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컵이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니, 빨려 들어가려 했다.
퉁.
쓰레기통의 테두리를 맞고 튀어나온 플라스틱 컵.
정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컷, 다시 한 번 가겠습니다.”
순간 숨을 참고 있던 스태프들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 저게 조금…….”
그들은 이지유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지자 이지유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잘하겠습니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한민국은 대사를 한마디 뱉을 수 없었다.
이지유가 첫 번째 지문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지문은 간단했다.
―커피를 다 들이켠 후 시원한 표정으로 컵을 쓰레기통에 골인시킨다.
이지유가 맡은 역할은 고등학교 농구 선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리허설 때는 무리 없이 들어갔던 동작이었다.
이지유와 쓰레기통과의 간격은 2m 남짓.
중간에 NG가 계속되자 쓰레기통을 1.5m까지 거리를 줄인 상태.
사실 촬영 장면을 지켜보던 도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민국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이지유와 짜고 첫 장면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 불과 30분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마치 농구 선수라도 빙의한 듯 3m가 넘는 쓰레기통에 플라스틱 커피잔을 그대로 던져 넣었다.
그런데 이 거리에서도 이렇게 NG를 낸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중요한 것은 이지유가 초등학교 때까지 농구 선수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진시현은 이지유의 캐릭터를 농구 선수로 잡았다.
한마디로 이지유를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NG를 내다니!
보다 못한 진시현이 정찬성 감독에게 다가갔다.
진시현 작가가 다가오자 정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연출에게 신호를 보냈다.
잠시 쉬어 가자는 뜻이었다.
정찬성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진시현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같이 작품을 하면서도 진시현이 현장에 나타난 것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촬영 때나 나타나서 회식 자리에 참석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은 눈을 번뜩이며 이곳을 찾았다.
즉,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물론 진시현이 방문한 것은 도훈에게 용건이 있어 온 것이지만, 정찬성이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정찬성이 조심스럽게 진시현의 안색을 살폈다.
“작가님, 무슨 일이세요?”
“이지유 배우가 부담 느끼면 저 장면 없애도 돼요.”
“네?”
정찬성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청천 날벼락이었다. 현장에 와서 자신이 쓴 장면을 없애라고 한다는 것은…….
분명 이지유의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리라고 생각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든 일까?
정찬성이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은밀한 표정으로 귓속말로 물었다.
“혹시 이지유 배우가 마음에 안 드세요?”
“지금 무슨 말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장면을 없애라고…….”
“힘들어 보여서요 그러죠.”
“힘들어 보여서 그렇다고요?”
정찬성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진시현 작가가 배우를 걱정하는 것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촬영분을 모니터링할 때면 항상 투덜거리면서 ‘저 정도밖에 안 돼?’라는 멘트를 뱉는 것이 진시현이었다.
그런데 배우가 힘들어 보이니 장면을 바꾸자고?
이건 배려인지 무시인지…… 의도를 알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때 진시현이 이지유를 가리켰다.
“저 장면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농구공 하나 옆에 끼고 있어도 농구 선수라는 캐릭터는 살 거 아니에요?”
“그래도…….”
“힘들어 보여서 그래요. 제가 오늘 이도훈 실장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러니, 유레카 소속 배우들은 좀 편하게 해 주죠.”
“아!”
정찬성이 입을 딱 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을 풀리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도훈이 슬쩍 끼어들었다.
“굳이 배려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도훈은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이지유에게 걸어갔다.
도훈은 이지유 앞에 서서 피식 웃었다.
“아까는 잘하더니만…….”
“처음이잖아요.”
“촬영 현장이 처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떨어?”
도훈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까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웃음기를 잃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전에 보였던 어설픈 슛동작이 문제가 아니었다.
도훈이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표정 연기였다.
지금 이지유의 표정은 시간이 지나 굳은 밀가루 반죽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일단 그 표정부터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도훈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이지유에게 건넸다.
도훈이 건넨 것은 금박지에 쌓인 구슬 같았다.
이지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장님 그건 뭐예요? 혹시 초콜릿이에요?”
“아니, 청심환.”
“그걸 왜 제게?”
“너 떨고 있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표정이 굳어 있잖아. 그런데 이게 첫 촬영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해?”
“첫 촬영 맞아요, 실장님.”
“초원의 집에서 많이 겪었잖아…….”
“드라마는 처음이잖아요.”
“드라마는 처음이라…….”
도훈이 피식 웃었다. 이지유다운 발상이었다.
도훈은 한참을 웃고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일단 청심환부터 먹어.”
“냄새날 텐데요?”
“냄새는 카메라에 안 잡히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카메라에는 안 잡히지만…….”
“그냥 나만 믿어.”
도훈이 청심환을 가리키자 이지유가 마지못해 입에 털어 넣었다.
마치 양이 풀을 뜯듯 청심환을 오물오물 씹는 이지유를 도훈은 흐뭇하게 바라봤다.
물론 도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매니저의 비밀 수첩이었다.
그중에서도 알파벳이 담긴 보상 인벤토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중 ‘C’는 한민국에게 썼기에 흐릿한 자국만 남아 있었다.
[보상 인벤토리1: M, (C), A, Y, R]
대충, 이 알파벳에 대한 해석은 끝났다.
최근에 획득한 ‘R’만이 확인되지 않은 알파벳이었다.
