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한참 동안 한민국을 살피던 도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민국의 기억력은 평균 이상이다.
운전기사로 일할 때나 매니저로 일할 때 모두 기억력으로 인한 실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대본을 외우지 못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훈은 이지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대본 좀 줘 봐. 이지유 배우.”
“네, 실장님.”
이지유가 자신의 대본을 내밀었다.
그녀는 친절하게 한민국과 자신이 등장하는 씬을 펼쳐 줬다.
거기에 형관 팬으로 표시까지 되어 있기에 알아보기도 쉬웠다.
오늘 촬영할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장동일을 비롯한 중년 연기자들의 분량이 대부분이었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진행된 오전 촬영 분량이었다.
이지유와 한민국은 오후에 세트장을 옆으로 옮겨서 5분 남짓한 분량을 마무리 지으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수록 의문이 쌓여 갔다.
턱을 매만지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원래 기억력이 나쁘지는 않았잖아.”
“그, 그게…….”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실장님, 그러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거든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대본이 똑똑히 기억났어요. 그런데 여기에 오니…….”
“다 까먹었다는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뭐, 까먹었으니까 이러고 있겠지.”
“휴, 미치겠어요. 다음 씬이 우리 차례거든요. 저 잘리는 건 괜찮은데, 미안해서 어떻게 해요.”
한민국이 울상이 된 표정으로 대본을 다시 잡았다.
포기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이지유 배우하고 민국이는 잠깐 따라 나와.”
“저요?”
“일단 따라 나오라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 한민국이 많이 컸네.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니까 안심해.”
“아, 알겠어요, 실장님.”
“참, 대본은 놔두고 커피는 들고나와.”
“…….”
한민국이 말없이 커피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민국이 고개를 푹 숙이자 이지유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한민국은 반강제적으로 바깥으로 나왔다.
도훈이 이끈 곳은 지하 주차장이 아니라 지상이었다.
세트장의 밝은 조명 대신 자연광이 그들을 반겨 주었다.
세트장 밖으로 나온 한민국이 손으로 햇볕을 가렸다.
“와, 눈부시네요.”
“세트장보다는 덜 눈부시지 않아?”
“아닌데요, 여기가 더 눈부신데요.”
한민국이 눈을 찡그리자 도훈이 피식 웃었다.
한민국의 증세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민국은 세트장의 조명도 잊고 있었던 것.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부담감 때문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카메라 울렁증이 분명했다.
일반인에게 카메라 울렁증이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카메라란 무엇일까?
순간을 영원히 담아 둘 수 있는 마법이다.
영원하게 남게 되는 그 장면에 대한 두려움.
바로 그것이 카메라 울렁증을 만들어 낸다고 보면 된다.
한민국은 지금 눈살을 찌푸리며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을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세트장 내에서의 불빛은 자연광보다 몇 배 밝게 세팅되었다.
그런데도 한민국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주위가 깜깜하게 보이는데, 대사가 기억날 리가 있을까.
정확히는 대본을 못 외우는 것이 아니라 까먹은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도훈이 커피를 시원하게 들이켜자 한민국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실장님 하실 말씀이 뭐예요?”
“일단 시원하게 커피나 마시고 얘기해.”
“네?”
“일단 커피부터 마시고 정신 차리라고.”
“아, 조금 있으면 저희 차례인데…….”
“정 감독님한테 얘기해 뒀으니 안심하고. 어차피 세트장 옮겨야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때였다.
이지유가 커피를 시원하게 들이켜더니 쓰레기통을 향해서 던졌다.
플라스틱 커피 컵이 포물선을 그리며 시원하게 쓰레기통으로 빨려 들어갔다.
퍽.
소리까지 경쾌하게 울리자, 이지유가 피식 웃었다.
“와, 이거 완전히 프로 선수 폼이잖아. 꼭 우리나라 최고의 슈터, 신선희 언니 같아.”
이지유가 기분 좋게 말하자, 한민국이 피식 웃었다.
“신선희는 무슨……. 프로 선수 따라가려면 너는 아직 멀었어. 열심히 해 봐, 또 알아?”
“알긴, 뭘 알아?”
“열심히 노력하면 내가 매니저 해 줄지도 모르지.”
“됐고, 나는 그런 비리비리한 매니저는 필요 없거든.”
그들은 뜬금없는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만약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고개를 갸웃하며 미친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신선희는 1980년대에 코트를 주름 잡았던 여자 농구 선수의 이름이다.
지금은 코치직에 있는 인물.
그런데 왜 그녀의 이름이 그들 사이에서 오갈까?
그때 이지유가 피식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치 한민국을 한 대 치려는 듯 도끼눈을 하고서 말이다.
그 모습에 도훈이 외쳤다.
“오케이, 거기까지.”
그 말에 이지유가 말아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한민국이 눈을 크게 뜨고 도훈을 바라봤다.
“실장님 이게…….”
“거봐, 되잖아.”
도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지유가 처음에 한 말은 ‘소환하라 1987’ 중 그들이 등장하는 첫 장면의 대사였다.
커피잔을 쓰레기통에 넣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지문.
이지유는 지문과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한 것이다.
거기에 반사적으로 한민국이 반응한 것은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다.
사실, 도훈은 반사적으로 대사를 뱉은 행동이 한민국의 행동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민국은 그동안 차 안에서도 집에서도 그리고 사무실에 출근해서도 몇 마디 안 되는 대사를 외우고 또 외웠었다.
