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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미스트의 리더 자현과 다른 멤버들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미스트의 멤버들이 자리를 떠나자 그제야 전후 사정을 파악한 황수영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럼 황강천은 껍데기만 가져간 거예요?”
“알맹이는 여기 있으니까요.”
도훈이 계약서를 흔들었다.
* * *
이틀 뒤.
수락산 아래 음식점.
평범하게 등산복을 입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젊은이들이 앉아 있었다.
누가 보면 자식들을 데리고 등산로를 오르는 평범한 노인들로 생각할 터였다.
부모 자식들 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것은 젊은이들이 너무 각을 잡고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중 한 명만 편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한 명이 바로 엄지연이었다.
그들은 한국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회장들이었다.
그 옆에 있는 비서들이 각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
다만 엄지연만은 장경자와 회장과 비서가 아닌, 가족과 같은 관계였다.
엄지연은 맛있는 반찬이 나오면 매가 쥐를 낚아채는 것처럼 재빨리 장경자의 앞에 갖다 놓았다.
“회장님, 이것 좀 드세요. 봄나물인가 봐요.”
“엄 비서도 먹어.”
그들의 모습에 회장들은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갈비탕을 몇 술 뜬 장경자가 말했다.
“이 갈비탕은 문송에서 내는 겁니다.”
“흠, 내기에서 왜 내가 졌다고 생각하나? 할망구!”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8 대 2로 정확히 가르마 탄 모습은 왠지 까칠해 보이기도 했다.
황 회장이 미간을 꿈틀대자 장경자가 말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걸 보니 죽을 때가 된 것도 같네.”
“그럼 증거를 대 봐.”
“문송에서 전자 빼면 뭐가 남나?”
“우리 문송에서 전자를 왜 빼!”
황 회장은 눈썹을 꿈틀댔다.
그도 그럴 것이 문송에서 전자 분야는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핸드폰과 반도체 그리고 가전제품까지.
전자가 지금의 문송 그룹을 만들었다는 것은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장경자의 지금 발언이 황 회장을 제대로 긁은 것이다.
황 회장이 소리를 지르자 장경자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 하는 말이지, 여기 봐 봐.”
장경자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기사 한 줄이 떠 있었다.
〈국내 최고의 그룹 미스트, 유레카와 전속 계약!〉
순간 황 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내게 보여 주는 이유가 뭐지?”
“문송에서 전자 빼면 남는 게 없다고 했지?”
“…….”
“SW엔터에서 얘네들 빼면 남는 게 없어, 그런데 내기에서 이겼다고 나한테 갈비탕 얻어먹으려고 하니, 내가 기가 차서 그래.”
“흠.”
“원래는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왜 자꾸 신경을 긁어?”
“…….”
황 회장이 말없이 자신의 비서를 바라봤다.
장경자가 하는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황 회장의 시선을 받은 그의 비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황 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실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손자인 황강천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유레카를 밟고 일어서라고 했다.
황 회장도 SW엔터가 국내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것은 알고 있었다.
사실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밑바닥부터 일으키기에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강천이 SW엔터를 인수해서 유레카를 꺾겠다고 했을 때 황 회장은 내심 만족했다.
주주들의 동의를 얻고 합당한 절차를 얻어 황강천이 SW엔터의 경영권을 손에 쥐었을 때 황 회장은 만족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알맹이가 없다니!
그때였다.
장경자가 엄지연에게 말했다.
“엄 비서야, 오늘은 껍데기가 당기네. 껍데기 좀 주문해라.”
“네, 회장님!”
엄지연은 쪼르르 계산대로 가더니 진짜로 돼지 껍데기를 주문했다.
그 모습을 다른 회장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바라봤다.
역시 남의 집 싸움이 제일 재미있는 법.
사실 기업 간의 암투라면 자리를 피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싸움은 그들에게 애교 수준이었다.
지글지글 익는 돼지 껍데기를 본 문송의 황 회장은 미간에 적당하게 각을 잡았다.
그 모습에 장경자가 말했다.
“집에 가서 너무 혼내지 말고. 다 실수하면서 크는 거잖아.”
“…….”
황 회장은 아무 말 없이 껍데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는 마치 껌을 씹듯이 껍데기를 씹었다.
모임에 참석한 회장들은 황강천의 앞날을 대충 예감하고 있었다.
황강천이 잘못한 것은 싸움에서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가장 큰 잘못은 싸움에 진 줄도 모르고 다리 뻗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 회장도 그것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유레카를 자근자근 밟았다고 큰소리치고 있었다.
정작 밟힌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 * *
일주일 뒤.
도훈은 혼자 차를 몰고 유레카의 별관에 도착했다.
유레카의 별관은 블랙홀의 연습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주차하게 시키고 사무실로 올라가자 강시혁이 반겼다.
“오늘도 이 실장 혼자네.”
“아무래도 운전기사 바꿔야 할 것 같아.”
“왜? 한민국이 뭘 잘못했기에…….”
“어제 민국이가 운전하고 나갔는데, 사람들이 알아보더라고.”
“헉.”
“생각해 봐, 지금 시청률 12%야. 그 정도면 케이블에서 초대박이지.”
“기사에서 보니 잘하면 20% 선도 넘을 거라면서?”
