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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현 작가의 말에 도훈이 웃었다.
“케이넷이 생각보다 돈이 많습니다.”
“이번 TVL 제작에는 문송 그룹이 끼어 있어요.”
“문송이요?”
“거봐요, 놀라시잖아요. 문송하고 돈 싸움하는 건 달걀로 바위 치기에요.”
“그건 그렇지만…….”
도훈이 말끝을 흐리며 눈을 빛냈다.
얼마나 빛이 나는지 진시현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 눈빛 조금 수상한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주현 배우, 제가 만나 봐도 되겠습니까?”
“실장님이요?”
“네, 제가 만나서 한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한데…….”
“저 그렇게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작가님.”
말을 마친 도훈은 최대한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도훈은 머릿속에 과녁을 하나 그리고 있었다.
그 과녁에는 문송의 황강천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시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연락처 줄 테니까. 한번 컨택해 보세요. 만약에 안 되면 차선으로 가는 게 순리에 맞죠.”
“감사합니다, 작가님.”
“김주현이 안 되면 두 번째로 그 배역에 어울릴 만한 배우를 찜해 놓긴 했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확실하게 도와주셔야 해요.”
“약속드리겠습니다.”
* * *
다음 날 오전 여의도의 한 카페.
도훈은 김주현의 매니저와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도훈의 옆에는 한민국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도훈이 한민국에게 김주현의 단점에 대해 이미 설명한 후부터 한민국의 이마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실장님, 왜 약속을 잡으신 거예요?”
“진시현 작가님이 부탁한 거잖아. 그러니까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형!”
“쉿 조용히 해, 남들이 전부 이쪽만 보잖아.”
“네, 알았어요. 김주현이 출연하면 이번 작품 망할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내 느낌이지.”
“이제까지 실장님이 한 얘기는 다 맞았잖아요.”
한민국이 검지를 들어 도훈의 얼굴을 가리켰다.
한민국은 도훈을 용한 점쟁이를 보듯 했다.
이것이 요점 도훈을 바라보는 한민국의 속마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훈이 벌인 일들은 결국에는 모두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왔다.
하다못해 실수조차 이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훈의 말에 의하면 김주현이 이 작품에 출연하면 절대 안 되었다.
그런데 도훈은 캐스팅을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
아무리 생각도 앞뒤가 안 맞았다.
한민국은 그저 진시현 작가를 위해 생색내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한민국이 상상의 나래를 펼 때였다.
삼십 대 중반에 머리를 시원하게 뒤로 넘긴 사내가 커피숍으로 들어와서 두리번거린다.
도훈은 그가 김주현의 매니저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여기입니다.”
도훈의 손짓에 사내는 천천히 걸어왔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김주현의 매니저는 살짝 새치가 보였다.
아무래도 마음고생을 좀 하는 것 같았다.
그는 현란한 꽃무늬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늘푸른액터의 김상식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유레카의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도훈도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오호, 요즘 화젯거리라는 유레카군요. 거기는 근무하기가 어떤가요?”
“뭐, 그저 그렇습니다. 규모가 작다 보니 항상 가족 같은 분위기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유레카가 소규모라니요?”
“대형 기획사에 비하면 아직 소규모라고 할 수 있죠.”
도훈이 웃으며 김상식의 눈치를 살폈다.
김상식은 도훈의 명함을 아직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제 명함 뚫어지겠네요.”
“하하, 아닙니다. 혹시나 스타플레이어에 나왔던 그 매니저분인가 해서 유심히 봤습니다. 설마 아니겠죠…….”
“맞습니다. 그때 머릿수를 채워 주느라 급하게 출연했었죠.”
“헉. 그럼, 그때 무대에 선 건…….
“말씀드렸다시피 우연입니다.”
“저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신 거죠?”
“‘소환하라 1987’ 캐스팅 때문에 왔습니다.”
“그럼, 오디션에 출연하신 후에는 배우 매니저가 되신 겁니까?”
“주력으로는 보이 그룹을 맡고 있습니다. 오디션 때 맺은 인연으로 블랙홀이라는 그룹을 맡고 있습니다.”
“배우가 아니라 보이그룹을 맡고 계신다고요?”
김상식이 눈을 크게 뜬 채 도훈의 대답을 기다렸다.
캐스팅보다도 도훈에 대해 더 궁금해하는 듯 보였다.
“뭐, 사실 블랙홀만 맡은 것은 아니고요. 배우도 같이 맡고 있습니다.”
“정신없으시겠네요. 저는 주현이 하나 맡은 것도 벅찬데…….”
“뭐, 사는 게 다 그렇죠.”
“역시 매니저 마음은 매니저가 안다더니, 맞는 말이네요.”
일단 분위기는 좋았다.
도훈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일단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케이넷의 추억을 ‘소환하라 1987’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케이넷이요? 얼마 전까지 TVL에서 진행하기로 했던 작품 아닌가요?”
“사정이 생겨서 정찬성 피디님과 진시현 작가님이 케이넷과 함께하시기로 했거든요. 슛 들어가는 즉시 편성도 마무리될 겁니다.”
“편성이 먼저 아닌가요? 순서가 바뀐 것 같은데요…….”
김상식이 고개를 갸웃하며 도훈을 바라봤다.
순서가 바뀐 것은 맞았다.
편성도 없이 제작에 들어가는 것은 허공으로 돈을 뿌리는 행위와도 같았다.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해도 편성해 줄 방송사가 없다면?
