아닌, 눈앞에서 반짝이는 스타.
블랙홀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그런 스타였다.
아영과 희재는 졸지에 간이 사인회의 진행 요원이 되었다.
* * *
멀티플렉스 21관.
멀티플렉스 21관은 단체 관람을 위한 상영관 대여를 하는 곳이었다.
사실 이곳은 소수의 시사회도 많이 이루어진다.
대관을 하는 상영관이라서 입구에 조그맣게 영화 제목이 걸려 있었다.
오늘 이곳에 걸린 것은 ‘초원의 집’이었다.
제목을 본 도훈은 피식 웃었다.
이곳을 대관한 것은 블랙홀의 멤버들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영화도 선택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재미있는 영화도 많을 텐데 같은 유레카 식구의 영화라는 이유로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녀석들도 참…….”
재미있다는 듯 티켓을 윗주머니에 넣고 문을 열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간 도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영웅을 비롯한 정여진 그리고 이지유 등 유레카 식구들이 오기로 했었다.
그런데 상영관 안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를 찾았다.
“C열 7번이라…….”
자리를 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훈은 일단 자리에 앉아 화면을 봤다.
화면에서는 현재 상영되고 있는 작품들의 예고편이 흘러나왔다.
도훈은 이 작품들의 성적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금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예고편의 예상 관객 수를 떠올려 봤다.
“흠, 저건 백이십만…… 그리고 저 작품은 오백만…….”
직업병인지는 몰라도 예고편을 보면서 손익분기점을 따지고 수입사의 재정이 어떻게 될지까지 머릿속에 그렸다.
그때였다.
한 줄기 빛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아마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도훈은 팔짱을 끼고 예고편을 감상했다.
조용히 예고편을 감상하고 있을 때 누군가 도훈의 옆에 앉았다.
도훈은 그제야 상대를 확인했다.
상대를 본 도훈이 활짝 웃었다.
“수영 씨가 제일 먼저 왔네요?”
“네, 다른 분들은 스케줄 때문에…….”
황수영은 조금은 높은 톤으로 변명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상황을 블랙홀 멤버들이 본다면 아마 뒤로 까무러칠 것이었다.
블랙홀은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돈을 들여 상영관을 빌려서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소개팅 자리에 황수영이 직접 나오다니!
물론 도훈에게는 지금 상황이 별일 아니었다.
유레카의 식구들과 영화를 보기로 했고 그중에 한 명이 나왔으니까.
이상한 것은 황수영이 살짝 당황했다는 것이다.
도훈은 집안에 무슨 일이 있겠거니 하고 웃었다.
“……잘못하면 우리 둘이 보겠네요.”
황수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두 손을 꼭 쥐고 속으로 외쳤다.
블랙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몇 번이고 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블랙홀의 서찬휘와 우시원에게 부탁을 받았을 때 황수영은 살짝 당황했었다.
황수영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도훈에게 스타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국내의 아이돌이나 배우보다 더 큰 아우라를 본 그녀는 도훈을 진심으로 케어해 보기로 했다.
케이넷 채널의 동업자가 된 것도 사업적인 측면보다 도훈이라는 원석 하나만 보고 덤빈 것이다.
물론 사업적으로도 놀랄 만큼 성공했다.
오죽하면 그녀의 할아버지 황백석 회장이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니겠는가.
요즘 그녀의 할아버지 황백석 회장은 입이 근질거려서 참지를 못하고 있었다.
황백석 회장과 문송의 황 회장과는 친척 관계였다.
전에는 황백석 회장이 월등하게 앞서갔지만, 밀레니엄이라 불리는 2000년대에 들어서는 문송에게 밀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 죽어 가는 케이넷을 살리는 것도 모자라 케이블 방송의 주류로 올려놓았다.
서른도 안 된 황수영이 말이다.
그러니 자랑할 거리는 차고도 넘쳤다.
황수영도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이 상황 자체가 황당했다.
그저 스타 하나가 좋아서 같이 일했을 뿐인데, 이런 행운이 따라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언젠가 도훈을 데뷔시키겠다는 꿈은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블랙홀의 우시원과 서찬휘가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멍해진 것이다.
순간 황수영은 도훈에 대한 감정이 스타와 매니저 사이의 관계가 맞나를 의심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도훈의 옆에 있는 것이 그 이상의 감정 때문인 것 같았다.
확실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도훈이 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서찬휘와 우시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게 되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것이 뻔했다.
그러느니 지금 이 문제를 일단락시키고 싶었다.
황수영과 도훈의 사이에는 미리 준비된 팝콘과 콜라가 놓여 있었다.
초원의 집이 상영되자 도훈과 황수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훈은 조용히 스크린을 바라보며 콜라는 시원하게 들이켰다.
도훈은 조용히 영화를 감상하는 지금 시간이 너무 좋았다.
유레카가 일정 궤도에 오르고 나서는 조금 인생을 즐겨 볼까도 했지만, 묘하게 상황은 도훈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한 달 후면 마리나도 녹음을 위해 한국에 올 거라고 하고 그 안에 미스트의 앨범도 준비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소환하라 1987이 19%라는 시청률로 막을 내리면서 케이넷과 유레카는 더욱 바빠졌다.
이지유에게 몰려드는 CF만 해도 하루에 몇 개씩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민국도 CF 제안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제는 운전기사를 따로 뽑아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에서 할머니 장경자의 압력은 다소 부담스러웠다.
누군가와 사랑하고 그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것은 누구나의 꿈이 아닐까?
그런데 지금은 일이 먼저였다.
조금만 더 유레카를 안정시킨 후에 주변을 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장경자는 마음이 급한 듯 하루에도 몇 번씩 엄지연을 통해서 도훈을 호출하고 있었다.
도훈은 지난번에 받은 명함첩에 적혀 있는 사람은 모두 싫다고 했다.
거기에 있는 사람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는 자체가 싫었다.
어찌 보면 이상한 얘기지만,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두려웠다.
도훈은 이미 인생을 한 바퀴 돌고 왔다.
그 속에는 수많은 배신자들과 수많은 방관자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자들을 빼고 인연이 있던 사람들만 함께하고 있었다.
덕분에 도훈이 뒤통수 맞을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