“그건 조금 오버한 거고. 어쨌든 케이블 12%짜리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를 운전기사로 부려 먹기는 좀 그렇잖아.”
“민국이는 나름 만족하는 것 같은데.”
“뭐, 기사로 남는다고 하면 내가 운전하고 민국이를 뒤에 태우면 되는 거고…….”
“하하, 유연한 사고방식 좋네.”
“유연하기는 할 수 없으니까, 이러는 거지.”
“참, 손님 도착했어.”
“벌써 도착했다고?”
“그래, 공항에서 바로 왔다고 하네.”
“흠.”
“일단 녹음실로 가 보자고.”
“그래.”
고개를 끄덕인 도훈이 앞장서서 녹음실로 향했다.
도훈이 녹음실 문을 열었다.
역시나 문도 비싼 것을 달아 놓고 나니,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훈이 완벽한 방음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도훈을 향해 뛰어왔다.
마치 붉은 천을 본 투우처럼 저돌적으로 뛰어오는 금발의 사내.
도훈이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중심을 잃은 사내가 옆으로 지나치더니 겨우 멈췄다.
그러고는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미스터 리! 반갑지도 않아요?”
“제이든, 무섭게 달려오니 당연히 반사적으로 피하지!”
“저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겁니까?”
“우리 사이에 무슨 사랑이야, 우정이지.”
“하하, 우정만 해도 저는 좋습니다. 일단 곡부터 주세요.”
“잠시 숨 좀 돌리자고”
도훈이 손을 내저었다.
잠시 후, 그들은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앞에 두고 그동안 못다 했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다행히도 뉴 키즈 멤버들은 모두 밝아 보였다.
제이든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공연이 그들에게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다.
드문드문 자리가 빈 객석을 보고는 팬들의 소중함을 느꼈고 도훈의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이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도훈과 음악을 교류하기 위해서였다.
이전에 그들은 곡을 받아 갔지만, LA 현지에서 녹음하다 보니 막히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뉴 키즈는 이번 앨범을 도훈과 강시혁이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도훈은 거절했다.
자신이 프로듀싱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제이든은 녹음할 때만이라도 있어 달라고 했다.
도훈을 절대적인 멘토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간곡히 부탁하니 도훈도 더는 거절 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오게 되면 몇 곡을 선물로 주기로 했다.
말이 선물이지, 알고 보면 비즈니스였다.
물론 제이든을 선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도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디링.
“잠시만 전화 좀 받고…….”
“그냥 여기서 받아도 되는데요.”
제이든이 도훈의 소매를 잡았다.
딱 달라붙는 모습이 약간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도훈은 할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이도훈입니다……. 아, 작가님. 제가 오늘은 조금 힘들 것 같은데요. ……다른 건 아니고 손님이 오셔서요.”
도훈이 통화를 끝내려 하자 수화기 너머 질문이 이어졌다.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손님이 누구냐고 묻는 것 같았다.
도훈이 아무렇지 않게 뉴 키즈라고 하자 수화기에서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옆에 있던 제이든이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도훈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숨을 고른 도훈이 말했다.
“오늘은 녹음실에만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네? 구경하러 오신다고요? ……집필은 어떻게 하고요.”
미간을 좁힌 도훈이 제이든을 바라봤다.
제이든은 마치 순한 양처럼 보글보글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신호였다.
도훈이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그럼, 오세요. 대신 절대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도훈은 전화를 끊고 제이든에게 양해를 구했다.
제이든은 무조건 좋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이 믿고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가 됐든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건 제이든의 진심이었다.
지난번 시청에서 공연 당시에는 도훈의 옆에 있는 사람을 모두 보지는 못했다.
이번에 와서는 도훈의 삶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제이든은 도훈을 그만큼 존경하고 있었다.
당시 도훈과 같이 공연했을 때 느꼈던 묘한 기분은 미국으로 돌아가자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만큼 도훈이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때 제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블랙홀 친구들은요?”
“서찬휘와 우시원은 아래 연습실에 있고 나머지 친구들은 지금 학교 갔어.”
“학교요?”
“응, 아직 학생이니까. 불가피한 사정이 없다면 출석 일수는 채워야지.”
“그 친구들은 언제 와요? 제가 선물 사 왔는데…….”
“한두 시간 정도 남았네.”
“혹시 한국 학교 구경해도 되요?”
“학교를 구경하겠다고?”
“그래요. 저는 도훈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요.”
“흠.”
도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장선우와 박수호 그리고 주현빈까지 모두 같은 학교에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뭘 고민해요. 이 실장. 내가 앞장설 테니 따라와요.”
녹음실이 떠나갈 정도의 목소리였다.
도훈이 돌아보니 그곳에서는 진시현 작가가 웃고 있었다.
“작가님!”
“원래 학교 취재는 내 전문이잖아요. 내가 전화하면 무조건 오케이예요. 잠시만 기다려 봐요. 그 친구들 다니는 학교가…….”
진시현이 핸드폰을 꺼냈다.
사실 도훈이 진짜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진시현과 통화한 지 5분도 되지 않았다.
이곳에 있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작가님, 그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
“저 요 앞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뉴 키즈가 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거든요.”
“대체 누가…….”
“그건 비밀입니다. 원래 정보원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법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