도훈은 이 중 ‘R’이 뜻하는 것을 알 것만 같았다.
도훈은 마치 마음씨 좋은 삼촌 표정을 하며 이지유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촬영장으로 들어가란 뜻이었다.
이지유가 도훈에게 밀려 앵글 속으로 향했다.
몇 걸음 걷던 이지유가 멈췄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돌려 도훈을 바라봤다.
“실장님,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네요. 청심환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 파이팅!”
도훈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사실 청심환 효과는 아니었다.
‘R’은 Relrex를 뜻하는 알파벳이 분명했다.
이로써 검증도 완료하고 이지유의 마음도 진정시켰다.
이제 이지유는 초원의 집에서 보여 줬던 안정적인 연기를 펼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정여진이 도훈이 옆에 다가왔다.
정여진은 아직도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이 실장은 여전하네.”
“뭐, 똑같죠.”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아? 내가 딸이 있으면 사위 삼고 싶을 정도라니까.”
“다른 선생님도 그러시던데…… 하하.”
“에구, 넉살도 좋고.”
“그런데 왜 앞치마를 아직도 두르고 계시는 거예요?”
“이왕에 여기까지 온 거 저녁까지 책임지는 게 선배의 도리가 아닐까?”
“헉, 저녁이요?”
“그럼, 당연하지. 내가 저녁도 미리 준비해 뒀어.”
“한결같으신 건 선생님이시네요.”
“에이, 농담도 너무 지나치네. 하루가 다르게 나이 먹어 가는데 무슨 내가 한결같아?”
“아카데미 받으시기 전까지는 이 미모 유지하셔야 합니다, 선생님.”
“호호. 알았어. 농담이라도 기분 좋아, 이 실장.”
정여진이 기분 좋게 웃을 때 촬영장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찬성 감독의 신호에 따라 모든 스태프들이 제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조연출이 슬레이트를 치며 외쳤다.
“씬 넘버 2-5 가겠습니다.”
탁.
순간 정찬성이 검지로 앵글을 가리켰다.
“액션.”
그 말에 이지유의 첫 장면이 시작되었다.
정찬성은 모니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연스러운 이지유의 움직임.
사실 놀란 것은 이지유의 움직임 때문이 아니었다.
정찬성이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자연스러운 이지유의 표정이었다.
과장하지도 않지만, 소극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다고 하는 칭찬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첫 씬이 끝나자 정찬성이 기분 좋게 외쳤다.
“오케이. 컷.”
순간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졌다.
이전의 한숨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소리였다.
전에 나오던 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면, 지금은 묘하게 안도와 감탄이 적절하게 섞여 있었다.
* * *
2시간 후.
현장이 정리되고 스태프들은 조심스럽게 퇴근 준비를 마치자 정여진은 예고한 대로 그들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점심때 먹었던 도시락과는 또 다른 메뉴를 가지고 온 정여진 덕분에 스태프들의 세트장에서 살고 싶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그들은 도훈이 준비한 정심당의 케이크까지 들고서 조용히 퇴근했다.
조연출이 퇴근하기 싫다고 너스레를 떨자, 정찬성은 초과 근무 수당은 못 준다면서 그를 밀어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도훈 일행밖에는 없었다.
도훈이 남아 있는 것은 진시현의 부탁 때문이다.
그때 다미가 커피 두 잔을 양손에 들고 왔다.
“이, 이거 드세요.”
“아아고, 고마워라……. 참, 이거 용돈이야.”
진시현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다미에게 건넸다.
탑티어의 작가와 가수에게 만 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지금 진시현이 주는 만 원은 돈이 아니라 정이었다.
다미도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 저는 됐어요, 이모.”
“아니야, 받아.”
진시현이 다미에게 다시 지폐를 내밀자, 다미는 조용히 강영웅을 바라봤다.
강영웅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미는 그제야 돈을 받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강영웅이 말했다.
“저희가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맞겠죠?”
말을 마친 강영웅이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진시현이 말했다.
“됐어, 우리 사이에 왜 그래?”
“저희 있어도 돼요?”
“뭐,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진시현이 말끝을 흐리며 도훈과 강영웅을 번갈아 봤다.
그러고는 뭔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초원의 집 대본 말이야, 이 실장이 같이 쓴 거라면서?”
“네?”
“대충 다 들었어. 그쪽 정재웅 감독하고 우리 정 감독하고 먼 친척뻘이잖아. 중간에서 다미 아빠가 다리 놔준 얘기도 알고 있고. 그러니까…….”
순간 도훈은 눈을 크게 떴다.
정재웅은 초원의 집 감독이었다.
그가 정찬성과 먼 친척이라는 건 도훈도 처음 알았다.
초원의 집의 각본은 김다솜 외 1인으로 표시되어 있다.
진시현은 지금 집필하고 있는 ‘소환하라 1987’이 아닌 초원의 집에 대해서 침을 튀기면서 의견을 털어놓고 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쉴 틈 없이 말하고는 각본이 마음에 들었다는 소감으로 말을 마쳤다.
뜬금없는 칭찬에 분위기는 살짝 어색해졌다.
“아, 감사합니다.”
도훈이 살짝 고개 숙이자, 진시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 좀 도와줘요, 이 실장님.”
갑자기 진지해진 표정에 도훈이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