그러고 장선우의 아버지인 장진수의 지도에 따라 성격별로 발음을 교정하며 여러 가지 캐릭터를 연습해 왔다.
그 정도면 아마 대사 자체가 뇌 속에 각인되었을 터.
한민국은 그동안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노력을 해 왔다.
덕분에 지금 이지유가 갑자기 뱉어 낸 대사에 바로 반응한 것이다.
문제는 반사적으로는 이렇게 잘 터지는 대사가 세트장에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도훈은 이 문제의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도훈은 사람 좋은 얼굴로 한민국의 어깨를 토닥였다.
“대사를 못 외운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몸에서 거부하는 거지.”
“대사를요?”
“아니, 수많은 카메라를!”
“그럼?”
“맞아, 아무래도 카메라를 몸이 의식하고 거부하는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해요?”
“그야 간단하지.”
“간단하다고요? 그게 말이 되죠? 오죽하면 탑 MC인 유재성 씨도 몇 년을 고생했겠어요?”
한민국은 한 번에 수많은 질문을 쏟아 냈다.
“내 해법은 진짜 간단해. 카메라를 인식 안 하면 되는 거야.”
“아…… 어떻게 카메라를 인식 안 해요?”
“연기에 미치면 돼!”
“연기에 미친다는 게…….”
한민국이 말끝을 흐리면서 도훈을 바라봤다.
해답을 구하는 눈빛으로 말이다.
도훈은 마치 해답을 내려 주는 신처럼 전지전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도훈이 다시 한민국의 어깨를 토닥였다.
물론 단순한 위로는 아니었다.
한민국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제까지 모아 뒀던 알파벳 몇 개를 쏟아 넣었다.
그중 하나는 ‘crazy’를 나타내는 ‘C’였다.
알파벳이 빛이 되어 도훈의 손등을 타고 한민국의 심장에 파고들었지만, 그 광경을 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오직 도훈만이 이 경이로운 장면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도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됐어. 내 눈에는 적당히 미칠 준비가 된 것 같아. 이지유 배우는 어떻게 생각해?”
“저도 실장님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정도만 해도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이 날 거예요.”
이지유도 한민국을 응원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소리 없이 도훈의 뒤에 쓱 나타났다.
드리운 그림자 덕분에 도훈도 알아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린 도훈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 도훈의 뒤에서는 진시현 작가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 작가님, 여기에는 무슨 일로…….”
질문은 당연했다.
진시현은 그녀의 사무실에서 나머지 원고를 쓰고 있어야 했다.
집필을 중단하고 현장에 나타난 것 자체가 정상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사실, 현장에 출근해서 간섭하는 작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진시현은 그런 부류와는 거리가 있었다.
도훈의 질문에 진시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유레카에 들렀는데, 실장님 여기 있다고 해서 이리로 왔어요.”
“차라리 전화하시죠. 그러면 제가 찾아뵈었을 텐데요.”
“바쁜 사람한테 괜히 전화하면 좀 그렇잖아요.”
묘하게 자신감이 없는 모습.
분명히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도훈은 일단 질문은 뒤로하고 진시현의 표정을 살폈다.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분명히 할 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훈은 순간, 수만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작가님 혹시 사기당하셨어요?”
“사기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실장?”
“표정이 급해 보이셔서요. 지난주에 계약금이 입금됐잖아요. 계약금 입금된 후에 터질 만한 사건이라면 사기당하는 일밖에 없잖아요.”
“아니, 내가 왜 사기를 당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표정이…….”
“제 표정이 그렇게 심각했어요?”
“네.”
도훈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시현이 한숨을 쉬며 이지유를 바라봤다.
“휴, 이지유 배우가 보기에도 그래 보여요?”
“아주 조금요!”
이지유가 엄지와 검지를 살짝 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진시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 내가 그렇게 보였다니……. 그런데 사기당한 건 절대 아니에요. 계약금은 제 통장에 그대로 있어요. 제가 그 돈을 한 번에 다 꼬라박을 간 큰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고민이 있어서 이 실장을 찾은 거예요.”
“고민이요?”
“일단,오늘 촬영 끝난 후에 얘기해요. 아까 보니까 오케이 컷 한 번에 받아 낼 것 같은 기세인데요.”
진시현은 한민국과 이지유를 번갈아 봤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앞장서서 걸어갔다.
깜짝 놀란 한민국이 다급하게 따라가며 물었다.
“작가님, 어디서부터 본 겁니까?”
“처음부터!”
“그럼 아까 제가 고개 숙이고 있을 때부터요?”
“오케이.”
말을 마친 진시현이 빠른 걸음으로 세트장 안으로 사라졌다.
물론 도훈과 한민국 그리고 이지유도 그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 * *
한민국과 이지유의 첫 장면.
둘은 고등학생이다.
1987년은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고 있었던 시점.
둘은 교복이 아니라 평상복으로 전철역에서 만났다.
이지유는 커피가 담긴 투명 컵을 들고 있다.
카메라가 약간 떨어져 한민국과 이지유를 잡고 있다.
정찬성은 흡족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찬성은 둘의 샷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 이지유의 다음 동작이 관건이었다.
이지유가 커피를 다 비운 후 기분 좋게 쓰레기통을 향해 슛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