그 작품은 영영 묻힐 수밖에 없다.
도훈이 웃었다.
“케이넷 자체 제작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오호, 오랜만에 자체 제작이네요.”
“그만큼 자신 있으니까요.”
도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작품에 대해서 제법 상세하게 물어봤다.
마치 정보를 캐내려는 스파이 같은 느낌이었다.
도훈의 옆에 있던 한민국은 경계의 눈빛으로 김상식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도훈은 그가 궁금해하는 것에 빠짐없이 답해 주었다.
김상식이 다시 질문을 이었다.
“혹시 상대역이 누군지 물어봐도 됩니까?”
“이지유 배우가 될 것 같습니다.”
“이지유라…….”
살짝 고개를 갸웃하자 도훈이 설명을 이었다.
“아이돌 출신에 이번에 토론토 영화제에서 각광을 받은 초원의 집에 출연한 배우죠.”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토론토 영화제라니요?”
“아, 모르고 계셨군요.”
“네, 아예 몰랐습니다.”
“흠.”
도훈이 헛기침했다.
마치 듣보잡 취급당하는 느낌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물론 김상식의 잘못은 아니었다.
묘하게 이번 초원의 집의 수상 기사가 완벽하게 묻혔다.
도훈이 다시 물었다.
“김주현 배우가 ‘소환하라 1987’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닌가요?”
“처음에는 출연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는데, 중간에 문제가 생겨서요…….”
그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쓱 살폈다.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싶었다.
김상식의 행동에 도훈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진심이었다.
소문이 가장 빠른 것이 여의도였다.
방송가와 증권가의 루머의 출처가 바로 이곳 여의도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김상식은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저희가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시현 작가님의 제안도 거절한 거고요.”
“제안을 거절하셨다고요?”
“확답을 안 드렸으니 거절한 게 맞죠. 참, 사정은 우리 회사의 비밀이라서…… 말씀드리기가 뭐하네요.”
“제가 이유를 물어봐도 말씀해 주시지 않겠지요?”
“그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혹시 출연료 때문인가요? 그건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네?”
김상식의 눈이 보름달만 하게 커졌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도훈이 웃었다.
“유레카와 그리고 케이넷 뒤에 두 명의 회장님 계시지 않습니까?”
황백석과 장경자를 말함이었다.
문송의 지원을 받는 TVL과 미라클 중 선택의 여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김상식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출연료 말입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문송에게 지는 건 싫습니다.”
“그걸 어떻게…….”
김상식은 다시 말을 더듬었다.
표정을 보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도훈은 이곳에 오기 전에 조사를 했다.
TVL에 손을 댄 것은 문송 그룹이었다.
그중에서도 김주현의 마음이 기운 쪽은 ‘모솔전쟁’이라는 작품이었다.
도훈은 전생의 기억에서 ‘모솔전쟁’을 떠올렸다
‘모솔전쟁’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태 솔로들의 이야기였다.
여섯 명의 선남선녀가 펼치는 로맨틱 코미디.
허우대 멀쩡한 여섯 명이지만, 각자의 사정이 있어 계속 모태 솔로로 남아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평균 정도의 시청률로 마무리되었었다.
호평도 혹평도 없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작품.
신인 작가의 작품이라면 준수하다 할 수 있는 시청률을 남겼다.
문제는 로코의 여왕 은미호의 유일한 실패작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이것은 전생의 기억이었다.
연예계 역사가 조금씩 바뀌었으니 앞으로 실패할지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 했다.
중요한 점은 ‘소환하라 1987’에 점찍었던 배우를 ‘모솔전쟁’의 제작진이 캐스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작가의 취향인지 제작사의 압력인지 모를 정도의 중구난방 캐스팅이었다.
은미호의 성격상 감독의 압력을 받을 것 같지는 않고…….
도훈이 생각하기에 제작사의 압력이 맞았다.
‘모솔전쟁’의 경우 문송의 황강천이 깊이 관여되었다고 들었다.
이것은 얼마 전 만난 황강천의 선전포고라고 봐야 했다.
도훈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가 문송보다 더 많이 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대표님은 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셔서요.”
여기서 대표는 도훈 자신이었다.
상대가 도훈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기에 편하게 칭한 것이다.
김상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럼, 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회당 이천 드리죠.”
도훈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그 모습에 김상식의 눈이 커졌다.
“이, 이천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상식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편하실 대로요.”
“그럼…….”
김상식이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그는 주머니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핸드폰을 챙겼는지를 확인하는 듯 보였다.
누가 봐도 누군가에게 급히 연락하러 가는 듯 보였다.
그가 화장실로 사라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한민국이 울상이 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김주현 배우에 대한 생각이 바뀌신 거예요?”
“아니, 김주현은 아직까지는 작품을 좀먹는 바이러스가 맞아.”
“그런데 왜…….”
“장담컨대, 김상식 매니저는 조금 있다가 이곳으로 돌아오면 내 제안을 거절할걸.”
“회당 이천을 거절한다고요?”
“당연하지, 상대는 더 준다고 약속할 테니까.”
“그럼…….”
“지금부터 스노우볼을 천천히 굴려야지.”
김주현을 빼앗기는 것은 도훈의 계획 중 하나였다.
뜨거운 감자를 상대의 입에 단번에 넣어 주는 것이 첫 번째 단계였다.